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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원미동사람들’의 작가 양귀자 선생은 소설을 통해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 저마다 가슴속에 생채기를 안고 있는 사람들의 애환을 섬세한 손길로 복원시켜 놓았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그렇게 지지리도 못난 삶을 살면서도, 숱한 절망과 아픔을 겪으면서도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놓지 않는다.

 

강 노인은 기름진 농토를 지키려는 의지를, 행복사진관 엄씨는 자신만의 예술혼을, 그리고 임씨는 자신의 양심을 끝끝내 놓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이 겪는 좌절은 더욱 슬프지만 반대로 ‘돈’과 ‘무한경쟁’이 지배 이데올로기가 된 지금 그들이 지키려했던 가치는 이 시대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우리사회 곳곳에는 ‘원미동사람들’이 있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다 어느새 놓아버린 ‘마음속 올곧은 가치’들을 여전히 보석처럼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항상 우리 곁에 있기 마련이다.

 

 

18번 종점과 십정동 사람들

 

18번 종점이 있는 십정동 사람들 또한 원미동 사람들처럼 그랬으리라. 18번 종점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과 더불어 길이 뚫리기 전 십정동을 유일하게 이어주던 버스가 18번이다. 이제 옛날 사진 속에서만 확인할 수 있지만 십정동 사람들에게 18번 종점은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18번 종점이 있던 자리에는 큰길이 나있고, 큰 교회가 들어섰다. 18번 종점은 십정동 주민들이 일터로 나가는 출발점이고, 집으로 돌아오는 종착점이었다. 인천에 수출5ㆍ6공단이 들어서면서 그곳으로 일을 나갔던 십정동사람들에게 18번 종점은 잊히지 않는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이제 그나마 남아있는 삶의 흔적도 이제는 주거환경개선사업으로 사라진다.

 

십정2주거환경개선사업지구는 지금도 철거민촌으로 불린다. 대부분이 도화동에 인천대학교(당시 선인재단, 1979년 개교)가 들어서면서 그 일대에서 밀려난 사람들과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진 달동네다. 18번 종점은 그 달동네의 애환을 고스란히 간직한 길목이었다.

 

 

달동네 어귀를 지키던 정육점

 

그 18번 종점에서 정육점을 시작한 나종백(63)ㆍ김부자(60) 부부는 지금도 십정동을 지키고 있다. 그들이 30년 넘게 서민들의 식탁을 달랬던 정육점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나씨는 “78년에 아내가 먼저 18번 종점에 정육점을 겸한 식당(형제정육점)을 냈어. 식탁 4개에 의자 몇 개 가져다 놓고 장사를 시작했는데 그 때는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라 아침부터 가게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많았고, 저녁 퇴근시간이면 공단에서 일마치고 돌아온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곤 했다”고 당시를 전했다.

 

그는 또 “인천에 내려오기 전 한국일보사 편집부에서 조판 일을 하던 때라 서울에서 월세 살고 있었는데 처가식구들이 그 돈에 돈을 조금만 얹으면 인천에서 집을 살수 있다고 해서 맘먹고 내려왔지. 12평짜리 집이었는데 그때 80만원에 샀어. 그리고 달동네는 쫓겨나온 사람들이 자기 구역표시로 말뚝을 박은 뒤 거기다 집을 짓기 시작해 마을이 됐고, 나중에 불하를 받아 지금처럼 된 것”이라며 “난 2년 동안 동암역에서 종로2가로 출퇴근했는데 그때 아침에 동암역에서 전철 타는 사람들이 3~4명에 불과했어. 지금처럼 길이 없을 때라 18번 버스가 주안이나 석바위로 나가는 유일한 수단이었다”고 말했다.

 

‘나하나정육점’은 십정동에서 가장 오래된 정육점이다. 부평과 동암역, 석바위를 잇는 큰길이 뚫리기 전 십정동사람들은 18번 버스를 이용했고, 걸어서 재를 넘어 현재 백운역을 지나 부평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 길목에 있었던 ‘나하나정육점’은 82년 언덕을 밀어 큰길이 개통되고 18번 종점이 사라지면서 현재 자리로 옮겼다. 십정녹지는 그때 만들어진 공원이다.

