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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교에서 바라본 대대포구의 모습
▲ 순천만 무진교에서 바라본 대대포구의 모습
ⓒ 송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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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한 스케줄 없이 일정에 나를 맡기다

내 자신에 대한 한계를 좀더 시험해보고 싶었다. 그동안 맘만 있고 실천하지 못했던 것(국토대장정-발로 꼭꼭 밟아서 내 몸에 새겨보는 것을 꿈으로 하고 있다)을 실행에 옮겼다. 이번에는 맛보기 정도로 3-4일 정도 실험에 불과하다. 여행 일정을 자세히 짜도 현실에선 달라지기 일쑤인데 딸과 동행하면서 대략의 목적지만 정하고 그냥 흐르는대로 맡겨보기로 했다.

월요일 출발하면서도 강원도 철원에 갔다가 일요일 오후에나 돌아왔다. 집안에 할 일은 쌓였다. 두 남자에게 집을 맡기고 두 여자가 떠난다. 예전 같으면 밑반찬 해놓고 이것저것 챙겨놓고 갔겠지만 이번엔 준비를 해놓지 않고 그냥 떠나기로 했다. 남는 사람이 알아서 해먹겠지.

아들놈 등살에 냉동실 돼지고기와 느타리버섯과 김치좀 넣고 찌개 하나 끓여놓았다. 순천만이 괜찮다는 딸의 말 한 마디에 그쪽으로 정했다. 딸에게는 단단히 다짐을 받아 두었다.

"나가면 각자 알아서 하는 거야. 엄마한테 기대지 말고. 하루에 30Km쯤 걸을 것인데 훈련 안된 네가 괜찮겠니?"
"괜찮아요. 충분히 할 수 있어요. 여름에도 유럽 가서 잘 다녔어요."
믿어보자.

배낭이 무거우면 못걸을 테니 속옷과 양말 몇 장만 넣었다. 전라남도 관광정책과에서 발간한 <남도의 걷기 좋은 길> 한 권과 지도 한장이 다였다. 갈아입을 옷 하나도 안넣었다. '삼 사일 정도에 100여 킬로미터쯤 걸어보리라. 괜찮을까? 힘들면 돌아오지 뭐' 새벽 6시에 두 식구를 남겨 놓고 집을 나섰다. 7시 20분 순천행 버스를 탔다. 4시간 반 걸린다더니 안막혀서 그런지 4시간 만에 닿았다.

따뜻한 남쪽나라 정겨운 순천만은 가슴속을 시원하게 비워주었다

우선 내 나라 내 땅이니 말 통해서 좋고 글 읽을 줄 아니 무엇이 두려우랴. 핫초코 2잔과 샌드위치 하나를 사서 순천만 가는 버스를 탔다. 20여 분 만에 닿았다. 핫초코는 양이 엄청 많아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았다. 인심이 후하기도 하지.

버스에 타는 사람들은 모두 노인 뿐이었다. 꼬부랑 할머니들이 짐을 가지고 탄다. 장날이었는지. 우리가 순천만 가느냐고 묻는 걸 들으셨는지 조금만 가면 된다고 가르쳐주시기까지 했다.

갈대밭 탐방로
▲ 순천만 갈대밭 탐방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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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분 만에 내렸다. 갈대밭이 넓게 펼쳐졌다. 속이 탁 트였다. 서울에선 매우 추웠는데 여긴 따뜻한 남쪽나라다. 맑고 푸른 하늘에 공기는 청정무구였다. 자유롭고 구속받지 않아서 좋다. 순천만 탐방은 4.7㎞에 2시간 30분이 소요된다 하였다. 2008년 6월에 대한민국 갯벌 최초 명승 제41호로 지정됐다고 한다. 입구에 서 있는 순천만 천문대는 지나쳤다.

철새들이 한가로이 갯벌에서 먹이를 찾는 모습
▲ 순천만 철새들이 한가로이 갯벌에서 먹이를 찾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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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의 콘셉트는 '걷기'다. 물론 중간에 있는 볼거리나 유적을 보긴 하겠지만 최소로 줄이고 걸으며, 내 몸으로 느끼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오감을 열어 두기로 했다. 순천시내 이사천과 동천이 만나 순천만 바다로 흘러든다는, 길목 대대포구는 내년 4월까지 주변 환경 정화작업 중이라 음식점은 다 문을 닫았다. 

갈대밭 사이에 난 수로
▲ 순천만 갈대밭 사이에 난 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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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구에서 아치형 무진교를 건너 갈대밭 산책로를 걸었다.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환호성을 질렀다. "와." 넓디 넓게 펼쳐진 갈대밭에 절로 탄성이 나왔다. 21.6㎢나 되는 갯벌에 갈대숲도 5.4㎢나 된다고 한다. 숫자로 하니까 감이 잘 오진 않지만 끝없이 펼쳐진 갈대밭이다. 갈대꽃은 다 날아가고 앙상한 뼈만 남은 빗자루 같지만 그래도 멋있다.

