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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과 평화>
<전쟁과 평화> ⓒ 김영사

전쟁과 평화.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대하소설 얘기가 아니다. '세계와 동북아 평화포럼' 대표인 장성민(46)씨가 최근 펴낸 정책 제안서에 관한 이야기다.

 

장씨는 지난 96년 냉전 이후의 미국 외교정책을 진단한 <강대국의 유혹>을 번역한 이후 한반도 역사의 전환기마다 <부시행정부의 한반도 리포트>(2001년), <전환기 한반도의 딜레마와 선택>(2004년), <미국 외교정책의 대반격>(2005년) 같은 책을 펴내왔다.

 

하나같이 '세계와 동북아 평화포럼' 대표답게 스케일이 큰 책들이다. 정치를 하면서도 이런 책을 꾸준히 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보편 정치가이자 한반도 미래 전략가'라는 자평이 허언이 아님을 짐작케 한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김정일 이후, 북한은 어디로 가는가'라는 부제를 단 <전쟁과 평화>(김영사)라는 책을 펴냈다.

 

"한-미 정부는 '북맹(北盲)이자 김정일맹(金正日盲)'"

 

우선, 뜻밖이다. 지난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은둔에서 해방된 이후, 이제는 사람들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에 대해서 알 만큼 안다고 여기는 시점에 새삼스럽게 김정일을 본격 해부하고 김정일 이후를 전망하는 책을 낸 것이 이채롭다.

 

물론 이 책은 본격적인 김정일 연구서는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을 읽노라면, 우리가 얼마나 김정일에 대해 무지하고, '김정일은 누구인가'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지를 금세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이런 대목이다.

 

"김정일은 누구에게도 굽실거리기 싫어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그리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이 직접 전면에 나서서 적국의 수장을 비판하거나 공격해본 적도 없다."(18쪽)

 

기자들이 즐겨 쓰는 '팩트'(fact)에 근거한 이런 분석은 적지 않은 한반도 전문기자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대목이다. 저자가 보기에 한국과 미국 정부는 여전히 '북맹(北盲)이고 김정일맹(金正日盲)'이다.

 

"김일성과 김정일에 관해서는 감정적이고 부정적인 평가로 일관한다. 그래서 북한의 통치자 김정일을 이성적으로 정확히 판단하는 데 항상 실패해 왔다. 이런 점에서 한국과 미국은 지금 북맹(北盲)이고 김정일맹(金正日盲)이다."(30쪽)

 

그것은 지난 1994년의 1차 핵 위기 이후 15년 동안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미 양국이 공조를 해왔지만, 아직까지 실패를 거듭하고 있는 본질적인 배경이기도 하다. '적과 아군의 실정을 모르면 싸울 때마다 반드시 패한다'(不知彼不知己 每戰必敗)는 병가(兵家)의 전법을 빌리지 않더라도, 잘못된 판단에 기초하여 세워진 대북전략과 정책은 실패할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김정일 국가의 권력 중심은 이미 당에서 군으로 넘어갔다"

 

저자의 분석이 힘이 있는 것은 두루뭉시리한 화법으로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놓은 다른 학자나 전문가들과 달리 정확한 팩트에 근거한 전망을 내놓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전망은 "철저하게 현실적인 정치권력의 관점에서 북한의 내부 문제를 들여다보고 최고 통치자의 정치적 의도를 정치심리학적으로 읽으려 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를테면 저자는 당과 군부의 파워게임에서 "김정일 국가의 권력 중심은 이미 당에서 군으로 넘어갔다"(63쪽)고 단언한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김정일 이후' 북한을 통치하는 데 군부는 두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첫 번째는 통치 능력이 없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정통성의 부족이다."(65쪽)

 

그래서 저자는 군부가 손을 내밀 수밖에 없고, "현재 김정일 역할을 대신해줄 수 있는 단 한 사람"인 김정일의 매제이자 조선노동당 행정부장 장성택에 주목한다.

 

"지금 북한 내부에서는 장성택의 권력에 도전할 수 있는 라이벌은 거의 없다. 장성택에게 도전하는 집단이나 세력은 곧 김정일의 권력과 통치행위에 도전하는 세력으로 간주될 수 있을 정도이며, 국가운영과 관련된 중요한 대소사에 대한 결정은 김정일의 지시와 사인을 받아 장성택이 집행한다." (66쪽)

 

특히 저자는 각종 연구기관의 문헌과 미국 중앙정보국(CIA) 같은 정보기관의 분석 등을 종합해 "현재 북측에서 개성공단을 폐쇄시키기 위한 단계적 수순을 밟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큼 문을 닫지 못하고 있는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는 장성택 행정부장과 김경희 경공업부장이 폐쇄를 강력 반대하고 있기 때문"(121쪽)이라고 진단한다.

