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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그룹 이건희 전 회장(왼쪽)과 아들 이재용 전무. 사진은 이건희 전 회장과 이재용 전무가 지난해 4월 11일과 2월 28일 각각 서울 한남동 삼성 특검 사무실에 소환되어 승강기를 탈 때의 장면
 삼성그룹 이건희 전 회장(왼쪽)과 아들 이재용 전무. 사진은 이건희 전 회장과 이재용 전무가 지난해 4월 11일과 2월 28일 각각 서울 한남동 삼성 특검 사무실에 소환되어 승강기를 탈 때의 장면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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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본사의 한 사무실. 한 직원은 사무실 안에 설치된 TV 모니터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모니터에는 부서의 상무 이상 임원들이 현재 내근중인지, 출장중인지를 알리는 표시가 돼 있다.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그동안 낯익던 임원들의 이름이 아예 뜨지도 않았다. 그날 오후 부서장인 K전무는 조용히 자신의 책상 위에 회사 출입 카드를 내려놓았다.

16일 저녁 서울 지하철 강남역 사거리 주변의 A호프. 10여 명의 삼성전자 직원들이 자리를 잡았다. 1차 저녁식사를 마치고 이어진 2차 회식자리는 처음부터 침통한 분위기였다. K전무가 "그동안 고마웠다"는 퇴직 인사를 건네자, 일부 직원들은 눈물을 글썽였다. 마침내 한 여성 직원이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3일 후 19일 발표된 삼성 임원인사에서 K전무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이어 21일 삼성전자는 1400명에 달하는 본사 조직 가운데 1200명을 수원과 기흥 등 지방으로 내려 보내는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K전무가 속해 있던 부서는 아예 이름까지 사라지면서,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 일부 직원은 아예 회사를 떠날 고민까지 하고 있다.

경제위기속 '이건희 시대' 저물고, '이재용 시대' 떠오르다

국내 최대 그룹인 삼성이 대대적인 변화를 꾀하고 있다. 바탕에는 '삼성도 망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깔려 있다. 작년부터 본격화된 경제위기 속에 그룹 주력계열사인 삼성전자마저 휘청거리고 있다. 23일 삼성전자의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사상 최대 매출의 실적에도 불구하고, 4분기에는 7400억원의 영업손실(순손실 200억원)을 기록하며 적자로 전환했다.

다른 계열사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일부 계열사는 작년말부터 자금난 사정이 심각해 높은 이자를 조건으로 회사채를 발행하기도 했다. 이들 가운데는 이건희 전 회장의 큰딸인 이부진씨가 있는 제일모직과 둘째딸 이서현씨의 호텔신라 등도 포함돼 있다.

이같은 위기감 속에 변화의 시작은 인적 쇄신이었다. 우선 위로부터의 대대적인 물갈이가 이뤄졌다. 45명에 달하는 사장단 인사 가운데 25명이 옷을 벗었다. 휴대전화 '애니콜'과 반도체 신화로 유명한 이기태, 황창규 사장 등도 포함돼 있다. 이어진 부사장급 이하 임원 인사도 마찬가지다. 삼성전자에서만 200여 명이 넘는 임원이 회사를 떠나야만 했다.

윤순봉 삼성 석유화학사장(전 삼성 브랜드전략팀장)은 "글로벌 경제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철저히 현장중심의 인사와 조직개편 중심으로 이뤄졌다"고 말했다.

이인용 삼성 커뮤니케이션 팀장(부사장)은 21일 삼성전자 조직개편에 대해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번 혁신적인 인사로 '관리의 삼성'에서 '효율의 삼성'으로 완전히 탈바꿈한다"고 강조했다.

이재용 삼성시대의 키워드는 '효율과 현장'?

지난해 11월 17일 입주한 서울 서초동 강남역 인근 삼성타운 전경. 32·35·43층의 최첨단 인텔리전스 빌딩 3개동으로 이뤄진 삼성타운에는 삼성전자, 삼성물산 등이 입주해 있고, 상주 인구만 1만명이 넘는다.
 지난해 11월 17일 입주한 서울 서초동 강남역 인근 삼성타운 전경. 32·35·43층의 최첨단 인텔리전스 빌딩 3개동으로 이뤄진 삼성타운에는 삼성전자, 삼성물산 등이 입주해 있고, 상주 인구만 1만명이 넘는다.
ⓒ 선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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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사장의 이같은 공식 발언은 상당한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이 삼성 안팎의 생각이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이 부사장의 경우 이번 삼성인사에서 전무에서 부사장으로 승진하면서, 자리도 삼성전자에서 그룹 홍보팀장으로 이동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의 대학 선배인 이 부사장은 지난 2005년 삼성 X파일 사건으로 떠들썩할 때, 이 전무가 직접 MBC에서 영입한 인물이다. 

3년여 전자의 홍보업무를 총괄해 온 이 부사장은 이번에 그룹의 공식 '입'과 이씨 총수일가의 대외 이미지 관리를 책임지는 자리로 올라선 것이다. 그 첫 데뷔무대가 이번 조직개편에 대한 설명이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이 전무의 측근으로 꼽히는 이 부사장이 이건희 시대의 '관리의 삼성'을 접고, '효율의 삼성'이라는 이미지를 들고 나온 것은 이재용 시대의 방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해석을 달기도 했다.

