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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이명박 정부 1년의 평가라고 본다. 경고로서의 의미를 가질 것이라고 본다."

 

원혜영 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번 4월 재보선의 정치적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나'라는 질문에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이렇게 답했다. 낮은 음성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원 원내대표는 두 번의 민선시장을 거쳐 열린우리당 공천으로 17대 국회에 복귀했으나 이후 실시된 재보선에서 열린우리당이 한나라당을 한 번도 이기지 못한 채 대권과 제1당의 자리를 내준 쓰라린 경험을 가슴에 담고 있다. 민주당은 지금 그 아픈 경험을 한나라당에게 되돌려주려고 한다.

 

용산 참사 관련 김석기 내정자는 민주당의 '꽃놀이패'

 

민주당에게 오는 4·29 재보선은 다음 총선과 대선 때까지 이어질 재보선 장정(長征)의 출발선이다. 2010년 지자체 선거는 그 장정의 중간 반환점이다.

 

이명박(MB) 대통령에 대한 민심이 최초로 표출되는 이 선거의 결과에 따라 정국 주도권의 향방이 결정된다. 여당이 승리하면 이 대통령의 국민적 영향력 확인으로 주도권이 강화되겠지만, 패배할 경우 이 대통령의 정국주도권 약화와 당-청 갈등으로 여권의 분란이 앞당겨질 수 있다.

 

민주당으로서는 4월 재보선에서 승리하려면 그것의 전초전 성격을 띤 2월 임시국회에서부터 기선을 제압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선 원내사령탑의 역할이 중요하다.

 

대통령의 인사권을 존중해 달라는 청와대의 경고성 주문에도 불구하고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용산 참사에 대한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의 정치적 책임을 주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대통령이 김석기 내정자의 임명을 철회할 경우, 리더십에는 타격을 입겠지만 용산 불씨는 잠재울 수 있다. 반면에 임명을 강행할 경우 용산 참사를 둘러싼 지속적 논란의 불씨가 되면서 4월 재보선거 때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홍 원대대표가 전자(前者) 쪽이라면, 청와대는 후자(後者) 쪽이다.

 

야당으로서는 '꽃놀이패'다. 임명을 철회할 경우, MB의 리더십에 타격을 입혀 이른바 MB악법의 추진동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임명을 강행할 경우, 용산 불씨를 살려서 시민사회단체와의 연대해 4월 재보선에서 승리함으로써 지난 총선 이후 빼앗긴 정국 주도권을 되가져올 수 있다.

 

1차 입법전쟁에선 '판정승'... 2차 입법전쟁이 관건

 

지난 연말까지만 해도 민주당이 정국 주도권을 가져갈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 또 83밖에 안되는 '다윗당'의 온순 이미지의 원 원내대표가 172석이나 되는 '골리앗당'의 승부사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를 이길 거라고 예상한 사람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1월 '입법전쟁'을 거치면서 상황이 달라져졌다.

 

그 중심에 정세균 대표와 원혜영 원내대표가 있다. 원 원내대표는 정세균 대표와 "궁합이 아주 잘 맞는다"고 했다. 두 사람은 17대 때 원내대표(정세균)와 정책위의장(원혜영)으로 함께 일했다.

 

원혜영 원내대표가 정치인으로 내세우는 상품 가치는 '일등 정치인'이다. 여기서 '일등'은 모범생을 연상시킨다. 외모와 스타일도 '온유한 선비'를 떠올리게 한다. 강한 승부사 이미지의 홍준표 원내대표와는 정반대다.

 

싸움을 먼저 건 측도 홍 원내대표다. 한미FTA비준안을 상정한 뒤에 이제는 입법전쟁이라고 먼저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나 1차 입법전쟁에서는 원 원내대표가 '판전승'했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다.

 

원 원내대표가 꼽은 1차 입법전쟁의 승인(勝因)은 입법 절차와 내용에 모두 문제가 있었다고 본 국민 인식 덕분이다. 그는 "법 자체가 악법이라는 것과, 절차와 과정을 무시함으로써 국민을 무시하고 있다는 국민 인식이 대통령의 독려와 경위까지 동원한 거대여당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2차 입법전쟁이다. 홍준표 원내대표는 이미 2월 임시국회에서 '쟁점법안'을 처리하겠다고 했다. 1차 때는 본회의장 점거농성이라는 최후 수단을 사용했지만 또 다시 점거농성을 하기는 부담스럽다. 그의 말대로 쉽게 점거농성을 못하도록 국회 회의장도 '요새화'되었다. 또 다시 강행할 경우 여론의 역풍이 불 수 있다.

