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키 조의 <경관의 피>는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시절 일본은 자신들의 상처를 치유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전후 사회가 그렇듯이 대단히 혼란스러웠다. 치안을 담당할 경찰이 부족한 것도 한 이유였다. 그렇기에 지원만 하면 경찰이 되는 일까지 생겼다. 안조 세이지가 경찰이 된 것도 그런 과정을 거쳐서였다.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야 했던 그는 약식의 시험을 보고 경찰이 됐다.
박봉의 월급이었지만 좋은 친구들도 사귀고 어엿한 직장을 얻은 안조 세이지는 거리의 부랑자와 소매치기들, 각종 사기꾼들을 상대하며 서서히 경력을 쌓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주재소에서 근무하게 된다. 주재소 근무란 가족과 함께 그곳에 살면서 파출소에서 출동하지 않은 어떤 업무들을 처리하는 일로 어찌 보면 대단히 안정적인 일이다. 마을 사람들의 작은 싸움이나 이해관계 등을 처리해주는 그런 일이니 위험성이 적었다.
그럼에도 안조 세이지는 의문의 살인사건들을 비밀리에 수사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 연관성은 없는 것 같지만 안도 세이지는 그 사건에 경찰이 관계됐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외면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일은 안조 세이지의 목숨을 앗아간다. 어느 날 밤, 안조 세이지가 육교 아래로 떨어져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안조 세이지의 아들 안조 다미오, 그는 아버지가 근무 중에 사망했음에도 순직 처리는커녕 불명예스럽게 죽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프다. 그가 보기에 아버지는 누구보다 훌륭한 경찰이기에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였을까? 안조 다미오도 경찰이 된다. 아버지처럼 주재사 근무하는 걸 목표로 적군파 등으로 사회가 혼란스러운 그때에 범죄 한복판으로 뛰어든 것이다.
안조 다미오는 뛰어난 경찰이었다. 그것을 안 정부는 그를 스파이로 활용한다. 적군파의 내부에 들어가 적의 정보를 빼내오는 일이다. 어려운 일이었다.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안조 다미오는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그리고 주재사 근무하는 날만을 기다리며 그 일에 성심을 다한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스파이 노릇을 해서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몸이 망신창이가 됐지만 결국 아버지가 있던 그곳에 간다. 2대에 걸쳐 주재사 근무를 하는 것이다.
안조 다미오는 주재사 근무를 하며 아버지가 수사했던 어느 사건에 대해 알게 된다. 그는 아버지의 불명예를 씻기 위해 그 사건을 다시 조사하게 되는데 갑작스럽게 발생한 인질극 때문에 죽게 된다. 2대가 주재사 근무를 하다가 죽은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안조 다미오의 죽음을 확인한 그의 아들 안조 가즈야에게 삼촌은 경찰만은 하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경관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인가. 안조 가즈야 역시 경찰이 된다. 그리고 아버지가 수사했던, 할아버지를 죽게 했던 어느 살인사건을 수사하게 된다. 3대에 걸친 수사인 셈이다.
3대에 걸친 경찰 이야기를 담은 <경관의 피>는 웅장함이 돋보이는 미스터리다. 그들의 행적 하나하나와 그들이 수사하는 사건들이 일본의 굴곡진 역사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안조 세이지는 전후의 상황을, 안조 다미오는 학생운동이 격렬하던 상황을, 안조 가즈야는 경제가 발전하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단지 반영만 하는가? 아니다. 소설은 그것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그렇기에 소설을 읽다 보면 일본이 전쟁을 치유하고 그것을 딛고 일어나는 모습까지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는 매력이 있다.
그러나 <경관의 피>의 진정한 매력은 '경관의 피'로 상징되는 감동이다. 경찰의 아들이 경찰이 되는 건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경찰이라는 직업이 워낙에 고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관의 피>의 아들들은 경찰이 되었고 나아가 아버지들의 명예를 살리기 위해, 그리고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데 그 모습이 가슴을 흔들기에 충분하다.
소설의 마지막, 안조 가즈야는 할아버지가 사용하던 호루라기를 갖고 거대한 사건의 앞에 선다. 누구도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던 범죄를 일망타진하려는 순간이었다. 그 시절 아무도 사용하지 않던 호루라기를 안조 가즈야가 분다. 그러자 어떤 소리가 들려온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호루라기 소리다. 환청인가. 그렇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시민들을 위해 죽을 힘을 다하는 경찰에게 들려오는 그 소리는 소설의 감동을 절정으로 치닫게 해주며 대미를 장식한다.
미스터리적인 요소만 보자면 <경관의 피>는 그 수준이 요즘 소개되는 쟁쟁한 소설들에 비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일본 역사와 맞물려있는, 경관의 피가 흐르는 3대에 걸친 이야기는 그만의 감동으로 그것을 채우고도 남는다. 단지 남을 뿐인가. 또 다른 미스터리의 경지를 보여준다. 일본 추리소설의 대가 미야베 미유키나 히가시노 게이고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런 것이니 오랜만에 추리소설 독자들은 ‘흥분’할 수 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