'효율'과 함께 또 하나로 강조된 것은 '현장' 중심이다. 경제위기에 적극 대응하기 위해 현장에서 곧바로 의사를 결정하고, 움직이는 시스템을 확실히 하겠다는 것이다. 삼성전자의 대대적인 인사조직 개편도 이에 따랐다.

특히 이번 인사에서 삼성전자의 서열 2위로까지 올라선 최지성 사장(58)은 철저한 현장중심가다. 최 사장은 이재용 전무의 최측근 인사로 꼽히는 인물이다.

이름을 밝히길 꺼린 삼성의 다른 계열사 고위 임원은 "이윤우 삼성전자 부회장(63)이 있지만, 최 사장이 삼성전자 톱으로 올라설 날이 머지 않을 것"이라며 "그때는 JY(이재용 전무를 일컫는 말)도 본격적인 경영일선에 모습을 보이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어차피 삼성 차기 총수는 이재용 아닌가"

따라서 이번 인사와 조직개편은 이재용의 삼성시대를 위한 준비단계 성격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물론 삼성쪽에선 이같은 시각을 부인하고 있다.

윤순봉 사장은 "(이재용 전무 체제를 위한 세대교체가) 전혀 아니다"면서 "사장단 인사는 그동안 하지 못한 인사를 정상화시킨 것이고, 나머지도 위기 극복을 위한 새로운 경영테마로서의 현장을 강조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미 삼성 내부에서조차 언젠가는 이재용 체제로 가야할 것이며, 이를 위한 세대교체를 통한 인적, 조직 쇄신은 불가피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삼성의 고위 인사는 최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어차피 삼성의 차기 총수는 이재용 아닌가"라고 반문하면서, "이번에 세대교체가 됐다고 하지만, 아직 여전히 60대 이상의 부회장단 인사들이 남아있고 (이건희) 회장도 (삼성 경영에) 여전히 관심이 높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대법원 판결을 통해) 조만간 지배구조를 둘러싼 논쟁도 끝이 날 것"이라며 "외환위기를 통해 삼성이 크게 도약했듯이, 이번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인적, 조직쇄신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이를 통해 자연스레 삼성의 차세대 경영도 자리를 잡게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센터 소장(한성대 교수)는 "언제부터 삼성의 경영능력 척도에 나이가 기준이 됐는가"라며 "이번 인사는 결국 이재용 전무의 삼성 경영권 승계구도의 일환이라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고 말했다.

김 소장은 또 삼성비자금 의혹 사건을 들면서, "이 전무는 삼성의 최고경영자가 되기에 앞서, 주주를 비롯해 기업의 이해당사자들과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받기 위한 노력을 먼저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대적인 인력과 조직 구조조정속에 직원들 동요도 심각

한편, 대대적인 인력과 조직 구조조정으로 삼성전자 내부 직원들의 동요도 점차 커지고 있다. 일부에선 '효율과 현장'이라는 이름 아래 제대로 된 준비없이 무리하게 추진하고 있지 않느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삼성전자의 김아무개 과장은 "서초동으로 이사온 지 2개월만에 다시 수원이나 기흥, 천안으로 자리를 옮기라는 발표에 상당수 직원들이 동요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일부 직원은 아예 이번 기회에 이직을 심각히 고민하고 있지만, 이 역시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이름을 밝히길 꺼린 또 다른 직원은 "회사에선 인위적인 구조조정은 없다고 하지만, 당장 내 일이 없어지고 (새로운) 업무를 받지 못하면 사실상 회사를 떠나라는 말과 같지 않나"라며 불안감을 감추지 않았다.

특히 삼성전자와 전자계열사 등이 주로 입주해 있는 서초동 삼성타운의 C동 직원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C동에는 삼성타운 3개 건물 가운데 가장 많은 4000여 명이 근무하고 있으며, 작년 11월 24일에 이사를 마무리했다.

삼성전자는 이번 조직개편에 따라 본사소속 글로벌마케팅실, 고객만족경영센터, 디자인경영센터, 경영기획팀, 경영혁신팀, 해외지원팀, 구매전략팀, 인사팀 등의 경우 일부 부서 자체가 없어지거나, 지방 사업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서울 본사에는 기업관리, 기업설명(IR), 자금, 경리, 홍보 등만 남는다. 1400명 가운데 200명만 남고, 나머지는 현장으로 재배치한다는 것이 회사쪽 방침이다. 그렇다고, 1200명 모두가 서초동 본사를 떠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본사 조직 가운데 (서울에 있는 것보다) 사업 현장에서 더 빠른 의사결정으로 경영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지 여부가 중요하다"면서 "당장 이들 직원 모두가 생산현장으로 자리를 옮기라는 뜻은 아니다"고 말했다.

하지만 직원들은 여전히 불안하다. 사업부서 통·폐합과 업무 분장 등의 과정을 통해 자연스레 인력 구조조정이 이뤄질 것이라는 생각이 많다.

삼성의 이번 인사조직 개편을 두고, 일부에선 '혁명'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반대로, 삼성의 경영과 지배구조의 불투명성을 여실히 드러냈다는 지적도 있다. 이 사이에 수많은 직원과 협력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또 다시 실직 위기로 내몰리고 있다.


태그:#삼성, #이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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