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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정장 차림을 한 졸업생들은 한결 의젓하고 정숙한 모습이었다. 모두 차례로 단상 위로 올라가 교장 신부님, 교감 선생님, 담임 선생님들과 마지막 인사를 교환했다.
▲ 정장차림의 고교 졸업생들 대부분 정장 차림을 한 졸업생들은 한결 의젓하고 정숙한 모습이었다. 모두 차례로 단상 위로 올라가 교장 신부님, 교감 선생님, 담임 선생님들과 마지막 인사를 교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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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대학교 4학년이 되는 딸아이가 고등학생이던 지난 2003년부터 2005년까지 3년 동안 참 많이도 천안을 왕래했다. 길이 좋아진 덕에 태안에서 천안까지 2시간이면 너끈했지만, 시간 쓰고 비용 쓰고 고생하면서 부모된 죄도 많이 의식했다.

하지만 2006년 2월, 녀석이 3년 동안 자취했던 방에서 물건들을 빼오고, 또 졸업식에 참석하는 일로 천안 왕래를 마무리하면서 바람같이 흘러간 3년 세월을 아쉬워하기도 했다. 고생스럽긴 했지만, 사실은 그 세월이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음을 고백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고생 가운데서도 즐겁고 행복한 그 시간은 2006년부터 곧바로 내게 다시 이어졌다. 이번에는 논산을 왕래하는 일이었다. 아들 녀석이 굳이 논산 D고로 고등학교 진학을 한 탓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2006년부터 2008년까지 3년 동안 참 많이도 논산을 왕래했다. 그리고 어제(13일/금) 마지막 왕래를 했다.

다시 한번 시간의 빠름과 세월의 덧없음을 절감한다. 태안에서 논산까지 2시간 이상이 걸리는 그 먼길 왕래가 여믓 고생스럽긴 했지만, 사실은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음을 다시 고백치 않을 수 없다. 바람같이 흘러간 그 3년 세월이 내게도 이런저런 추억들과 그리움을 안겨주는 것이다.

나는 내 아이들을 내 모교인 지역 고교에 진학시키지 않고 외지로 내보낸 것에 대한 일종의 '자괴감' 같은 것을 늘 안고 산다. 지역에서 이런저런 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그것은 나를 조금은 위축시키는 작용을 하기도 한다.

그것을 지레 의식해서 아이들에게 아빠의 모교에 진학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지만, 아이들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딸아이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천주교 계통 학교인 천안의 B여고 진학을 확고히 마음에 담고 있었고, 아들녀석도 마찬가지였다. 아들녀석은 중학교 1학년 때, 당시 천주교 대전교구장이셨던 경갑룡 요셉 주교님께서 태안성당을 방문하신 자리에서 내게 "아들을 논산 D고로 보내라"고 하신 말씀을 옆에서 들은 순간부터 논산 D고 진학을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

나는 아들녀석을 논산 D고로 진학시키면서 좀더 확실한 '성소(聖召)' 작용을 기대했다. 나이 마흔에 결혼하여 늦게 얻은 하나뿐인 아들이지만, 녀석을 기꺼이 하느님께 바치고픈 마음이었다. 하지만 녀석은 신학교를 지망하지 않고 일반 대학교를 선택했고, 일찌감치 결정이 된 상태다.  

신학교 지원을 진심으로 바랐던 나로서는 적지 않은 아쉬움 가운데서도, 사제 성소에 대한 가능성은 상당 기간 열려 있을 터이므로 계속 기대를 안은 상태로, 일단은 녀석에게 축하를 해주었고, 뒷바라지에 신경을 쓰고 있다.

좀더 확실한 성소 작용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녀석의 논산 D고 진학에 동의했던 나로서는 현재로서는 보람을 얻지 못하여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지난 3년 동안 논산 왕래 덕분에 아들녀석과 많은 추억들을 공유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2시간 이상이 소요되는 논산 왕래 길에서 아들녀석과 많은 대화도 나눌 수 있었다. 아들녀석과 시간을 오래 함께 하고,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사실상 아들녀석을 논산 D고로 진학시킨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하면 그리운 일들이 많다. 지난 3년 동안 논산을 왕래하면서 그 기회를 타서 명승지 구경도 많이 했고, 별로 비싸지 않은 별미 음식들도 여러 번 즐겼다. 내 12인승 승합차를 이용하여 가족이 함께 여행을 즐기기도 했다.

태안에서 논산을 왕래하는데는 대략 네 갈래의 길을 이용할 수 있다. 천수만 제방 길을 밟은 다음 홍성-청양-부여를 통과하는 길이 있고, 서해안고속도로를 이용하여 보령-부여를 통과하는 길이 있고, 서천까지 내려간 다음 논산으로 가는 방법이 있다. 또 서산-예산-공주를 통과하는 방법도 있다.

