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준을 처음으로 직접 만나다
장하준은 유명하다. 그런데 사실 나는 장하준을 둘러싼 다른 이들의 이야기만 주워 들어왔지, 장하준의 책을 통해 장하준과 직접 대면해 보지 못했다. 그저 로얄패밀리인 장씨 집안에서 탄생한 똑똑한 경제학자라는 선입견이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재벌을 옹호한다는 등 그에 대한 비판에 솔깃했기 때문일까?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장하준을 만난 건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처음이다.
그것도 별로 읽을 생각이 없었는데, 국방부 장관님께서 꼭 보라고(나에게는 금지도서 선정이 이런 권유로 들렸다. 주님의 계시처럼) 권해주신 덕에 사서 읽게 되었다. 국방부 장관님은 이 책의 노이즈 마케팅에 혁혁한 공을 세우신 격이 되었다. 내가 이 책을 읽고 많은 통찰력과 배움을 얻었으니 국방부 장관님께 두 손 모아 감사드려야 함은 물론이다. 감사합니다. 장관님, 충성!
앞서 말했듯 내가 아는 장하준은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장하준이다. 때문에 지금부터 내가 말할 장하준 그리고 그의 경제학은 장하준의 일부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장하준을 잘 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는, "책 한권 읽고 뭘 그리 안다"고 타박을 당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이 책이 그리고 장하준이 나에게 준 기쁨을 말하고 싶다.
장하준은 (거짓말 탐지기) 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책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강도 만난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마리아인들의 거짓말을 들추어낸다. 거짓을 고발하는 그의 글은 감정과 구호가 아니다. 누구나 승복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사실과 기록을 통해 자신들의 과거를 서슴없이 부정하는 추악한 사마리아인들을 발가벗긴다.
보호무역, 지적재산권의 침해, 외국인의 투자규제, 관세 등을 통해 경제를 발전시켜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나라들이 자신들의 과거인 지금의 빈국과 개발도상국들에게는 자신들에게나 어울리는 자유무역, 강력한 저작권보호, 무한대의 투자자유, 무관세를 '자유로운 경쟁'이라는 명분 아래 강요하는 눈뜨고 못봐줄 치사함을 차분하지만 명쾌하게 밝혀내고 있는 것이다.
장하준은 한 인간이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키워나갈 수 있는 힘을 갖기 전에는 가정과 사회의 보살핌을 받는 것이 당연하듯, 한 국가도 자신들의 삶을 발전시키는데는 그에 합당한 보호가 당연함을 설파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금의 경제대국들이 모두 일정기간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는 가운데 성장시켜 지금의 풍요를 이루어 왔다는 사실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영국은 아직도 모직물이나 팔고, 미국은 면화나 생산하고 있을 거라는 서술은 장하준이 제시하는 객관적인 지표 앞에 힘을 얻는다.
지금의 경제대국들이 주장하고 관철시키고 있는 세계의 경제질서는 자신들이 받은 사랑과 보살핌이 지금 그것이 필요한 사람에게 가는 것은 봐줄 수 없다는 '있는 것들이 더 한' 행태의 다름아니다. 자신들이 거쳐 온 역사마저 부정한 채 다른 나라에게는 불공정한 시장을 강요하는 기억 상실에 대해 바로잡기는 커녕, 못사는 나라가 못사는 이유를 문화나 기질 등 상관성이 크지 않은 문제로 돌려버리는 파렴치함은 장하준이라는 거짓말 탐지기에 빨간불을 들어 오게 한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경제학 사전이 얼마나 엉터리이고 뻔뻔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장하준은 바로 거짓말 탐지기다.
장하준은 (세계인) 이다
그럼 도대체 왜 경제대국들은 이렇게 거짓말을 해 가면서까지 '남이 잘 되는 꼴' 보는 것을 싫어할까? 나는 그 놀부심보에서 힘있고 멋진 강대국들에게도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인간의 심성이 자리하고 있음을 본다. 뭐 좋은 차 굴리고, 좋은 데 사는 사람들도 별 다른 거 없다는 사실이 한편으로 다행스럽고, 위안이 되기도 하지만 정말 재미있는 것은 '저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무서운 세계경제 질서가 바로 세계화를 외치는 사람들로 부터 잉태되었다는 것이다.
