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재미로 동화를 읽나? 궁상맞게”“글쎄?”“아서라, 세상을 살만큼 산 사람이 칠칠맞게 동화가 뭐냐?”“그렇게 보여? 책을 읽는데 나잇살을 따질 필요가 있을까. 내 개인적인 취향이겠지만 책은 그저 재미있고, 공감할 거리가 있으며, 감동이 있으면 돼. 또 연령층에 상관없이 읽을 수 있는 동화도 많잖아.”“글-쎄-다.”걸맞잖게 동화책을 읽는 내게 해대는 지청구다. 나는 어딜 가든지 책 한 권은 들고 다닌다(거의 동화책을 갖고 다닌다). 언제 어느 때 필요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은행창구에서 대기 순번이 밀렸거나 차량행렬이 길게 늘어져 있을 때는 30분, 그밖에도 공항 대합실이나 병원을 찾았는데 꼬박 1시간 이상을 허비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럴 때 그냥 무료하게 기다리는 것보다 책을 펼쳐들면 시간이 후딱 지나친다.
나만의 독서비법, 자투리 시간에 책읽기나는 이렇게 기회만 있으면 자투리 시간에 책을 읽는다. 그게 나의 책읽기 비법이다. 특히 조명이 밝고 분위기도 아늑한 장소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눅진하게 책을 훑는다. 1월 28일, 어제는 남찬숙의 장편동화 <니가 어때서 그카노?>를 읽었다. 동화지만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가 정답게 배어나는 책이다.
이야기는 일상적으로 전개된다. 송연이가 살고 있는 동네는 안동에서도 한참 들어가는 시골이다. 자그마한 마을이다. 그래서 같이 놀 또래들도 별로 없다. 3학년 때까지 다니던 학교가 폐교되면서 면에 있는 학교까지 통학을 한다. 송연이집은 아직도 재래식 화장실을 쓰고 있다. 속도가 느려 컴퓨터 게임도 실컷 못 한다. 요즘도 이런 집이 있을까 하는 그런 시골집이다.
송연이는 엄마 아빠와 언니, 그리고 할머니와 살고 있다. 그런데 할머니는 손녀들보다 외손자인 기철이만 예뻐하신다(물론 이것이 이야기를 전개하는 핵심내용이다).
딸내미만 둔 집안에서 할머니한테는 외손자일망정 유별나게 기철이만 예쁘다. 그래서 조그만 것 하나도 더 챙겨준다. 그게 송연이 눈에 들어온다. 샘이 난다. 하지만 이미 할머니 눈에 든 손자를 어떻게 할 수 없다.
이 책에서 어른들이 하는 말을 전달하는 메신저가 송연이다. 살짝 엿듣고 돌아가는 사정을 눈치 빠르게 파악한다. 때문에 이야기 전개는 급변한다. 그러나 공부에는 별 흥미가 없다. 그래서 날마다 나머지 공부를 밥 먹듯이 하고 있다. 그렇다고 주눅이 들거나 기죽는 일은 좀체 없다. 또한 각기 다른 색깔로 표현되는 다섯 아이들(송연이, 서연이, 기철이, 경순이, 정식이)의 인물창조도 돋보인다.
우선, 송연이의 모습은 건강하고 활달하다. 시골에 살지만 도시 아이들을 부러워하지 않는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에게 기죽지도 않는다. 가난하고 못 배운 부모님이 창피하지도 않다. 더구나 최고의 학벌을 자랑하며 잘살았던 큰아버지도 부럽지 않다. 공부 잘하는 사촌 기철이가 대단해 보이지도 않는다. 그렇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뭐가 되긴 될 거라고 생각하는 자신감 있는 아이다.
