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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향기 자전거 여행이 즐거운 이유다.
▲ 길 위의 향기 자전거 여행이 즐거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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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다의 새벽을 여는 새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사파이어 빛을 훔쳐다 빠트린 양 푸른 대서양의 품으로 곧게 뻗은 도로는 청명한 하늘 아래 정글의 푸른 기운까지 끌고 간다. 멕시코 최고의 휴양도시인 칸쿤으로 가기까지 나는 이 정글도로를 수백 km는 달려야 한다.

아침은 2kg짜리 파파야, 점심은 바나나 한 손으로 속을 달래본다. 배는 고프지, 영양에 맛까지 고려하려면 한정된 경비에 선택할 수 있는 음식의 범위는 줄어든다. 하지만 치명적 실수를 범했다. 빈속에 파파야는 최악의 독약이다. 속쓰림과 위산 과다분비의 여파로 신물이 넘어온다. 가뜩이나 장이 약해질대로 약해진 상태에서 먹은 바나나는 설사 촉진제로 둔갑한다. 요상한 얘기지만 멕시코 들어오면서부터 바나나는 100% 폭풍설사의 공식파트너가 되어버렸다.

애완조 "우리 동네 과일 가게 아저씨는 인심도 푸짐하지." 파파야 하나 샀더니 덤으로 하나 더!
▲ 애완조 "우리 동네 과일 가게 아저씨는 인심도 푸짐하지." 파파야 하나 샀더니 덤으로 하나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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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파파야 킬러!
 나는 파파야 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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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저녁까지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도로를 달리는 것도 자전거 여행에서 느끼는 매력이다. 먹고, 싸고, 달리는 심플 라이프 속에 굉장한 철학이 숨겨져 있다. ‘먹어라, 꿀을 맛보게 될 것이다! 싸라, 끙을 맛보게 될 것이다! 달려라, 끝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반복하다 어느 순간 내가 꿈꾸던 파라다이스에 도착한다면? 싼티나는 먹고, 싸고, 달리는 행위가 얼마나 고상한지 그 감격에 그만 흠뻑 젖어들 것이다.

길따라 녹음에 빠져드는 풍경은 예상대로였다. 고단함을 넘어서는 절대빈곤의 흔적은 아무리 정글로 가리려 해도 가려지지 않는 아픔이 보였다. 비바람에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집들의 내부는 더욱 더 위태로웠다. 사람의 사생활은 집 안으로 자유로이 드나드는 가축들로 인해 전혀 보호받지 못한다. 먹고 자는 독립된 공간의 부재는 병균까지 함께 나눠야 하는 공동운명체의 숙명까지 떠안는다.

바깥에 설치되어 있는 부엌 살림살이를 보면 식사나 제대로 챙기고 있는지 걱정부터 밀려든다. 해먹과 해어진 옷가지 몇 개를 제외하면 텅 빈 집 안의 썰렁함이 이들의 마음까지 차갑게 만들지는 않을런지. 해먹 아래를 지나는 닭을 보며 생각한다.

‘잡혀 먹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알이나 낳아라.’

“이렇게 살면 위생상태가 엉망이지 않소? 당장 집을 다 철거하고 새로 지으시오!”
“시방 뭔 소리여? 돈 한 푼도 없구만.”

제대로 된 지원없는 멕시코 정부의 검은 동정은 이들에겐 그저 잔소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정글의 원주민들은 매일 '동물농장'을 체험하는 조지 오웰이 되겠지만 소설 한 편 나온다면 내용은 보다 냉소적이고 비극적일지 모른다. 제목은 ‘新 동물농장균’이 적당하리라.

메리다 지역의 삶 허름하기 그지없는 가옥은 가난의 아이콘이다.
▲ 메리다 지역의 삶 허름하기 그지없는 가옥은 가난의 아이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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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옥 내부 없는 살림살이가 휑해 보인다. 밑바닥으로는 가축들이 자유로이 드나든다. 위생상태가 좋을리 없다. 정부에서 이런 주거환경을 금지했지만 가난한 이들은 도리없이 법과 상관없이 살아갈 뿐이다.
▲ 가옥 내부 없는 살림살이가 휑해 보인다. 밑바닥으로는 가축들이 자유로이 드나든다. 위생상태가 좋을리 없다. 정부에서 이런 주거환경을 금지했지만 가난한 이들은 도리없이 법과 상관없이 살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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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겨운 하루나기 수레 위에 올라 탄 아이의 표정이 밝다. 아직은 험한 현실을 모를 나이.
▲ 힘겨운 하루나기 수레 위에 올라 탄 아이의 표정이 밝다. 아직은 험한 현실을 모를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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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행거리가 100km가 넘어서고, 정글의 겨울 햇살이 뺨 위로 내려앉았다. 이 때 어느 가난한 모자의 힘겨운 하루살이를 스쳐 지나가는 길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음악이 들려왔다. 냉큼 그 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작은 문을 지나 들어간 건물 마당에서 울리는 시끌벅적한 구두굽 소리와 웃음소리가 작은 마을의 감정을 풍요롭게 채색하고 있었다.

