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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대보름을 하루 앞두고 시장에 다녀왔습니다. 이번 보름에는 아내가 퇴근하면 찰밥도 찜통에 쪄먹고 나물도 볶아먹기로 의견일치를 봤거든요. 해서 장을 보려면 1시간 가까이 걸리는 시내로 나가야 하기 때문에 점심을 일찍 먹고 집을 나섰습니다.

 

재래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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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종안

 

고유의 민속명절과 아름다운 풍속이 사라져가고 있어 안타깝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제가 사는 이곳은 시골이라서 그런지 시내버스 분위기와 시장을 찾는 사람들, 상인들의 표정, 흥정하는 목소리 등에서 대보름 냄새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버스가 시장 근처 정류장에 도착해서 내리는데, 뒷자리에 앉아있던 할머니가 갑자기 “기사 아자씨 잠깐만유, 잠깐만!” 하더니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들며 “아즈메, 아즈메, 그 파 천언어치만 줘유, 빨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차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뭔가 급한 사정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할머니의 다그치는 소리에 노점상 아주머니가 놀란 토끼처럼 벌떡 일어남과 동시에 파를 한 단 집더니 버스 창으로 달려가 건네주고 돈을 받는 모습이 보기 좋았고 웃음도 나왔지만, 미소를 지으며 기다려주는 기사 아저씨에게 마음이 더욱 쏠렸습니다. 서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겼기 때문이지요.

 

한때는 인파로 넘쳤던 구 역전 광장의 오후는 조용하고 차분하면서도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의 손에 쥐어진 장바구니와 발걸음에서 정월 대보름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설 대목 때는 춥고 눈까지 내려서 그런지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고 을씨년스러웠거든요. 

 

시장을 향해 걷는데 30년 넘게 자리를 지키며 구두를 수선해오는 아저씨의 바쁘게 움직이는 손이 부러웠고, 길가에 내놓은 딸기 상자의 ‘삼레 딸기 1깍 4.000원씩’이라는 글귀는 입가에 미소를 짓게 했습니다.

 

재래시장은 먹을거리도 다양하고 푸짐할 뿐 아니라, 웃고 욕하며 떠드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거기에 길을 비키라는 짐꾼들의 고함소리와 손님과 주인이 흥정하는 소리는 삶의 터전임을 말해주고 있지요. 

 

기차가 다닐 때만 해도 매일 새벽 2시면 새벽시장이 서던 군산역 광장은 지금도 오후가 되면 노점상들이 하나 둘 자리를 잡기 시작합니다. 지금도 새벽에 장이 서는지 궁금해서 호떡을 굽는 아주머니에게 물었더니 매일 새벽 6시가 넘으면 새벽시장이 선다고 하더군요.

 

시장을 찾아온 손님과 광장 노인들을 위해 피운 모닥불이 ‘따닥딱’ 소리를 내며 타고 있었는데요. 얼마나 좋은 구경거리가 있으면 따뜻한 불을 마다하고 등을 돌리고 있는지 궁금해서 알아봤더니 열기가 후끈 달아오른 윷놀이 판에 빠져 있었습니다. 

 

 

떡집 아주머니의 넉넉한 인심

 

떡집 앞을 지나가는데 먹음직스러운 인절미와 송편, 그리고 예쁘게 포장한 색색의 경단이 눈길을 끌었고, 향긋한 계피 향이 풍겨올 것 같은 약밥이 군침을 돌게 하면서 발길을 멈추게 했습니다.

 

떡이 하도 맛있게 보여서 들어왔다며 장사는 잘되느냐고 물었더니 떡을 빼던 아주머니가 고개를 들더니 보름에는 떡 주문이 안 들어오니까 괜찮은데 장사가 갈수록 시원찮다며 탄식하자, 옆에 있던 할머니가 “나언동인가 어딘가가 갑재기 이마튼가 먼가가 생겨가꼬 시장 사람들 다 죽게 생겼다고 허드랑게”라면서 거들었습니다. 

 

가게를 나오는데, 아주머니가 “맛은 없지만유 떡 하나만 잡숴보고 가세유”라며 몇 차례 권하기에 떡판에 썰어놓은 인절미를 하나 집어먹고 나왔는데요. 피죽도 나눠 먹었던 순수하고 넉넉한 시골인심을 새롭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 아자씨 홀애빈 개비네”

 

고사리와 도라지, 취나물, 고구마 순, 깻잎은 흔한데 아주까리(피마자) 잎이 보이지 않더군요. 명태와 무를 사들고 찾아다니는데 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에 고개를 돌리니까 아주머니 두 분이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채소와 나물을 펼쳐놓고 누군가와 얘기하는 아주머니에게 다가가 “아주까리 잎 있어요?”하고 물으니까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리다 뒤편에 있는 비닐봉지를 꺼내더니 “에라이, 먹을라고 뒀는디 팔어야겄네, 3천 원 값도 더 되는디 2천 원만 주세유”라고 하기에 얼른 돈을 건넸습니다. 

 

그런데 옆에서 보고 있던 아줌마가 “지사지내고 먹을 놈은 딱 둬서 놨어야지 그게 머여, 팔믄 애들은 어치께 헐라고”라며 핀잔을 주더군요. 그러자 아주머니는 “하이고, 다 먹고 살자고 허는 것인디 어찌간, 파는 것도 먹고 사는 것인디··”라면서 저에게 “안 그려유?”라고 묻기에 “그러쥬, 저도 먹어본 경험이 있어서 사는 겁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신이 나는지 “맞어유, 다 옛날 맛으로 먹는 거쥬, 지금 사람들은 그 맛을 잘 몰라유”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고사리와 취나물 등 나물 이름을 하나하나 대니까 핀잔했던 아줌마가 “저 아자씨 나물 이름을 다 아시는 거 보니께 홀애빈 개비네” 라며 웃기에 저도 홀아비라서 이렇게 혼자 나왔다며 맞장구를 쳤습니다. 웃고 떠들며 얘기를 하다 보니 다른 나물도 그 아주머니에게 사게 되었는데요.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도 생각할수록 웃음이 나왔습니다. 


태그:#대보름, #재래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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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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