“할매, 엄마 아프다.”“와? 어데 아프다 카도?”“말도 않고 기양 누버 있다.”“아침나절에도 멀쩡하다가 갑작시리 아프기는 어데가 아프다고 그카노?”“그라모 니가 퍼득 상 차리라. 기철아 배고프다.”“뭐 하노? 퍼떡 상 안 차리나?”“그래 기철이가 걱정되모 할매가 차려 줘라.”“이 가시나, 밥 차리라 카이 어데 가노.” _위의 책 26쪽(송연이와 할매의 대화 글만 따옴)이쯤이면 아무리 열 두엇 살 가시나라도 속된 말로 머리 뚜껑이 열린다. 송연이는 그만 부아가 난다. 엄마가 아프다는데도 할머니는 어쩜 그렇게 기철이 걱정만 할까? 할머니에게는 정말 큰집 식구들만 소중한 걸까? 울 엄마나 아빠, 그리고 우리들은 할머니에게 아무것도 아닌 걸까? 어린 송연이 머리에는 어쭙잖은 생각들이 꼬리를 문다. 역시 아이는 아이답다는 대목이다.
‘우리 집에서 할머니에게 대드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그래서 엄마 아빠에게 여러 번 혼이 나기도 했다. 내가 보기에 너무한 건 너무한 거다. 할머니 잔소리는 다 참을 수 있지만, 우리랑 큰집 식구를 차별하는 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그러나 작중 인물 중 송연이 언니 서연이는 송연이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서연이는 오직 공부에만 욕심이 많다. 그런 까닭에 시골 중학교에서 내내 일등만 한다. 하지만 사촌 기철이네가 망해서 그 빚을 갚느라 안동 유학이 좌절이 된다. 그런데도 서연이는 이에 굴하지 않는다.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서는 가출이라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불사한다.
“그래. 니도 알제? 할매가 울 엄마 얼마나 구박했노? 딸만 낳았다고……. 큰엄마 하나도 잘하는 거 하나 없어도 기철이 가 낳았다고, 아들 하나 낳았다고 얼마나 떠받들었노? 흥! 그러더니 지금 이게 뭐꼬? 어쨌든 간에 난 기철이 가보다 훨씬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가가 떵떵거리며 살 거다. 그래서 불쌍한 울 엄마 아부지한테 잘할 거다. 그라모 할매도 아무 소리 못할 거다.” _위의 책 65쪽. 결국 서연이는 자기 뜻대로 안동으로 공부하러 간다. 그리고 부모 몰래 학원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까지 한다. 서연이에게는 어떠한 목표가 하나 정해지면 그것만 보고 돌진하는 억척스러운 고집이 있다. 그래도 서연이가 밉지 않다. 훗날 성공하여 부모님 호강시켜 드리고 싶은 욕심이 순순하기 때문이다.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가 정답게 배어나는 책송연이네 집에 파란을 일으킨 인물은 바로 사촌 기철이다. ‘서울 부잣집’으로 통했던 큰아버지 사업이 망하자 기철이는 불시에 송연이 집으로 오게 된다. 기철이는 재래식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가는 서울내기다. 그에게 시골이란 컴퓨터 게임도 마음껏 못 하고, 군데군데 편집된 영화를 텔레비전으로 봐야 하는 시시한 곳일 뿐이다. 기철이에게는 시골생활이 따분하고 지겹다.
“알았어. 실은…… 난 선생님이 되고 싶어.”“선생님?”“내가 선생님이 된다니까 이상해?”“아이다. 좀 뜻밖이기는 해도 이상하지는 않다.”“작년에 우리 담임선생님이 참 좋은 분이었는데, 이상하게 그 선생님을 보고 나서 나도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전까지는 엄마가 말하는 대로 당연히 의사나 판사 검사, 뭐 그런 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 내가 무언가 되고 싶다고 느낀 건 나도 처음이야.”“그라모 니 큰엄마한테도 말했나?”“아니, 엄마는 펄쩍 뛸 거야. 선생님 되는 건 시시하다고 할 게 뻔해.”“시시하기는 뭐가 시시하노?”“엄마는 우리처럼 생각 안 해.”“그건 큰엄마 생각이 잘못된 거다.”“엄마 같은 어른들이 얼마나 많은데. 참, 나 여기 와서 생각이 좀 달라졌어.” _ 위의 책 156-157 쪽(대화 글만 따옴) 하지만 시골 학교로 전학한 뒤 기철이는 조금씩 변해간다. 학교에서 어느 누구와도 친하지 못하고 섬처럼 외롭게 지내던 기철이는 친구들과 한바탕 뒤엉켜 싸우고 나서 친해진다. 이후 기철이는 엄마가 아빠와 이혼하고 미국에 들어가는데 같이 가자고 해도 그 제안을 거절한다. 더 이상 주위의 의사결정에 끌려 다니지 않고 자기 의지와 소신을 정확하게 편다. 시골에서의 기철이는 이미 예전의 기철이가 아니다. 그리고 엄마가 바라는 의사, 판사, 검사보다 시골 학교 선생님이 되는 꿈을 꾼다.