 

"1·6 여야 합의문은 휴전 아닌 종전협약서다"

 

그는 일단 원내 3교섭단체 대표들이 서명한 1월 6일 합의문에 해답이 다 있다고 했다. 그는 "입법전쟁은 휴전한 게 아니라 종전한 것이고 여야 합의문은 종전협약서다"면서 "그래놓고 (한나라당이) 다시 전쟁한다고 하느냐"고 일축했다. 여야가 합의문대로만 하면 싸울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 정치가 합의한 대로 되어 왔던가.

 

- 야당 원내대표로서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인가.

"정권이 (이 당에서 저 당으로) 두 번은 바뀌어야 정치적 민주화가 완성된다는 말이 있는데, 한나라당이 18대 국회를 수준 높게 원만하게 운영할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런데 철벽을 상대하는 느낌이라서 고통스러웠다. 그러다 보니 강경투쟁 외에는 다른 수단이 없었다."

 

그러면서 그는 "야당에게 투쟁은 필요조건일 뿐, 대안이 충분조건"이라면서 "대안정당, 정책정당으로 외화될 수 있는 기회와 환경이 없다는 게 안타깝다"고 했다.

 

- 일부에서는 한나라당은 (10년 동안 야당 하면서) 여당 하는 방법을 잊어먹었고, 민주당은 아직도 여당인 줄 착각한다고 한다.

"연말국회에서 잘 싸워서 그런 부분은 많이 해소되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투쟁을 안 하면 우리가 깔리니까, 존재가 부정 당하니까, 야당으로서는 투쟁은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고민은 남아 있는 것이다.

 

우리가 대안정당, 정책정당이 돼야 국민들이 우리를 지지할 텐데, 그렇게 드러날 수 있는 기회와 환경이 없다는 게 안타깝다."

 

 

그는 1차 입법전쟁 직후 KBS '박중훈 쇼'에 출연했다가 여론의 비판을 받은 것에 대해서도 국회에서의 싸움과 출연은 별개라고 선을 그었다.

 

- KBS '박중훈 쇼' 출연에 대해 언론 비판이 많았는데 당내와 지역구 반응은 어땠나?

"저는 뭐 언론이 그런 정서 있을 수 있다고 보는데, 거기 나가는 것까지 눈치보고, 거기까지 나가서 서로 싸우는 것이 국민들이 원하는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학생운동-CEO-국회의원-시장 경력은 MB와 유사

 

81년 풀무원 식품 창립...부친 원경선옹은 55년 풀무원 공동체 설립

원혜영 원내대표를 얘기할 때 그의 부친을 빼놓을 수 없다. 그래서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부친의 건강이 어떠신지부터 물었다. 그는 "아버님이 우리 나이로 아흔여섯이신데 작년부터는 쇠잔해지셨다"면서 "백 살까지는 사셔야 하는데"라고 했다.

 

부친 원경선(95)옹은 우리나라 유기농의 대부로 통한다. 원옹은 1955년에 경기도 부천에 개간도 안된 땅 1만 평에 기독교 공동체 농장을 세웠으니 그 농장 이름이 풀무원이다. 원옹은 1976년 경기도 양주로 옮겨와 오늘에 이르기까지 공동체에서 평생 나눔과 공유의 철학을 실천하며 자연의 이법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 왔다.

 

이를테면 풀무원 공동체에서 화학 비료와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는 유기농법을 시작하면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정농회를 창설해 바른 농사를 실천하고, 이기적 사유욕을 버리고 더불어 사는 삶을 실현하기 위해 한삶회를 설립했다. 

 

원옹의 풀무 정신은 장남인 원혜영에게 고스란히 이어졌다. 서울대 사범대 역사교육학과에 입학한 그는 71년 서울대 교양학부 학생회장을 맡아 유신독재에 맞서 학내 민주화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2번 복역하고 4번이나 제적을 당했다. 그는 80년까지 민주화운동에 투신해 96년에야 서울대 졸업장을 받았다.

 

이후 그는 81년에 친환경 먹을거리를 판매하는 풀무원 식품을 창립했다. 지금은 경영에서 손을 뗐지만, 그 회사가 바로 오늘날 국내 최대의 친환경 자연식품회사로 성장한 풀무원이다.

