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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버스터로 인해 아버지의 칠순잔치에 가지 못하게 된 백악관 대변인 CJ가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웨스트윙 시즌 2 17화 <스택하우스의 저항>)
 필리버스터로 인해 아버지의 칠순잔치에 가지 못하게 된 백악관 대변인 CJ가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웨스트윙 시즌 2 17화 <스택하우스의 저항>)
ⓒ 웨스트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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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첫 필리버스터예요. 저는 전문가는 아니지만 필리버스터의 규정은 아주 간단하죠."

인기 미국드라마 <웨스트윙>에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방해)와 관련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이 에피소드에서 백악관 대변인인 CJ는 스택하우스 의원의 필리버스터로 인해 아버지의 일흔 번째 생일모임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어 아버지에게 편지를 쓴다. 그 편지를 통해 미국의 필리버스터와 관련한 몇 가지 규칙을 알 수 있다(웨스트윙 시즌 2 제17회 <스택하우스의 저항>(The Stackhouse Filibuster)).

"발언석을 지키는 동안에는 발언권을 계속 행사해야 한다. 그건 말을 절대 멈출 수는 없다는 거죠.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없어요. 그건 괜찮다 쳐도 회의장을 떠날 수 없으니 화장실도 쓸 수 없죠. 하지만 이것에 비하면 약과예요. 절대 앉을 수 없다는 것, 무엇에 기대서도 안 되고 사람에게 기대서도 안 되죠. 내일 아침 신문에서 읽게 되실 가족 복지 법안 때문에 시작된 일이에요."

원혜영에 이어 홍준표도 "필리버스터 도입해야"

바야흐로 한국에서도 필리버스터와 관련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지난 3일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합리적인 필리버스터 제도를 도입할 용의가 있습니다. … 국회를 정책 경쟁의 장으로 만들기 위한 새로운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했다.

이에 앞서 민주당의 원혜영 원내대표 역시 지난 1월 7일 성명서를 통해 필리버스터 제도 도입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수당에 의한 횡포를 억제하고, 법치주의와 의회주의를 어떻게 꽃피울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중략) 필리버스터를 60%의 찬성으로 막을 수 있는 규정 등이 그런 것이다. 이제 우리 국회도 헌법의 삼권분립과 대의민주주의의 정신을 여야가 구현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와 관행을 수립할 때다."

2008년 12월, 이른바 '제1차 입법전쟁'이 불러온 필리버스터 도입 논의다.

미국 상원의 필리버스터 제도와 클로처 제도

필리버스터(filibuster)란 "입법관행상 미국 연방상원에서 다수파가 양보하거나 법률안을 철회할 정도로 오랫동안 연설함으로써 의회 활동을 연기하거나 방해하기 위하여 상원의원 소수파(때로는 1인의 상원의원)에 의하여 사용되는 의회의 전술"을 말한다(브리태니커 백과사전). 간단히 말하면 다수파의 전횡에 맞서 소수파의 의견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다.

필리버스터는 '해적' 또는 '약탈자'를 의미하는 스페인어 '필리부스테로(filibustero)'에서 유래했다. 그 근원은 네덜란드어라고 한다(한국일보 1월 16일). 대부분의 선진국 의회는 법으로 필리버스터 제도를 명문화하지는 않고 있으나 발언시간 제한 규정을 두지 않음으로써 필리버스터를 허용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1841년 민주당 상원의원들이 은행법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차례로 장광설을 펼친 것이 시초로 꼽힌다. 이제는 미국 상원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미국에서 가장 긴 필리버스터 기록을 보자.

"지금까지 가장 긴 필리버스터 기록은 2002년 만 1백세를 기록하고 은퇴한 스트롬 서몬드 의원이 갖고 있다. 그는 1957년 민권법에 반대하기 위해 무려 24시간 18분 동안 연설을 했다." (박선규, <미국 왜 강한가?> 133면)

필리버스터로 인한 무한정의 의사지연을 막기 위한 장치도 두고 있다.

"이런 필리버스터를 허용하는 상원에는 '클로처(cloture)'라는 제도도 있다. 이는 필리버스터 남용을 막기 위한 것이다. 16명이 서명한 뒤 재적의원 5분의 3(60명)의 동의를 얻으면 필리버스터를 자동 종결하도록 한 제도이다." (박선규, 같은 책 133면)

우리 국회에는 왜 필리버스터 제도가 없을까?

현행 국회법은 통상적인 발언시간을 15분 내로 제한하고 있으며(국회법 제60조), 동일의제에 대한 발언도 2회로 제한하고 있다(동법 제103조). 사실상 필리버스터를 원천봉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1973년 국회법 개정 이전에는 이와 같은 발언제도 제한이 없었다. 왜 이와 같은 발언시간 제한규정이 도입되었을까?

때는 1964년이다. 기시 전 일본 수상과 도쿄대 법학부 동창생인 김준연 의원은 당시 한일수교 협상과정에서 박정희 정권이 "비밀회담을 통해 일본자금 1억3000만 달러를 수수했다"고 발언해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국회에 허위사실 유포죄 혐의로 김 의원에 대한 구속동의를 요청했다. 발언 시간 제한이 없었던 1964년 4월 20일 당시 국회의원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김 의원의 국회 구속동의안 의결을 저지하기 위해 5시간 19분 동안 쉬지 않고 연설한다. 당시 상황을 보자.