경순이는 송연이와 함께 나머지 공부를 하는 단짝이다. 인터넷으로 즐거움을 찾는 평범하고 순박하다. 경순이는 늘 자기 자신감이 부족하여 속상한 아이다. 기철이에게 잘 보이려고 공부하고, 서울 친구들이 식당에서 일하는 엄마 아빠를 볼까 두려워하는 자기 자신이 싫다.
송연이와 함께 끝까지 시골을 지키자고 다짐하지만 가족이 모두 서울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게 된다. 서울 간 경순이로부터 장문의 편지가 부쳐온다. 서울 생활이 쓸쓸하고 고향이 그립다고. 그래도 경순이는 고향에서의 삶을 아름답게 기억하고 있다.
한편, 정식이는 늘 반장을 도맡아할 정도로 영특하며 책임감이 강하다. 하지만 술주정뱅이 아버지 때문에 집안은 바람 잘 날이 없다. 술만 마시면 엄마를 때리고 물건을 부수는 아버지를 둔 덕에 가끔 송연이네로 피신을 온다. 그래도 정식이는 자기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운동장 열 바퀴를 도는 벌을 받았을 때도 못 달리는 기철이를 위해 자기 몫을 다 뛰고도 함께 뛰어주는 의리를 발휘할 줄 안다.
“저는 이 아이들이 참 좋아요.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얼굴이 예쁘든 못생겼든, 집이 부자든 가난하든, 지금 꿈이 있든 없든, 있는 모습 그대로 참 좋습니다. 어쩌면 이 책에 나오는 아이들 말이 사투리라 친구들에게 낯설지도 몰라요. 저는 처음에는 그랬어요.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를 때가 많았답니다. 그런데 이 책을 다 쓰고 나서는 아이들 말도 참 정겹게 들렸어요. 이 책을 읽는 친구들도 저처럼 이 아이들을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_ 글쓴이의 말 중에서 저자는 실제 안동에 살면서 시골 아이들의 꿈과 희망, 좌절, 외로움 등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작가 특유의 편안하고 막힘없는 문체로 이야기는 술술 읽힌다. 세게 내지르듯 하지만 기실 정이 뚝뚝 묻어나는 경상도, 안동사투리는 송연이와 각자 다른 색깔로 표현되는 다섯 아이들의 이야기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공부를 잘 하든 못 하든, 집이 부자이든 아니든, 꿈이 있든 없든 이 아이들의 모습 그 자체만으로도 순수하고 아름답다.
각자 다른 색깔로 표현되는 다섯 아이들의 이야기그러나 이 책 <니가 어때서 그카노>의 씨줄과 날줄을 이루는 송연이의 엄마아빠를 따뜻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들은 못 배우고 가난하다. 그렇지만 자식을 위해서는 제 몸 아끼지 않고 뒷바라지를 다 한다. 피땀으로 모은 돈을 날려도 크게 실망하지 않는다. 많이 배운 형에 대한 이해도 너그럽고 살갑다. 그러고도 정성껏 할머니 모시고, 조카를 자기 자식처럼 아껴주는 그런 사람들이다. 인간의 도리를 다하며 성실하다. 그게 저자가 이 책을 읽는 아이들에게 바라는 희망 메시지다. 정겹다.
무슨 재미로 동화를 읽나? 아이들의 꿈과 희망, 삶의 결이 오롯이 살아있는 동화를 만난다는 것은 그 자체가 행복이다. 당연한 얘기 같지만 똑같은 동화라도 읽는 사람에 따라 그 감동이 달라지는 게 아닐까?
도서명 : 니가 어때서 그카노지은이 : 남찬숙출판사 : 사계절책가격 : 7800원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다음 미디어 블로거뉴스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