나만 잘먹고 잘 살겠다는, 나는 지금 잘 먹고 잘 사니까 그냥 이대로 세상이 굴러가면 좋겠다는 생각은 속 좁은 인간 혹은 매우 이기적이고 경계심에 가득찬 민족주의자들에게서 나와야 그럴 듯해 보이는데 '글로벌라이제이션'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장면을 본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들이 외치는 이러한 '자유'와 '시장'과 '경쟁'이 도리어 자신들이 지배하고 있는 세계 경제질서를 공고히 하는 또 다른 보호무역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세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나만 잘살면 된다' 그리고 자유무역론자들이 주장하는 '새로운 보호무역의 출현'은 정말 재미있지 않은가?
여기서 나는 세계인 장하준을 본다. 그는 한국인이다. 한국은 예전에는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였지만, 지금은 세계 경제대국의 일원으로 진입해 있다. 한국의 이해 관계는 이제 나쁜 사마리아인들과 겹치는 부분들이 더 많아지고 있다. 그는 세계 유수 대학의 교수다. 그는 이미 많은 명예를 가졌고, 앞으로도 더욱 많은 학문적 성과들을 선보일 것이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그가 먹고사는 문제로 고민할 것 같지는 않다. 그저 잘먹고, 자식들 좋은 교육 시키면서 살아도 괜찮을 것 같은 그가 자신의 이해관계와 처지를 벗어나 세계적인 시선에서, 세계화된 입으로 '우리 모두'의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기에 그는 진정한 세계인이고, 세계화론자다. 세계는 모두 발전하고, 잘 살아야 하니까.
장하준은 (망원경) 이다
나는 얼마 전부터 잘 해결되지 않는 의문을 하나 달고 살았다. '왜 부한 자는 더욱 부해지고, 가난한 자는 계속 가난해지는가'라는 질문이었다. 그리고 이 질문의 이면에는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정책과 제도, 그리고 잘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사회적 의식들이 살아있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사소한 문제일 수 있겠지만, 도심에서 함께 일하는 부자와 빈자가 부자는 집값이 비싼 도심에서 살기에 교통비가 덜 들고, 빈자는 밀리고 밀려 공기좋은 위성도시에 살면서 날마다 비싼 교통비를 내고 2시간 가까이 빨간 버스 속에 서서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것이 나에게는 답답한 문제였다. 마티즈가 벤츠를 박으면 그냥 차 열쇠를 놓고 가야하고, 벤츠가 마티즈를 박으면 돈이 별로 들지 않는 것이 나에게는 좀 불공정해 보였다.
내가 속한 사회 속에서 이런 질문을 가지고 고민하는 나에게, 장하준은 그것이 이 땅의 문제만은 아님을 보여준다. 나는 장하준이라는 성능 괜찮은 망원경을 통해 그렇게 세계가 같은 문제에 직면해 있음을 보게 됐다. 어려운 시절을 지나, 성공신화를 써 온 사람들이 지금 어려운 사람들이 성공신화를 쓰는 것은 별로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올챙이적 생각 못하는 개구리'들이 전세계적으로 서식하고 있음을 알려준 것이다. 뭐 놀랄 일은 아니다. 나를 포함해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일 지도 모르니까. 여튼 내 고민이 허튼 고민은 아니라는 걸 장하준이라는 망원경을 통해 알았다.
장하준은 (열쇠) 다
자 그럼 문제는 '요모양 요꼴'을 벗어나는 일이다. '이대로'를 외치며 사는 오늘의 강자들이 어제의 자신을 돌아보고, 오늘의 약자들이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는 것이다. 장하준은 먼저, 누구나 괜찮은 삶을 살 수 있음을 긍정한다. 원래부터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없다. 얼마나 사랑받고, 보호받으면서 자신의 삶에 대한 기회를 얻느냐에 따라 누구든 더 좋은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장하준이 그린 가상의 모잠비크가 결코 헛된 이야기만은 아닌 것이다.