갈대꽃이 다 져버렸지만 남은 갈대꽃만으로도 찾아온 이들에게는 충분히 아름답다
▲ 순천만 갈대꽃이 다 져버렸지만 남은 갈대꽃만으로도 찾아온 이들에게는 충분히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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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데군데 사람들이 걸으며 사진을 찍었다. 느릿느릿 걷는 게 좋다. 쫒기지 않고 서둘러 돌아가지 않아도 되니 마냥 한가롭다. 갯벌엔 장뚱어니 농게니 칠게 등 다양한 생물들이 산다는데 다 숨어 버렸는지 볼 수가 없다. 새들만이 먹이를 찾고 때때로 날개짓을 하며 찾아온 관광객들에게 보답이라도 하듯이 날개짓을 한다.

갯벌에서 먹이를 먹던 새들이 인기척에 놀랐는지 날아가는 모습이 보인다
▲ 순천만 갯벌에서 먹이를 먹던 새들이 인기척에 놀랐는지 날아가는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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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로이 갈대밭을 거닐다 충분히 걷고 즐겼다 싶으면 탐방로 끝나는 곳에 용산등산로가 시작된다. 나무계단을 오르다 보면 5명 정도가 쉴만한 평평한 곳이 나오는데 거기서 보는 순천만은 전망대 가기 전 맛보기로 전경을 보여준다. 탁 트이고 꼬불꼬불한 순천만의 곡선은 보는 이에게 푸근함을 안겨준다.

용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S자만
▲ 순천만 용산 전망대에서 바라본 S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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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분 이상을 오르면 탁 트인 용산전망대가 나타난다. 눈이 시원해 더 부러울 것이 없다. 가슴속까지 시원하고 가슴속에 있는 것들 다 털어내고 맑은 공기를 한껏 들이마신다. 갯벌에 내려가 폭신하고 말랑말랑한 부드러운 갯벌을 발로 디뎌보고 싶다.

책에 소개된 대로 마을쪽으로 내려가면 용주들판을 지나 농주마을이 나온다는데 표시가 잘 안되어 있어 산길을 헤맸다. 이리저리 찔레나무가시에 찔려가면서 없는 길을 만들어가며 목표지역에 도착은 했다. 양어장이 있고 물가에 가까이 다가갔지만 물있는 곳까지 직접 갈 수는 없었다. 철새보호 때문에 막혀 있었다.

산위에서 내려다 본 갈대밭 탐방로
▲ 순천만 산위에서 내려다 본 갈대밭 탐방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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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밭 전경
▲ 순천만 갈대밭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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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로 다시 올라와 노을을 기다렸으나 환상적인 일몰을 보기는 글렀다. 주변엔 구름들도 있었다. 차라리 일정을 조정하는 게 나을 듯 싶었다. 시내까지 걷기로 했다. 사진에서 봤던, 붉게 타는 환상적인 노을의 해넘이를 못본 것이 끝내 아쉬웠다. 시내까지 8Km 정도 된다 하니 걷자. 지방도로인데도 차는 쌩쌩 달렸다. 갓길은 경운기도로여서 폭이 제법 넓긴 했으나 중간에 갓길이 끊긴 곳은 달려오는 차가 무서웠다. 

저녁 식사에 두번 놀라다

1시간 반 가량 걸어서 시내에 도착했다. 몇 년 전 와서 새조개무침을 맛있게 먹었던 '고흥식당'을 물어물어 택시를 타고 찾아갔더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문을 닫았다. 택시기사님이 소개해준 기사식당에 갔더니 백반에 반찬이 20가지가 넘었다. 값은 6000원. 입이 떡 벌어졌다.

식당에서 소개해준 모텔로 갔다. 30000원이라기에 비수기인데 깎아달랬더니 초중고 축구부 학생들이 훈련와서 숙박업소들마다 방이 모두 찼단다. 할 수 없이 다 내고 들어갔더니 생각보다 깔끔하고 시설이 괜찮았다.

딸은 피곤한지 씻지도 않고 잠들었는데 난 왠일인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더워서 이불을 걷어도 깊은 잠을 들 수가 없었다. 20-30분마다 깬 것 같다. 문단속을 몇 번 확인했는지 모른다. 확인하고 또 하고. 그래도 불안했다. 몇 달 전 본 범죄영화 장면도 떠올랐다. 누군가가 문을 따고 들어올 것만 같다. 불을 켜놓자니 아이가 잠을 잘 못잘 것 같고.

오늘 세상을 떠도 아쉬울 것 하나 없다고 큰소리칠 때는 언제고 낯선 곳에서의 하룻밤이 왜 이렇게 불안한지. 당당하게 집 나올 때의 호기는 어디다 저당잡혔는지.

남편한테 이 상황을 얘기했으면 뭐라고 했을까?

"이 사람아, 상대방도 보는 눈이 있을텐데, 걱정이 너무 심한 거 아냐?

순천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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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순천, #갈대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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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성과 감동은 늙지 않는다"라는 말을 신조로 삼으며 오늘도 즐겁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에 주저앉지 않고 새로움이 주는 설레임을 추구하고 무디어지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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