 

나씨의 부인 김씨는 “지금은 없지만 우리말고도 구 시장(십정동사람들은 현 십정1동과 2동 경계에 걸쳐 있는 십정시장을 ‘새 시장’, 달동네 있었던 시장을 ‘구 시장’이라고 부른다) 안에 정육점이 두개 있었거든. 그때는 구 시장이 무지 큰 시장이었다”며 “사람들로 북적북적 거리고 활기찬 곳이었어. 아이들은 눈 오면 그 언덕에서 눈썰매를 타며 즐거워했다”고 전했다.

 

돼지고기 한 근에 1500원 하던 시절이다. 지금은 목살이다 삼겹살이다 해서 부위별로 판매 하지만 당시엔 주인장이 주는 대로 쥐어가던 때였다. 김씨는 “그땐 뒷다리가 제일 인기 많았었거든. 삼겹살, 목살 이런 건 없었어. 많이 주면 좋아했고, 신문지에 돌돌 말아서 싸주면 기분 좋게 가게 문을 나서는 사람들로 행복했던 시절이었다”며 “고생도 많이 했고 바깥양반이랑 다툼도 많았어. 저 양반 성품이 원체 싫은 소리 못하는 사람이라 외상이랍시고 자선사업도 많이 하면서 장사를 했는데, 난 그렇지 못해서 외상 대신 손님들 주머니사정 봐가며 그보다 더 많은 양의 고기를 한 움큼 더 얹어주는 것으로 손님들을 달랬다”고 말했다.

 

30년을 고집해 온 삶의 가치

 

나하나정육점이 얼마나 더 우리 곁에 있을지는 모른다. 나씨는 이미 주거환경개선사업이 본격화되면 가게를 접기로 했다. 정육점을 다른 곳으로 옮길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힘든 일이라 쉽사리 엄두가 안 난다고 한다.

 

정확히 언제 문 닫을지 모르는 삶이지만 나씨는 지금도 새벽에 일어나 가게 문을 열고 밤늦게 문을 닫는다. 나하나정육점의 30년 세월과 함께하고 있는 십정동사람들이 있어서다.

 

“아침 여섯시에 문 열어 밤 12시에 문 닫아요. 지금은 몸이 힘들어서 좀 일찍 닫아도 문 여는 시각은 변함없다”고 말하는 그는 오늘도 십정동 도축장에 있는 경매시장에 직접 가서 고기를 고른다. 30년을 그렇게 고집해온 삶이다. 양질의 쇠고기는 논산 우시장이 열리는 날 직접 내려가서 구해야 직성이 풀린단다.

 

 

열심히 땀 흘려 일해도 이제는 그것이 바보소리를 듣는 세상, 주식하나 펀드하나 갖고 있지 못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는, 그래서 아무리 노력해도 그다지 나아지지 않는 삶, 돈이 최고의 가치로 숭앙받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무한경쟁, 누군가를 밟고 일어서야만 하는 이 현실에는 여전히 상처받고 절망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기에 십정동은 이 땅의 낯선 마을이 아니다.

 

어디 십정동사람들 뿐이며, 나하나정육점 뿐이랴. 세월이 이 만큼 흘러 군부독재를 지나, 문민정부와 참여정부를 지나 다시 오늘에 이르기까지 십정동사람들은 여전히 자기 삶터를 묵묵히 지켜가고 있다. 그리고 18번 종점은 여전히 그들 가슴속에 아련한 그리움으로 자리 잡고 있고, 그들은 오늘도 묵묵히 하루를 버티고 견디며 살아간다. 저마다 자신이 품고 있는 올곧은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부평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30년 부평지킴이, #나하나정육점, #십정동사람들, #부평구, #나종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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