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기진 않지만 이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역사 교과서 파동, 건국절 논란, 친일파 문제 등 민감한 사안을 다루는데 있어 일반 국민들에게 시종일관 호통과 독설로 가르치려는 부류가 등장한 것이다. 어르고 달래도 욕먹을 판에 오히려 당당한 자태를 보이니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당혹스러워 했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부터 꾸준히 세력을 키우다가 현 정권이 들어선 이후 제철 만난 고기마냥 날뛰는 '뉴라이트'를 이르는 말이다. 뉴라이트 세력은 이미 현 정권의 코드에 맞춰가며 자신들의 몸집을 거침없이 불려나가고 있다. 문제가 되더라도 국가 성장에 도움이 된다거나 다수 국민이 동의할 수 있는 사안이라면 무조건 비판하는 게 어려울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렇지도 않다는데 있다.
급하고 독하다. 수면 아래에서 숨죽이던 그들은 호기를 만나 그동안 풀지 못했던 한을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토해내고 있다.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 광복절을 지워버리고 그 자리를 '건국'으로 바꾸며 역사 자체를 바꾸어 놓으려는 시도, 한국 사회를 '승자독식사회'로 구축하려는 가혹한 경제관까지. 내놓는 주장들이 하나같이 황당한 탓에 어이가 없어 차라리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그들은 어디에서 왔고, 실체는 무엇일까. 그들이 바라는 세상은 대체 어떤 곳일까.
'합리적 보수'라 불리는 김기협의 역사에세이 <뉴라이트 비판>은 최근 몇 년 사이 문제가 되어온 극우파 난동을 밀도 있게 분석하며 비판하고 있다.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의 연재분을 모은 것으로 책은 특히 서울대 이영훈 교수와 안병직 중심으로 뭉친 시대정신(구 뉴라이트재단)에 대한 종합안내서 역할을 한다. 시종일관 날렵하면서도 따뜻함을 잃지 않는 문체가 인상적이고, 또한 편향적이지 않은 시각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신뢰감을 더욱 두텁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저자는 먼저 인간을 이기적인 존재로 규정하는 뉴라이트의 인간관을 문제 삼는다. 식민지 시대부터 독재 시대까지 줄곧 강자가 군림하던 한국 사회의 뼈아픈 과거사를 왜곡시키며 끊임없는 경쟁과 생존을 통해 살아남은 이가 승리하고 이들이 성공이자 역사임을 주입하려는 것이다. 노조와 시위, 시민단체 등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 대부분이 절대적인 악이나 적으로 간주됨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모든 것을 꽁꽁 막아놓고서 분노할 수 있도록 유도한 뒤에, 사건이 터지면 그들을 '폭도' 내지는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 폭력단체'로 손쉽게 규정해버린다.
한국의 역사 뿐 아니라 문명 자체를 자본주의 중심으로 재해석하려는 뉴라이트의 시도는 자연스럽게 식민지 시대 옹호와 건국절 논란, 그리고 역사 교과서 파동 등의 문제점을 낳고 있다.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결국 조롱거리에 불과하고, 역사 훼손과 은폐는 성장을 위한 동력으로 이용한다. 뉴라이트에 의해 식민지 시대는 근대화에 도움이 된 감격적인 축복의 시간으로 둔갑해 버렸고, 친일파를 언급하는 일은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되었다. 광복절을 지우개로 지우더니 대신 미국의 이익에 따라 강요된 건국절을 우리나라의 상징으로 치켜세웠다.
이승만의 부정부패와 무능함, 박정희의 폭압과 독재의 역사는 철저히 거세되었으며 혁명은 기껏해야 불만투성이들의 법을 어긴 행동으로 간주되고 있다. 미국조차 무너뜨린 신자유주의 정책은 아직까지도 최고의 신앙으로 여겨진다. 물론 그것이 진정 사회발전과 그들이 내내 외치는 일류 선진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면 아마 지금과 같은 거대한 반발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딱히 그럴 가능성이나 희망이 보이지 않는 데다, 그것도 모자라 심지어 사회 분열까지 일으키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학은 인간성을 경험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진실과 정의는 다름 아닌 사람들의 관계와 사랑 속에서 발전한다. 헌데 모든 가치를 재물에 종속시키는 뉴라이트에는 근본적인 '사람'이 배제되어 있다. 리처드 도킨스가 과학적 논리를 바탕으로 인간 위에 유전자를 올려놓아도 많은 사람이 아직까지 그 사실을 좀처럼 신뢰하지 않는다. 믿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숨 쉬고 흐르는 것은 돈보다는 사람이고 사랑이라는 믿음이 더 강한 탓이다. 아무리 살기 힘들어도, 때때로 이기적인 사건과 쟁점들이 우릴 괴롭히더라도 세포로 조직된 사람이란 존재는 쉽사리 그걸 놓치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보수주의자다. 이런저런 불평을 하기는 해도 우리 사회가 근본적으로 괜찮은 사회라는 생각이 20년래 바뀌지 않는다. 다들 지금까지 살아온 식으로 꾸준히 애쓰며 살아가면 충분히 좋은 사회를 이뤄나갈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나는 혁명적 변화도 기적적 변화도 바라지 않는다. (본문 211쪽)
위에서 알 수 있듯 그가 뉴라이트를 비판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엄청난 변화나 혁명을 위해서가 아니다. 자기 자신과 우리 곁에 머문 사람들, 때로는 밉더라도 기꺼이 보듬어야 마땅한 우리네 이웃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가 생각하는 성장이고 발전이다. 정권과 자본의 비호를 받는 소수만이 살아남고, 대부분의 서민은 아래에 깔리는 성장이란 결국 현 시대의 음울한 현실을 바꿀 수 없는 것이기에. 더군다나 그들이 추구하는 이기적인 인간의 경쟁유도는 결국 신자유주의의 폐막과 더불어 지금과 같은 경제 불황을 가져오지 않았던가. 이래저래 뉴라이트의 주장은 빛 좋은 개살구가 되어버렸다.
뉴라이트는 최근까지 보수언론의 1면에 광고를 내며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왔고, 오늘자 조선일보 1면에도 역시 용산 참사와 관련한 광고문을 실었다.(물론 책에서 다루는 재단과는 다른 ‘뉴라이트전국연합’에서 낸 것이다.) 불법폭력시위, 폭동이란 말이 글의 성격을 짐작케 한다. 희생된 사람들이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는지에 대한 원인과 근본적인 대책 따위는 그들의 머리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오로지 공격적인 폭언과 행동뿐이다. 그러니 맨 마지막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문장이 빈말처럼 들릴 수밖에.
또한 이런 문장도 달렸다. '우리 모두 단합해 지금의 경제위기를 극복합시다!' 단합이라, 내가 말을 잘못 들었나? 눈이 어두워진 탓일까. 뉴라이트의 역사관과 정책에는 뚜렷한 체계가 없다. 단체 자체가 여러 군데로 분산되어 있는 데다, 문제가 생기면 자신들의 의견이 아니라면 책임회피에 급급하다. 쉽게 말해 그들끼리도 뭉치질 못한다.
황당한 데다 기괴하고, 그것도 모자라 근본도 없으니 사람들이 설득당할 리 만무하다. 시종일관 호통과 독설을 내뿜으며 위에서 아랫것 내려다보듯 훈계하느라 정신없는 그들이 대뜸 '단합'이란 단어를 꺼내들었다. 입에서는 나오는 건 헛웃음이고, 가슴에서 피어오르는 건 그럼에도 그들이 정권과 집권여당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앞으로의 4년이 걱정스럽다.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왜곡과 날조가 판칠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