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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11일, ‘따리’(大里)에서 첫 아침을 맞았다

 

 

서늘한 아침 바람이 밤새 드리웠던 구름을 걷어내고, 숨겨 두었던 창산을 내보인다.

대리국의 도읍이었던 ‘따리’하면 으레 따라붙는 것이 창산과 얼하이(蒼山洱海)이다. 그 가운데 하나인 창산을 게스트하우스 옥상에서 기지개를 펴다 홀연히 만났다. 어제까지만 해도 날이 흐려 앞산에 걸린 구름 너머로 거대한 산이 있는지를 비로소 알게 된다. 창산(蒼山)은 3500m급 이상의 봉우리를 무려 19개나 거느린 거대한 산줄기이다. 해발 4122m의 산정에 흰눈을 얹은 채 '따리'의 서쪽으로 길게 드러누워 끊임없이 설산에서 녹은 물을 얼하이로 흘려보내고 있다.

 

 

원래 따리에 머무는 동안 창산에 오를 계획이었지만, 케이블 카로 오른다는 말에 흥미를 잃은 일행들이 남조풍정도(南詔風情島)를 선택하는 바람에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하게 되었다. 얼하이 호수가 따리의 땅을 적셔주는 젖줄 같은 어머니라면, 창산은 따리를 굽어보는 아버지 같은 산이다. 비록 게스트 하우스 옥상에서 바라보는 창산이지만, 구름을 목에 두르고 있는 모습은 장대하기만 하다.

 

오늘은 석보산의 석종사라는 도교 사찰을 찾아보기로 했다.

따리에서 서너 시간 거리에 있는 검천현(劍川縣) 석보산은 빈천현(賓川縣) 계족산 경구와 더불어 따리 대풍경구의 한 곳이다. 석보산 석종사는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지방문화재에 해당하는 관보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가는 도중에 노천 시장에서 잠시 차를 세웠다. 시장은 여행자의 걸음을 멈추게 하는 낙천적인 공간이다. 끊임없이 울려대는 경적 소리와, 손님을 부르는 호객 소리, 오랜만에 만난 이웃의 손을 잡고 나누는 담소와 왁자지껄한 흥정 소리가 뒤범벅이 되어 한바탕 흥겨운 축제의 장을 펼친다.

 

배를 가른 채 좌판에 널려 있는 돼지와, 자박지에서 풍덩거리는 잉어와 붕어들 틈에서 묘한 것을 발견했다. 작은 손수레에는 고춧가루로 버무린 김치 같은 것이 눈에 띤다. 자세히 보니, 닭발과 무를 고추 양념으로 버무린 김치이다. 맛은 어떨까 참 궁금하다.

 

 

이곳을 지나 조금 더 지나자 차가 비켜가기 어려운 골목에 또 다른 장이 섰다. 앞서의 노천시장에 비해 훨씬 번잡하다. 거리에 즐비하니 선 가게를 사이에 두고 다채로운 복장을 한 사람들이 분주히 오간다. 머리에 화려한 빛깔의 모자를 얹은 여인들이 지나간다. 모쑤족(摩梭人)이라고 한다. 나시족의 한 지파인 모쑤족은 모계사회의 전통을 아직도 지니고 살아가는데, 모쑤족은 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가정에서 자신의 아버지는 모른 채 살아간단다. 얼핏 알긴 하지만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마음에 드는 남자를 선택하여 아이를 낳게 되어 마음에 들면 ‘작은 아버지’라는 명목으로 함께 살아가지만, 대개는 닭 한 마리를 손에 쥐어 주고 내보낸다고 한다. 대체로 잘 생기고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이 선택받게 되는데, 이 때문에 최근에는 외지 사람들이 모쑤족 남자들을 유혹하는 일이 잦아 외부인의 출입을 꺼린다고 한다. 모쑤족은 하나의 부족으로 불리는 대신, 모수민족, 모수국으로 불리기를 원한다니 자존심 강한 여인국의 기개를 엿볼 수 있다.

 

바위 종이 운다는 석보산 석종사에 들러

 

 

13시 15분쯤, 예정지인 석보산(石寶山)에 도착했다. 따리시에서 140km 거리이다. 매표소에서 입장료 30위안을 내고 구불거리며 오르는 산길을 7km쯤 더 들어가자 넓직한 주차장이 나온다. 세계적인 경제 위기 탓인지 가는 데마다 한산하기만 하다. 누군가 정성 들여 깔아 놓은 계단을 따라 얼마쯤 산그늘 속을 파고드니 석종사(石鐘寺)가 나타난다. 이리저리 몸을 비틀고 선 소나무들과, 거북이 등껍질 문양을 한 바위들이 신기하다.

 

남조와 대리국 때, 거대한 바위를 파내어 안으로 새겨 앉힌 불상들이 8호 석굴까지 이어지는데 마지막 석굴에는 여성 생식기 모양의 조각상이 놓여 있다. 그곳에 손을 대고 참배하면 다산을 하게 된다는 모계사회 문화의 흔적을 짐작하게 하였다.