 

오바마-김정일 정상회담과 북핵위기 5단계 해법

 

그럼에도 한반도의 불확실성은 전례없이 높아지고 있다. 지난 17일 전시작전권을 지휘하는 조선인민군 총참모부의 대변인까지 나서서 "전면 대결 태세에 진입할 것"을 선포했다.

 

그런데도 우리 언론에서 전쟁 위기의 징후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어쩌면 우리가 일상에서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듯이, 김정일과 한반도 위기지수에 익숙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한반도는 지금 전쟁과 평화의 기로에 서 있다. 특히 그로서는 "북한의 핵문제를 평화적인 정치외교 수단으로 풀어내지 못하면 한반도는 또 다시 지금의 평화 상태로부터 멀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북-미간 정상회담을 통한 일괄타결 방식이다.

 

"한마디로 말해 북한의 김정일에게 핵무기 보유는 체제 유지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지금 그에게 핵 포기란 체제 유지의 포기와 사실상 다를 바가 없다…(중략)…이런 북한이 자국의 핵무기를 스스로 포기할 수 있을까. 있다면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무엇일까. 가장 확실한 체제 보장책으로 북한이 채택한 핵무기와 같은 수준에서, 체제 안전의 물꼬를 터줄 '외교적 대체재'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일까. 북-미 정상회담을 통한 일괄 타결뿐이다."(188~189쪽)

 

저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오바마-김정일 정상회담과 북핵위기 5단계 해법'으로 제시하고 있다.

 

1) 북-미 양국 정상회담 준비 특사 회담 2) 특사회담 통해 확인된 입장을 정리 후 실무회담 3) 북-미 정상회담 개최 발표 4) 북-미 정상회담의 일괄타결안을 추인하기 위한 6자회담 당사국 외무장관 및 정상회담 개최 5) 북핵 폐기안에 대한 UN 안보리 결의 및 UN 제안으로 동북아 다자간 집단안보체제 구축

 

'하의상달'(bottom-up) 아닌 '상의하달'(top-down) 방식이 해법

 

그는 "좋든 싫든 북한이 수령체제이며 김정일은 기분파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협상 방식으로 지금까지의 '하의상달'(bottom-up) 방식이 아닌 '상의하달'(top-down) 방식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어디서 많이 들어봄직한 얘기다. 그렇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한과 협상할 때 강조하는 '모개흥정'과 닮은꼴이다. 그러나 그가 정치인 김대중의 비서 출신이고 국민의 정부에서 청와대 정무비서관과 국정상황실장을 지냈음을 기억하면 별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한편으로는 망원경으로 보듯 넓고 멀리 봐야 하고, 또 한편으로 현미경으로 보듯 가깝고 치밀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망원경과 현미경론은 남북관계의 접근방식을 얘기할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자주 쓰는 표현이다. 때로는 현미경을 사용해 미시적으로 관찰하고 때로는 망원경을 사용해 멀리 보면서 사물과 이치의 양면을 함께 보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전쟁과 평화>는 망원경과 현미경을 적절하게 사용해 김정일을 샅샅이 톺고 남북관계를 멀리 내다본 역작으로 꼽을 만하다. 이런 성찰과 조망은 그가, 올브라이트의 표현을 빌리면, '김대중이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족 : 정치인 장성민은 김대중을 넘어설 수 있을까?

 

정치 지도자에게는, 흔히 하는 말로 '고유 브랜드'와 '새로운 무엇'(something new)이 있어야 한다. 김대중은 한반도 평화를 위한 오랜 천착과 실천이 있었기에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했다. 노무현은 오랫동안 지역주의를 거부하고 지역균형 발전전략을 내세웠기에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남북 통일과 한반도 평화 문제에서 김대중을 능가할 현실 정치인은 없는 셈이다. 그러니 '개성동영'을 내건 정동영의 패착은 김대중이 선점한 한반도 평화 이슈를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정치인 장성민은 김대중을 넘어설 수 있을까?


#장성민#전쟁과 평화#김정일#김대중#장성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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