 

그는 92년 민주당 공천으로 14대 국회에 처음 들어오자마자 정치개혁운동에 참여했다. 95년 김대중 전 민주당 총재가 정계복귀하면서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지 않고 민주당에 잔류해 96년 선거에서 국민회의 후보에게 390표 차이로 석패했다.

 

96년 당시 총선을 앞두고 꼬마민주당은 '<모래시계> 검사'로 유명한 홍준표 변호사를 영입하기 위해 공을 들인 적이 있다. 그는 그때 노무현, 유인태, 이철 전 의원 등과 함께 홍 원내대표를 만난 인연이 있다. 15대 총선에서 홍 원내대표는 신한국당 공천으로 출마해 국회에 들어왔으나 그는 떨어져 사적인 교분이 없다가 18대 국회에서 여야 원내대표로 만난 것이다.

 

이후 그는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를 결성해 활동하다가 97년 대선을 앞두고 국민회의에 합류해 98년부터 민선 부천시장을 두 번 연임했다. 열린우리당 창당 이후 17대 국회에서 다시 정치에 복귀했으며 18대 총선에서도 연속 당선되었다.

 

학생운동, CEO, 국회의원, 시장으로 이어진 그의 경력은 고려대 상과대 학생회장, 현대건설 CEO, 국회의원, 서울시장으로 비슷한 코스를 거친 이명박 대통령의 이력과 자연스레 대비된다. 두 사람이 14대 국회에서 정치 입문한 점과 15대 국회에서 실패하거나 중도하차한 이후 자치단체장으로 방향을 튼 점도 같다. 

 

다른 점은 MB가 최연소 전문경영인으로서 샐러리맨의 우상으로 화려하게 정계에 입문했고 천만 인구의 서울시장을 하면서 청계천 복원이라는 화려한 실적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물론 그의 기업 활동은 불도저식 삽질경제일 뿐이고, 청계천은 '역사를 상품화한 조경사업'일 뿐이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그에 비해 국내 최대의 친환경 자연식품회사 풀무원을 창립한 것부터가 친환경과 소비자 주권 시대를 내다본 혜안이라는 지적이다. 또 민선시장을 두 번 하는 동안 '문화의 도시 부천'을 만들었다. 96년에는 사재 20억원을 털어 장학재단을 설립해 수많은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소리없이 실천해왔다.

 

수권정당 면모 갖춰 '킹 메이커' 역할하겠다?

 

정치인은 대개 3선 이후부터는 새로운 정치적 진로를 모색한다. 그의 정치적 진로가 궁금하기도 하지만 3선 의원에게는 물어보는 것이 일종의 '예의'다. 그는 일단, 3선이 아니라 '5선'이라고 응대했다.

 

- 3선 정치인으로서 이후 정치적 진로에 대해서는 어떻게 준비하고 있나. 경기지사에 도전하나.

"저는 국회의원은 3선이지만 (부천 시장 재선을 포함해) 5선이다. 경기도나 부천시 일이나 생활정치, 자치행정이라는 점에서 같은 것으로 본다. 시장 때 보람 있게 일을 했는데 같은 성격의 일을 또 할 필요가 있는지 회의적이다. 17대 총선 때 열린우리당이 어려운 상황이어서 시장을 중도사퇴하고 총선에 나섰을 때 시민들이 이해를 해주셨는데, 이번에 또 그렇게 하는 것은 큰 부담이다.

 

민주당이 야당으로서 새롭게 위상을 정립해서 수권정당 면모를 갖추도록 하는 것이 시급하다. 18대 국회에서 야당으로서의 존재가치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토대로 기대받을 수 있는 내용과 형식을 갖도록 하는 데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사실상 야당 역할을 하고 있다는 지적에 "우리로서는 뼈아픈 지적인데, 상당 정도 일리가 있다는 평가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우리가 대안으로서 보다 분명하게 인정받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민주당의 간판과 얼굴(대권주자)이 약하거나 없다는 지적에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대목"이라면서도 "그러나 당내에서 새롭게 평가받는 신진 지도력으로 정세균, 추미애, 송영길, 김부겸 이런 분들도 있다"고 덧붙였다. 민주당과 신진 정치인들이 한나라당과 박근혜 전 대표의 대안으로 국민에게 인정받을 수 있도록 '킹 메이커' 역할을 하겠다는 뜻으로 읽혔다.


태그:#원혜영, #홍준표, #수권정당, #원경선, #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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