 

이곳의 석굴들은 일체 카메라 촬영이 금지되어 있는데, 곳곳에 감시카메라가 장치되어 있어 카메라를 들이대는 시늉만 해도 득달같이 관리인이 좇아 올라왔다. 어디선가는 몰래 사진을 찍다가 1000위안의 벌금을 문 일도 있다는 말에 모두 기겁을 하여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2km 정도 더 가면 비공개인 석굴 5개가 있는데 관리인에게 부탁을 해도 관람할 수가 없었다.

 

 

석굴 바로 밑에 자리 잡은 거대한 종 모양의 바위가 있는데, 바위 전체가 거북의 등껍질 모양의 문양으로 뒤덮여 신비감을 더해 주었다. 석종 모양의 바위를 두드리면 종소리가 난다는 소리에 모두들 달려 내려가 바위를 무엇으로 두드려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큼지막한 돌멩이를 찾는 사람, 누군가의 몸이나 머리를 박아야 정성이 들어가야 한다는 사람의 이견으로 왁자지껄하였다. 알고 보니, 그런 전설이 있었다는 이야기였다는 바람에 김이 빠졌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거북 등껍질 같은 바위 위에 누군가 새겨 놓은 ‘李’자라는 한자가 버쩍 눈에 들어온다. 내심 중국에도 ‘李’씨가 있으니 제 발 저릴 필요까지는 없다고 자위해 보지만, 왠지 뒷머리가 땡기는 느낌은 무엇 때문일까. 어쨌든 종 모양의 바위에서 유래한 석종사는 불교와 도교가 혼합된 사찰로 이 절이 깃들어 있는 석보산은 바이족에게 신성한 산으로 섬겨지고 있다고 한다.

 

대리국의 오래된 사찰의 형식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이었지만, 오가는 데 여섯 시간이 좋이 걸리는 거리를 감안하면 일정에 쫓기는 여행자라면 그곳만을 보기 위해 하루를 내어 놓기가 쉽지 않을 곳이었다. 굳이 가자면, 돌아오는 길에 파장이 되어 기회를 놓친 시장을 미리 들러 가는 일정을 포함하면 좋을 듯했다.

 

따리 고성의 야경

 

 

저녁 식사를 마친 후, 고성 지역을 둘러 보게 되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따리’의 고성(古城)지역은 화려한 조명으로 치장한 성문을 통해 들어서게 된다. 성문 앞에는 백족의 옷을 차려 입은 백족 소녀들이 화장을 짙게 한 채, 관광객을 상대로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돈을 받기 위해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그보다 더한 매춘도 중국내에서 공공연히 이뤄진다는 말을 들었지만, 한때 이 성읍의 주인으로 군림하던 대리국의 딸들이 기념사진을 위해 얼굴을 빌려주는 일이 왠지 마음을 무겁게 했다.

 

 

대체로 사방가로 불리는 중심가를 축으로 바둑판 형태로 짜여 진 성읍 안의 거리는 대리석의 산지답게 매끈한 돌로 깔려 있었다. 성문 위로 올라가면 조금 조망이 좋겠지만, 올라가는 데에도 돈을 내야 한다는 말에 그냥 걷기로 했다. 화려한 등으로 치장한 상가들이 빼곡히 들어서서 관광객들의 눈을 홀리고 있는데, 주로 남염(藍染)천이나 바이족(백족) 고유의상, 보이차, 피혁제품과 목공예품 등이 눈에 띠었다. 뒷골목에는 좌판을 놓고, 말 그대로 ‘중국제’ 물건들을 팔고 있었다. 우리 시장 모퉁이마다 자리 잡고 있는 ‘천 냥 백화점’이나 ‘땡 물건’ 파는 가게에서 만나던 온갖 잡동사니들이 거기 모여 있었다.

 

숙소에 돌아와 누워 있자니, 나이 어린 청년이 밤늦게 들어온다. 그는 제 침대 옆에 꽂힌 콘센트를 들여다보더니 무어라 투덜거렸다. 아마 윗 침대에서 묵는 프랑스 여행객이 그의 전기 콘센트에 무얼 꽂아놓았나 보다. 대뜸 유창한 중국어로 무어라 항의를 하는 듯하던 청년은 말이 통하지 않자, 곧바로 영어로 쏘아댄다. 프랑스 여행객도 무어라 빠른 말로 항변을 하는 듯했다. 유창한 중국말을 하기에 중국인으로 여겼던 청년이 귀에 익은 말로 한마디 투덜거렸다.

 

“참, 당황스러운 영혼일세.”

 

이 말이 한동안 여행 기간 내내 일행들 입에 오르내리며 유행어가 되고 말았다. 당황스러운 영혼을 만나는 것도 여행의 묘미가 아니겠는가.


태그:#따리, #고성, #석보산, #석종사, #운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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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면 광대울에서, 텃밭을 일구며 틈이 나면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http://sigo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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