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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일 할아버지가 용광로에서 꺼낸 쇠덩이를 쇠망치로 두들이고 있다.
▲ 김한일 할아버지 김한일 할아버지가 용광로에서 꺼낸 쇠덩이를 쇠망치로 두들이고 있다.
ⓒ 박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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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쿵~쾅! 쿵~쾅!” 둔탁한 쇠망치 울림소리가 퍼지면 이내 벌겋게 달아오른 쇠덩이가 제 모양을 찾아간다. 용광로에서 갓 나온 쇠뭉치의 온도는 섭씨 3800도. 쇳덩이는 불과 30초도 안돼 말을 듣지 않는 섭씨 3000도 밑으로 내려가기 때문에 대장장이의 손놀림은 정신이 없다. 뜨거운 온도 때문에 온 몸에서는 땀이 '뻘뻘'. 호미, 낫, 도끼부터 각종 곡괭이와 솥단지는 그렇게 대장장이의 땀을 받으며 만들어졌다.

전주시 완산구 서완산동에는 상공에서 내려다본 산의 모습이 마치 용의 머리 형상을 닮았다고 해 이름 붙여진 ‘용머리고개’가 있다. 이곳에선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린 듯 한 정취를 느낄 수 있는데, 바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골동품 가게와 대장간이 만들어내는 이색적인 분위기 때문이다.

그중 단연 돋보이는 곳은 50년이 넘도록 대장장이로 살아온 김한일(69)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한일민속대장간이다. 세려된 인테리어도 그럴싸한 간판도 없건만, 대장장이의 장인정신이 녹아있는 그 곳. 지난 3일 찾아 간 한일민속대장간에는 여전히 땀 흘리고 있는 김한일 할아버지가 있었다.

먹고 살기 위해 시작한 일이 평생직업으로….

“아, 나 어렸을 적이야 다들 먹고 살기 힘들었지. 나도 배를 곪지 않는 방법을 생각 하던 중 시작하게 된 일이 대장간일이여. 그 때가 그러니까 16살이었지….”

한국전쟁이 휴전을 맞이하고 채 몇 년이 지나지 않은 1956년. 16살의 김한일 할아버지는 형님이 운영하던 남부시장 대장간에서 처음으로 일을 배웠다. 하지만 모든 게 어려웠다. 수동 풀무질부터 해머질까지, 아직은 소년에 불과했던 김한일 할아버지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서울로 도망치기를 수차례. 다른일을 찾아보려 했지만 결국 김한일 할아버지는 대장장이가 됐다. 그리고, 반세기. 할아버지는 대장장이를 ‘천직’이라 생각하며 지금껏 살아왔다. 대장장이로서 풍요로웠던 시절도 있었다.

“아, 그 당시야 다들 농사짓고 살던 시절이라서 주문이 밀려들었지. 호미와 칼, 낫 등 주문량이 폭주해 5명의 직원이 풀무·집게·해머질을 해대며 하루 종일 호미 150자루, 칼(낫) 60자루를 만들었었어….”

31세 때, 독립을 한 김한일 할아버지는 전주 서서학동 공수네다리 인근에서 처음 자신의 대장간을 차렸다. 현재 용머리고개로는 1982년 이전했고, 시작할 때의 ‘한일철공소’라는 가게명도 어느새 ‘한일민속대장간’으로 바뀌게 됐다.

김한일 할아버지
▲ 김한일 할아버지 김한일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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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장이 기술은 문화 유산”

좋았던 시절도 잠시, 김한일 할아버지의 대장간에도 시련이 찾아왔다. 농사기술의 발달로 일감이 점점 줄어든 것이다. 대장장이가 할 일을 기계가 대신했다. 따로 둔 직원 4명을 모두 떠나보냈고, 김한일 할아버지 혼자서 대장간을 지켜왔다.

“옛날엔 괭이, 호미 같은 농기구랑 솥이 많이 팔렸지. 그때는 일일이 손으로 김 메고 해야 하니까 너도나도 농기구를 많이 사갔어. 지금이야 농업이 기계화 됐으니 잘 안팔려. 호미 하루에 몇 개씩 팔고, 괭이나 낫 같은 거 또 몇 개씩 팔고 그러지 뭐….”

문득, 호미와 낫의 가격이 궁금해 할아버지께 질문을 들렸다.

“그럼, 여기 있는 호미랑 낫의 가격은 얼마나 하나요? 요즘 사람들은 이런 거 잘 모를거 같은데요.”

“허허~ 그건 왜 물어. 아~ 호미야 하나에 2천원. 낫은 5천원. 약초 캐는 곡괭이도 5천원 하지. 저기 큰 도끼는 2만원 정도 하고.”

가격은 생각보다 쌌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뻘뻘 땀 흘리며 만든 ‘가치’에 비해 ‘값어치’는 턱없었다. 그럼에도 할아버지는 이 일을 그만둘 생각이 없다. 대장간을 전통으로, 대장장이 일을 민속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제 이 일은 ‘민속’이야. 없어지면 안돼. 아, 공사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연장도 수리해 줘야 하고, 가끔이지만 농기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대장간이 없어지면 안돼지. 조상의 얼이 담긴 대장간 기술은 하나의 문화유산이야. 나에겐 이 문화를 지키고 물려줘야 하는 의무가 있는 거지.”

전주 용머리고개에 위치한 한일민속대장간
▲ 한일민속대장간 전주 용머리고개에 위치한 한일민속대장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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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자(父子)가 지켜내는 대장간

하지만 물려받을 사람이 없으면 아무리 할아버지의 뜻이 좋다고 해도 소용없는 일. 어렵고 힘들며 외로운 이 일을 누가 물려받을 것인가. 다행히 할아버지의 막내아들이 2002년부터 대장장이 장인 전수자로 대장장이 일을 연마하는 중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나도 말렸어. 왜냐면 이 일이 원채 힘든 일이거든. 내가 반평생 해왔으니 알지. 그런데 이 놈이 뜻을 안 굽히는 거여. 그럼, 대신 나를 원망하지 말라고 했어. 쇠를 달구는 법부터 두드려서 모양을 맹그는 법, 또 물에 담가 열처리 하는 방법까지 오래 배우고 해야하기 때문에 지금 함께 일을 하고 있는 중이여.”

할아버지의 막내 아들 김창호(31) 씨는 “한 기술만을 오랫동안 연마해 장인으로 인정받는 것은 어떤 일보다 경쟁력이 있고 매력있는 일”이라며 “빨갛게 달궈진 무쇠를 단련하다 보면 세상 걱정을 다 잊는 거 같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특히 지난 해 말에는 경기도에 있던 할아버지의 둘째아들도 대장간 일을 돕겠다고 내려와 이제는 3부자(父子)가 든든히 대장간을 지키는 중이다.

“같은 쇠라고 해서 다 같은 쇠가 아녀. 쇠마다 성질이 다르기 때문에 쇠에 따른 열처리 강도 역시 다를 수 밖에 없지. 그런데 이걸 기계가 대신 한다고? 어림없어~.” 인터뷰하는 시간조차 아깝다며 망치질에 여념이 없는 할아버지에게서 장인의 ‘옹고집’이 느껴졌다.

“쿵~쾅!, 쿵~쾅!” 용머리고개를 지날 때면 잠시 귀를 기울여보라. 그곳에선 ‘민속’을 이어나가는 할아버지의 힘찬 쇠망치 소리가 들릴 테니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선샤인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대장간, #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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