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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연휴가 돌아왔다. 설과 추석은 해마다 상반기와 하반기에 한차례씩 어김없이 찾아오지만, 30대 후반의 노총각인 나에게 그 연휴는 별다른 의미를 던져주지 못한다. 설이 왔다고 해서 특별히 즐거울 것도 귀찮을 것도 없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무척 오래 전부터 익숙해진 일이다. 그 기원을 찾아간다면 아마도 내가 대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학생들이 유난히 많았다. 당시 명절 연휴가 되면 학생회관 앞에는 대형버스들이 죽 늘어선다. 지방으로 귀향하는 학생들을 위해 학생회에서 다소 저렴하게 대절한 버스들이다.

서울에서 태어나서 서울에서만 생활해온 나에게, 그 모습은 다소 생소한 풍경이었다. 학기중에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은, 뭘 그렇게도 많이 챙겼는지 커다란 가방을 메고 지방으로 내려가 버린다. 그러면 나한테 남는 것이라고는 텅빈 교정과 도서관, 차량이 모두 빠져나가서 썰렁해진 서울의 도로 뿐이다.

그때 나는 생뚱맞게도 '명절이 되면 사람들이 고향으로 가는데, 나는 왜 아무데도 갈데가 없을까'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조용필의 명곡 <꿈>의 한 구절처럼, 사람들은 저마다 고향을 찾아가는데 나는 지금 홀로 남아있는 것이다.

남는 것은 또 있었다. 며칠 동안의 긴 시간이다. 어렸을 때는 명절이되면 가족들과 함께 윷놀이니 뭐니 하면서 소란스러운 밤을 보냈지만, 그것도 머리가 굵어진 다음부터는 왠지 꺼리게 되었다. TV에서 하는 특집영화들도 모두 재미없는 것들을 재탕삼탕할 뿐이다.

서울에 사는 여자친구가 있다면 함께 텅빈 시내를 돌아다니며 나름대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겠지만, 주변머리 없는 나에게는 그럴만한 기회도 없었다. 그러니 명절이 되면 아무 것도 할게 없는 처지가 되는 것이다. 그때부터 명절은 나에게 '조금 긴 연휴' 정도의 의미를 갖는 시간이 되었다.

서울에 혼자 남아 무엇을 할까

서울에서 설 연휴 보내기 따끈한 안주에 술 한잔을 마시면서
▲ 서울에서 설 연휴 보내기 따끈한 안주에 술 한잔을 마시면서
ⓒ 김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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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연휴를 몇 차례 보낸 다음부터는 명절 때 지방에 내려가는 친구들이 이상하게 부러워졌다. 그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던진 적도 여러차례 있었다.

"너는 좋겠다. 명절이 되면 집에 내려가니까."

그러면 그 친구는 나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면서 말하는 것이다.

"나랑 바꿀까? 명절 때 집에 내려갔다 올라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힘든 건 나도 안다. 명절이면 TV와 신문에서 온통 고속도로 정체상황을 보도하니까. 수업일정을 맞추기 위해서 내려가는 날짜와 올라오는 시간을 고민하고, 교수님들은 그런 사정을 봐줘서 인심좋게 휴강해주기도 했다. 그러니 나는 명절 때마다 지방학생들의 덕을 조금이나마 본 셈이다.

내 말은 농담반 진담반이었다. 힘들더라도 뭔가 할일이 있다는 것이 좋게 보였던 것이다. 그 다음부터 명절이 되면 서울에 사는 친구들끼리 자연스럽게 모이게 되었다. 어차피 연휴라야 특별한 일도 없고 집에 있으면 답답하니 서울사는 놈들끼리 모여서 술이나 마시자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것도 쉽지 않았다. '할일 없으니 술이나 마시자'라는 말의 의미를 곰곰히 생각하면 괜히 우울해지는 데다가, 설 연휴 때 정상영업하는 술집을 찾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하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 우리들은 학교주변을 뒤져서 문을 연 괜찮은 술집을 찾아냈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주인아주머니에게 넉살좋게 인사하면서 술판을 벌이기 시작했다.

예나 지금이나 술마시며 명절 보내기

그런 전통(?)은 십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당시는 학생이었고 지금은 노총각이라는 점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왜 결혼 안하냐?'라고 십자포화를 퍼부을 친지들 모임도 없고, 또 다행인지 불행인지 세뱃돈 달라고 넙죽 엎드릴 나이어린 조카도 한 명 없다.

게다가 우리집은 암묵적으로 오래 전부터 신정을 쇠는 것을 원칙으로 해왔다. 부모님께 드리는 새해인사도 떡국을 먹는 것도 모두 신정 때 해버리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니 며칠간의 설 연휴는 온전한 나만의 시간인 셈이다.

이런 시간들을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까. 경기가 좋을 때는 명절 대목을 노린 전세기를 타고 외국으로 날아가서 며칠간의 짧은 여행을 했던 적도 있다. 요즘같은 불황에는 그것도 쉽지가 않다. 도서관을 찾아서 조용히 책을 읽을 수도 있겠지만, 설에는 그곳도 문을 닫는다. 어렸을 때부터 TV를 싫어했기 때문에 브라운관 앞에 앉아있는 것도 못할 짓이다. 결국 한바퀴 빙 돌아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셈이다. 술집으로.

이번 연휴에도 서울에 남아있는 친구들과 함께 술자리를 하게 될 것이다. 설이 지나면 한살 더 먹었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겠지만 그래도 아직은 30대라는 것에 약간의 위안을 가진다. 꽉찬 나이로 따지자면 30대 중반이라고 우길 수도 있겠다.

설에 술자리를 갖는 것이 세월이 흘렀다는 것을 잊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친구들과 한잔 두잔 술을 권하며 이번 설 연휴를 보낸다. 한잔은 나를 위해. 또 한잔은 친구를 위해. 다른 한잔은 아직도 새털같이 많이 남았다고 믿는 시간을 위해.


#설 연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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