장하준은 '요모양 요꼴'을 강요하는 사회와 세계속에서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 다른 삶을 살 수 있음을 주장한다. 그리고 역사적인 사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더러운 한국'이 '게으른 일본'이 '거짓말 잘하는 독일'이 바로 살아있는 증거들이다.
이런 사실들 앞에 '넌 어쩔 수 없다'는 거짓말은 통하지 않는다. 그것은 얼마나 정성스럽게 가꾸어주고, 키워주느냐에 따라 달린 문제이지, 선천적으로 결정되어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 잘못된 경제학 사전에 속고, 요모양 요꼴을 숙명적으로 받아들인 채 오늘과 같은 내일, 내일과 같은 모레를 살아갈 가능성이 농후한 우리의 형제 자매들을 구출해 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 열쇠를 가져와야 한다. 장하준은 그 열쇠 중에 하나다.
장하준은 (경제학계의 김두식) 이다
나는 장하준을 어렵게 생각했다. 뭔가 있어 보였기 때문이겠지. 물론 뭔가 있을 것 같다는 예상은 전혀 빗나가지 않았다. 그는 뭔가가 있었다. 그러나 어려울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그는 그가 가지고 있는 '뭔가'를 누구나가 알 수 있도록 친절하게 이야기해 주는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장하준이 반가웠다. 경제를 어렵게 생각하는 나도 재미있게 잘 읽었으니까. 그래서 장하준은 '경제학계의 김두식'이다. 법학자인 김두식이 그가 가지고 있는 '뭔가'를 재미있고 쉽게 풀어내듯, 장하준은 그와 닮았다. 그래서 나는 경제와 법에 대해서는 꽤 괜찮은 선생님을 두게 됐다. 그것도 등록금 부담없이.
장하준은 (착) 하다
마지막으로 장하준은 착하다. 앞서 말한 거짓말 잡는 장하준, 세계인 장하준, 망원경 장하준, 김두식 같은 장하준을 포괄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착함' 일 것이다. 이 책의 면면에 흐르고 있는 정신은 그가 책을 닫는 글에서 썼듯 바로 '가난한 나라들이 경제를 발전시키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공부와 아이디어를 이런 일을 위해 쓰는 사람이라면 착하다고 해도 별 탈이 없을 듯 하다. 나쁜 놈 많은 이 세상에, 좋은 놈을 만난 기쁨은 사막에 쓰러져 있는 강도 만난 사람이 선한 사마리아 인을 만난 기쁨에 비할만 하다.
부러움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영국이라는 나라가 부러웠다. 영국 최고의 대학에 경제학교수로 일하고 있는 장하준이 자신에게 많은 것을 베풀어준 그 영국의 뻔뻔함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이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했던 수 많은 보호와 아이디어 차용들이 지금의 영국을 만들었음을, 그러기에 지금 영국이 다른 나라들에게, 그것도 힘없는 나라들에게 자유와 시장을 분별없이 강요하는 것이 얼마나 낯 뜨거운 일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장하준의 저술은 영국에 대한 '배은망덕'일까? 영국 대학의 교수로써 적절하지 못한 처신일까? 아니다. 그것은 그저 역사적 사실일뿐, 영국에 대한 도전도, 영국에 대한 비난도 아니다. 더 나아가 그것은 영국이 더 좋은 나라가 되기를 바라는 제 2의 조국에 대한 간절한 애국심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아직까지 장하준이 그 대학에서 좇겨났다는 소식이 없는 걸 보니 영국 사람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역사의 부끄러움과 잘못을 이야기하는 것을 국가관의 결여와 애국심의 부족으로 매도하는 이 '분별력 제로'의 시대 속에 장하준 같은 착하고 괜찮은 학자가 나오기를 바라는 것은 과도한 욕심일 것이다. 우리 대한민국도 분별력 있고, 진정한 애국심이 환영받는 괜찮은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이런 나의 애국심에 불을 붙여준 국방부 장관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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