"남편은 전날 밤 늦도록 준비를 했다. 의사진행발언권을 얻어 한일 국교수립과정의 잘못된 점과 구속의 부당성 그리고 국정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저녁 8시까지 김대중 의원의 발언이 계속되자 이효상 국회의장이 일방적으로 폐회를 선언했다. 결국 (김준연 의원의) 구속 동의안은 상정되지 않았다. 이날 원고 없이 5시간 19분 동안 계속된 그의 발언은 여당이 비집고 들어와 발언할 틈을 주지 않았다. 이는 의정 사상 처음으로 있었던 가장 긴 의사진행방해발언기록이다. 이 일로 인해 다음 7대 국회에서는 의사진행발언을 30분 이내로 제한하는 국회법을 제정했다." (이희호, <동행> 84쪽)

헌정사상 본회의 발언 최장 기록은 1969년 박한상 의원의 3선개헌 반대 발언 10시간 5분이다. 하지만 필리버스터 기록에는 늘 김대중 전 대통령의 1964년의 발언이 먼저 기록된다. 아마 그 이유는 성공한 의사진행 방해였기 때문일 것이다.

여담이지만 김준연 의원은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제41회 임시국회 회기가 끝나는 21일 다시 표결에 붙이려고 했으나 야당이 단상을 점거하는 등 극한적인 투쟁을 했기 때문에 일곱 번이나 정회를 거듭하고 협상을 시도했지만 끝내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김 의원 구속 동의안은 다음 회기로 넘어갔는데 국회가 폐회 중인 4월 26일 검찰은 김 의원을 구속해 버렸다." (이병주, <그해 5월 3>, 263면)

공화당이 일본으로부터 1억 3천만 달러를 받아먹었다고 발설한 김준연 의원의 사건은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유야무야되었다.

소수당 의원에 대한 '의사 방해자' 비난, 타당한가? 

민주당이 국회 로텐더홀에서의 농성을 해제한 1월 5일 오전 강기갑 대표 등 민주노동당 의원들이 본회의장 출입문에 쇠사슬로 몸을 묶은 채 단독 농성에 들어가기 앞서 'MB악법과는 타협할 수 없다'고 적힌 대형 플래카드를 내걸고 있다.
 민주당이 국회 로텐더홀에서의 농성을 해제한 1월 5일 오전 강기갑 대표 등 민주노동당 의원들이 본회의장 출입문에 쇠사슬로 몸을 묶은 채 단독 농성에 들어가기 앞서 'MB악법과는 타협할 수 없다'고 적힌 대형 플래카드를 내걸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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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연시 여의도에서는 반복되는 일상이다. 예산안 처리, 민생법안 등을 빌미로 정부와 여당은 날치기를 시도하거나 '속도전'을 강조한다. 야당은 이를 저지하고 법안의 문제점을 알리거나 하나라도 더 얻어내기 위해 본회의장 문을 걸어잠그고 단상을 점거한다. 토론의 과정은 무시된다. 안건인 법률안에 대해 국회의장이나 여당 의원마저 '내용이 뭐냐'고 묻는 코미디가 벌어지기도 한다. '다수결'과 함께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이라 할 수 있는 '소수의견 존중'이 무시된 현실이 빚어낸 일상이다.

거기에 더해 정부 여당과 일부 언론에서는 단상을 점거하는 소수당 의원에 대해서는 '폭력 국회' 내지는 '의사방해자'라고 비난한다. 하긴 이와 같은 소수당 의원에 대한 비난은 비단 한국 국회만의 문제는 아닌 듯싶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역시 소수당 의원이 법안 표결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다수당은 소수당과의 모든 협상에서 원하는 것을 100퍼센트 얻어 내면서 그 대가로 10퍼센트쯤을 양보하며 이런 '타협안'을 지지하지 않는 소수당 의원은 모두 '의사 방해자'라고 비난할 수도 있다." (<담대한 희망> 197면)

'필리버스터'는 민주주의 기본원칙을 위한 제도다

1973년 국회법 개정을 통해 도입된 '발언시간 제한' 규정은 우리 국회에서 소수파의 권리를 지나치게 제한한 유신시대의 산물이다. 토론을 통한 합의보다는 다수의 힘을 빌려 형식적 법치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그렇다고 무한정 토론만을 하자는 말은 아니다. 현재 도입이 검토되고 있는 필리버스터 제도로 인해 법안 처리가 무한정 지연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물리적 대치를 통해 소비되는 국회의 공전과 필리버스터 제도를 통한 소수파의 토론 기회 부여 중 어느 것이 과연 민주주의적인가?

다시 웨스트윙이다. 금요일 저녁 약속에 참석하지 못하게 된 백악관 직원에게 CJ는 이렇게 말한다.

"(금요일 저녁 개인일정에 차질을 빚은 백악관 직원과 기자에게) 여러분, 죄송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지금 여러분께서는 민주주의가 뭔지 보고 계십니다. 아주 아름답죠?"


태그:#필리버스터, #홍준표, #원혜영, #웨스트윙, #버락 오바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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