하라나 댄스. 이 마을에서 즐겨 추는 춤이란다. 마치 포크댄스마냥, 때론 살짝 탭댄스를 흉내 내듯 여느 남미 댄스와는 달리 발놀림 위주로 흥을 내는 춤이다. 그 때문일까. 발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춤답게 신발은 모두 흰색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이 춤을 출 때는 거의 모두 흰 구두를 착용하는데 맵시가 나고, 춤에 있어서 전통적으로 하얀 색에 대한 호의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한다. 이것은 주로 아이들에게 해당되는 것이고, 어른들은 크게 개의치 않는 부분이기도 하다.

하라나는 원래 컵에 얼음을 넣고, 테킬라에 설탕시럽, 파인애플 주스를 섞어 만든 멕시코판 삼합 음료다. 재료들이 모두 이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같은 이름의 춤도 세 가지 동작이 조화를 이룬다. 발레를 추듯 사뿐히 움직이는 발과 그림을 그리듯 곡선미를 살린 손동작, 그리고 파트너십을 이루는 몸동작이 어우러져 이곳만의 독특한 춤을 만들어낸다.

댄스 삼매경 정글의 작은 마을엔 너나 할 것 없이 춤판에 푹 빠져있다.
▲ 댄스 삼매경 정글의 작은 마을엔 너나 할 것 없이 춤판에 푹 빠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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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나 춤 특징은 흰 구두를 신는다는 것.
▲ 하라나 춤 특징은 흰 구두를 신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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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 수업 끝!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표정이 귀엽기만 하다.
▲ 댄스 수업 끝!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표정이 귀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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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도 취할 겸 한쪽 구석에서 입꼬리가 올려진 채 오래도록 춤을 구경하고 있자니 연습을 마친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어 댄다. 쑥스러운 듯 내게 손짓하며 같이 춤추자는 얘기다. 아직 내 동급최강 몸치행각을 모르는 투다. 소싯적 껌 좀 씹던 시절 춤이나 배워둘 걸 하는 후회는 이럴 때 진하게 밀려온다. 아무것도 보여줄 것 없는 내가 정말 보여줄 수 있는 건 진심어린 마음뿐이다.

그렇다. 가난한 이들이었지만 잠시나마 웃음을 보일 수 있었던 것. 가지지 못하는 것 때문에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것을 즐겁게 누리는 이들은 춤을 통해 비로소 정글 속에서의 존재의 법칙을 깨달았을 것이다. 가난하다고 해서 왜 춤을 모르겠는가? 가난을 핑계 삼아 스스로 벽을 쌓고 그 벽에 내 꿈을 못 박아 벽 너머의 달콤한 환상을 고집스레 억압했던 스스로에게 꿀밤 한 대 먹여주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면서 이제는 인터넷 안 된다고 짜증내는 것보다 이렇게 신명나는 춤판이 있어 즐거울 수 있는 여행이라면 나는 정말 행복한 여행자라고 생각했다.

아차! 춤에 너무 빠져 있다 보니 해가 서쪽으로 빠져드는지도 몰랐다. 급히 짐을 챙겨 달렸지만 지구의 자전 속도를 무동력 두 바퀴로 따라잡기는 역부족. 결국 어둠속으로 다이빙 한 나는 정글 한 가운데에 있을 뿐이고, 다음 도시까지의 거리는 절망스러울 뿐이고. 스산한 기운을 걷어내고 맹렬하게 페달을 밟은 나는 가난하다고 해서 여행의 묘미를 느낄 수 없는지 생각해 보았다. 대답? 지금 내가 보여주고 있는데 뭘!

암담. 정글 한 가운데에서 위태롭게 헤매는 자전거 여행.
▲ 암담. 정글 한 가운데에서 위태롭게 헤매는 자전거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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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필자는 현재 ‘광야’를 모토로 6년 간의 자전거 세계일주 중입니다.
저서 <라이딩 인 아메리카>(넥서스 출판)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멕시코#세계일주#자전거여행#라이딩인아메리카#세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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