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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일(12.30) 공항에서 떠남과 만남을 준비한다

 

기나긴 여정에 대한 두려움과 떨림이 나의 의식을 정지시켜 '지금, 이곳'에 붙잡아 놓는다. 무거운 문명의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서며, 숨죽여 불어오는 검은빛 바람에 '떠남'을 마주하였다. 외롭다. 그리고 춥다. 

 

지난 3개월여 동안 이 시간을 위해 얼마나 두려워하고 초조해하며 설레었던가?

 

네팔 그리고 히말라야! 많은 사람들이 '왜 가느냐'고 물었다.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기껏 나오는 말이 '모르겠다'였다. 정말 무엇을 얻고자 가는 것인지, 무엇을 버리고자 가는 것인지 머리 속에 그려지는 대답이 없었다. 어떤 이는 나에게 용기와 열정을 말했고, 무책임과 도피를 말했다. 나에게 던져지는 반복되는 질문에 차가운 이성은 그 이유를 찾아내려 애쓰건만 내 꿈틀거리는 감성은 그 이성에 얽매이기를 거부한다. 이번 여행은 이성으로 깨닫는 것이 아니라 감성으로 느끼는 여행이고 싶다.

 

'가고 싶다.' '만나고 싶다.'  그곳이 있어 그곳에 가고 싶고, 나를 만나고 우주를 만나 이야기하고 싶다.

 

'그래,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 오자. 무슨 원대하고 고귀한 의미와 실체를 찾으려고도, 또한 세상에 내세우려고도 하지 말고 그곳에 가만히 서서 바라보자! 아무 색깔도 씌우지 말고 투명하게 말이다.'

 

 

떠나기 며칠 전부터 유독 아내와 사소한 다툼이 많았다. 난 아내에게 '이별의 아픔을 덜기 위해 일부러 정(情)을 떼려는 것'이라고 그 다툼을 정당화하였다. 나를 지탱하는 사람들, 그리고 환경들. 언제부터인가 내가 부여한 삶의 동기보다 타자(他者)들이 내 삶의 동기를 가득 채웠다. 그 속에서 나는 종종 날 잃어버리곤 한다. 내가 없다. 교사인, 아들인, 남편인, 아빠인 '나'는 있었지만 윤인철이라는 '나'는 없었다. 나의 부재(不在)를 느낄 때 자유를 꿈꾸기 시작한다. 잃어버린 나와 삶을 찾기 위해 타는 목마름으로, 배고픔으로, 치열함으로 '날' 밀어 넣고 싶다.

 

이번 여행의 의미를 올더스 헉슬리의 말을 빌려 표현하고 싶다.

 

'쇠사슬에 묶여 바르게 사는 것보다 자유스런 상태에서 비틀거리는 편이 더 낫다.'

 

중간 경유지인 홍콩행 비행기의 출발 시간이 9시 20분이기 때문에 3시간 전까지는 공항에 도착해 수속을 밟아야 한다고 항공사 직원이 시간을 독촉하였다. 마음 편하게 떠나기 전날 서울에 올라와 보낼까도 생각했지만 떠남의 두근거림을 여관 등에서 품는 것이 영 출발의 맛과 미(美)를 흐려놓을 것만 같았다. 다행히 새벽 2시 20분 서울행 무궁화 열차가 운행하였다. 이런 새벽에 장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교통수단이 있다는 것에 편리함을 느끼면서도 '세상이 이제는 우리로부터 새벽까지 뺏어가는구나'라는 찜찜함을 지울 수 없었다.

 

동행하는 대학 후배는 천안에서 만났다. 후배와 함께 가는 것을 나보다 아내가 더 감사히 여겼으니, '애 같은 남편을 먼 타지에 홀로 보내는 것이 못내 걱정스럽다'며 걱정하던 그녀였다. 서울역에 내려 공항 리무진으로 갈아타고 인천 공항으로 갔다. 내 삶에 존재의 의미를 부여한 시간과 공간을 넘어 새로운 시공(時空)으로 떠난다는 것이 물리적인 것뿐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큰 용기가 필요함을 생각한다. 건강한 여행이 되기를 기도한다. 잘 먹고 잘 싸서 다시 내 아내의 향기에 취해 잠이 들고, 20개월 된 아들의 몸에서 풍기는 분유 냄새에 취해야 한다.

 

아빠 : 비행기 타고 멀리 가서 지민이 까까 사 가지고 올께. 아빠 어디 가는 줄 아니?

아들 : (한 손을 머리 위로 올려 비행기 모양을 만들며) 횡, 배팔!  

 

프랑스에는 유명한 개구리 요리(Grenuille)가 있다. 손님이 보는 앞에서 직접 살아 있는 개구리를 넣어 만드는 요리이다. 팔팔 끓는 물에 개구리를 산채로 집어넣으면 곧바로 뛰쳐나오기 때문에, 개구리가 좋아하는 미지근한 물을 준비해 개구리를 넣는다. 따뜻한 물에 들어간 개구리는 몸을 감싸 안는 온기에 기분이 좋아져 팔다리를 쭉 뻗은 채 온천욕을 즐기게 된다. 하지만 개구리가 편안함에 젖어 있을 때, 서서히 물은 가열되며 죽음의 온도로 뜨거워진다. 결국 개구리는 그 사실도 모른 채 편안히 잠에 취해 삶아진다. 그리곤 죽는다.

 

미지근한 물 위에 뜬 채 서서히 죽어가는 개구리의 얼굴이 나의 얼굴과 교차된다. 직장에, 가족에, 별 탈 없는 현실의 안락에 젖어 진정한 ‘나와 삶’을 포기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뒤돌아 본다. 축 쳐진 어깨로 반복되는 삶의 그림자를 밟으며 하루하루 죽어가는 나 자신에게서 살고자하는 어떤 생명력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무책임하게 생명을 내팽개쳐도 되는가? 그런 면죄부를 누가 너에게 부여했는가? 네 삶을 책임져라. 생명의 이유를 증명해라. 아프면 아프다고 해라. 뜨거우면 뜨겁다고 해라. 나를 죽이는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나’ 자신이다. 살고 싶으냐? 나를 살리는 것도 ‘나’ 자신이다. 삶과 죽음은 나와 함께 있다.

 

‘아들아, 아빠는 서서히 죽어가는 개구리가 되고 싶지 않구나! 살고 싶다. 그래서 떠난다. 살아서 돌아오마.’

 

*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라 그곳에서 느끼고 고민했던 내용과 관련된 동서양 사상가의 사상을 빌려와 철학적 채색을 하였습니다.(공자에서 샤르트르까지)


태그:#네팔, #히말라야, #철학, #도덕, #에베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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