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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사내망에 '민필규 게시판'이 생겼다. '민필규'는 KBS 기자협회장 이름.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사건 전말은 이렇다.

 

KBS 사내망에는 보도본부 소속 기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보도정보 게시판'이 있다. 기자협회에서 제안해 설치됐으며 관리도 기협이 맡아왔고, 그동안 줄곧 익명제로 운영되어 왔다. 찬반 투표 기능도 있었다. 기자들에 따르면 이 게시판에는 새 사장 취임 이후 KBS 보도에 대한 불만 섞인 글들이 꽤 올라왔으며 때론 사측을 향한 거친 내용의 항의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난 6일, 이 게시판을 통해 KBS 기자들에게 느닷없는 통보가 내려졌다. '보도정보 게시판 실명제 전환' 방침이었다. KBS 기협에 따르면 사전에 아무런 논의과정도 없었으며 기자협회장에게도 고지되지 않은 상태였다. 찬반 투표기능도 없어졌다.

 

KBS 비판 계속되자 게시판 실명제 전격 전환

 

김종율 KBS 보도본부장은 당일 '익명 게시판의 실명제 전환 공고'라는 글을 통해 "보도게시판은 사내 공지사항을 신속하게 전파하고 취재과정에서 발생한 여러 일들을 함께 논의하기 위한 목적이 있고, 구성원들의 진솔하고 허심탄회한 의견을 듣기 위해 익명제를 유지해 왔다"면서 "그러나 최근 익명에 기댄 비방과 욕설 인권 침해적인 글들이 난무해 편 가르기 장으로 전락했다"고 실명제 전환의 이유를 밝혔다.

 

그는 이어 "본부장 등 간부들은 여러 회의석상 등에서 이의 시정을 촉구했으나 효과가 없었고 오늘 연석회의를 열어 실명제 전환을 결정했다"면서 "자신의 의견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떳떳이 밝히는 풍토가 정착되어 KBS 보도본부가 더욱 발전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갑작스런 통보를 접한 기자들은 대응책을 고민하다가 한 가지 '꾀'를 내었고 곧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잠시 후부터 게시판에 수십명의 '민필규'가 등장해 회사의 조치에 항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자협회장의 아이디와 사번을 이용해 접속, 익명제 폐지에 반대하는 글을 올린 것이다. 익명제 폐지에 반대하는 행동을 또 다른 방식의 익명제를 통해 한 것이다.

 

"인터넷과 집회에서 익명성을 걷어 치우는 게 MB 국정 철학인가 했더니, '국영방송사'로서 그 철학을 공유하고 싶은 건가"

"속 시원히 말한다. 그렇게 찔리는 것이 많은가?"

 

 

게시판 실명제 전환 "이병순 사장이 개입했다"

 

이번 조치에 기자들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기자협회는 회장인 '진짜 민필규'를 중심으로 긴급 운영위원회를 개최해 "이번 조치는 비민주적인 폭거이며 전횡의 극치"라고 반박했다. 기협은 실명제 전환 방침이 철회되지 않는다면 자체 뉴스 모니터 내용을 외부에 공개하며, 오픈 블로그를 통해 시민들과 기자들이 직접 소통하겠다고 밝혔다. 기협은 최근 28명의 기자들로 '뉴스 방송 모니터단'을 결성하고 자사 방송 보도를 모니터링하고 있다.

 

KBS 기자협회는 또한 "이번 조치에 사장이 개입했다는 얘기가 있다"고 주장했다.

 

"간부들의 이번 결정은 유치했다. 미네르바를 잡아넣으면 국민들이 안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번 정권보다 더 유치하다. 간부들의 이번 결정은 후배 기자들에 대한 배신이다. KBS 기자들의 지성을 믿지 못하는 행동이다. 간부들의 이번 결정은 불안감에 대한 자수행위다. 비판 한마디 쓴소리 한마디에도 참을 수 없이 불안해 하고 있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다.

 

이번 결정에 사장이 개입했다는 얘기가 들린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강제 실명제의 배경을 더욱 의심할 수밖에 없다. 자유로운 비판정신이 살아 있고, 우리 뉴스는 물론 정부의 실책까지 날카롭게 비판하는 기자들의 소통공간을 회사가 정책적으로 죽이기에 나섰다는 것이다. 이제는 사측은 내부 비판에 귀닫고, 사원들에게 재갈 물린 채 일방주의로 달리기만 하겠다는 것인가."

 

KBS 보도본부 한 기자는 "실명제 전환을 결정한 회의 개최 시기와 방식 등을 볼 때 본부장 차원의 결정은 아닌 것 같다"면서 "사장 차원의 지시가 있었던 것으로 본다"고 주장했다. 이 기자는 "간혹 게시판을 통해 KBS 보도에 대한 개인의 불만을 여과없이 쏟아내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런 식의 일방적인 조치를 내린 것은 정말 외부에 알려질까봐 창피한 일"이라고 말했다.

 

다른 기자 역시 "일단 사측에서는 내부에서든 외부에서든 KBS를 향한 질타와 지적에 귀를 닫자는 생각인 것 같다"면서 "게시판 익명제 실명제를 떠나 이런 사소한 일조차 큰 일을 만들 정도로 내부 소통과 대화가 단절되어 있다"고 말했다.


태그:#KBS, #이병순, #민필규, #김종률, #김종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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