아들녀석의 고교 졸업식장에 엄마가 빠져 가족 모두의 그림은 만들지 못했지만...
▲ 고교 졸업 축하 아들녀석의 고교 졸업식장에 엄마가 빠져 가족 모두의 그림은 만들지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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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네 갈래의 길을 고루 이용했다. 그래서 공주 계룡산의 갑사, 청양 장승마을, 보령 석탄박물관, 성주사지, 성주계곡, 부여 궁남지, 부여박물관 등을 가족과 함께 구경할 수 있었다. 태안에서 논산 D고로 진학을 한, 내 아들녀석의 후배 학생들도 여럿이어서 그 학생들도 내 차로 태워오고 태워다주고 한 일이 많았다. 때로는 점심값이나 저녁식사 비용이 몇 만원씩 나기도 했지만, 어린 학생들과 식사를 함께 하며 대화를 나누는 일은 각별한 즐거움을 갖게 했다.

학교 급식소에서 식사를 한 적도 여러 번이다. 아침, 점심, 저녁을 고루 먹어보았다. 지난해 병상생활을 마치고 났을 때는 재미있는 일도 있었다. 여름에 학교 급식소에서 아침을 먹은 적이 있는데(새벽에 아들녀석을 태워다주었기에…), 주방에서 일하시는 아줌마들이 내 아들녀석에게 작은 소리로 묻더란다. "혹시 할아버지냐?"고…. "할아버지가 아니고 아빠예요"라는 녀석의 대답에 모두들 깜짝 놀라더라나.

병상생활 탓에 내가 폭삭 늙어서 노인 태가 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병상생활을 하기 전에는 학교 급식소에서 내 아들녀석에게 그런 질문을 한 이가 하나도 없었는데….

3년 동안 아들녀석이 고맙고 대견스럽게 느껴진 일이 많지만, 가장 고마운 일은 지난해 10월 25일 '오체투지 순례'에 기꺼이 참여해 준 일이다. 그때는 녀석이 대학 수능시험을 코앞에 둔 시점이었다. 천주교의 문규현 신부님과 전종훈 신부님(중간에 참여), 불교의 수경 스님이 9월 4일 지리산 노고단을 출발하여 52일째인 10월 25일 충남 논산시 상월면 지경리를 통과할 때, 우리 가족도 하루나마 오체투지 순례에 참여했다. 그때 아들녀석도 학교 교실을 빠져나와 아빠와 엄마, 누나와 함께 두 시간 동안 힘껏 오체투지 기도를 한 것이었다.

지난해 10월 25일, 논산시 상월면 지경리 마을회관 앞에서 점심식사 후 휴식시간을 이용하여 52일째 오체투지 순례를 계속하시는 문규현 신부님과 우리가족이 함께 했다.
▲ 오체투지 25일 오후 순례기도를 시작하기 전 지난해 10월 25일, 논산시 상월면 지경리 마을회관 앞에서 점심식사 후 휴식시간을 이용하여 52일째 오체투지 순례를 계속하시는 문규현 신부님과 우리가족이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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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은 신학교 진학을 원하는 아빠의 뜻을 외면하기는 했지만, 서울 신촌의 Y대학에 수시 합격했다. 같은 신촌의 S대학에 다니는 누나와 함께 생활할 수 있게 되어서, 아빠의 짐을 조금은 덜어준 셈이기도 하다.     

녀석은 대학 수시 합격 소식을 들은 후, 수시에 불합격했거나 수능 성적이 좋지 않은 친구들 얘기를 하며 몹시 안타까워했다. 친구들이 자신을 부러워하는 것도 부담스럽고, 죄지은 것처럼 여간 미안한 게 아니라고 했다. 경쟁에서 이겼음을 즐거워하고 자랑스러워하기보다는 다수 친구들의 처지를 안타까워하고 미안해하는 녀석의 심성을 보면서 아비 마음도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녀석은 어제 졸업식에 가면서 처음으로 양복을 입었다. 양복을 구입할 때 한번 입어보기는 했지만, 정식으로 차림을 한 건 어제가 처음이었다. 넥타이 매는 법도 아빠에게서 배워서 착용을 했다. 구두도 처음 신어보았다. 녀석은 그 정장 차림을 위해 며칠 전에는 서산의 유명한 미장원에 가서 거금 3만원이나 들여 머리 파마도 했다. 녀석의 그런 꼴새를 보시며 어머니는 "에그, 저렇게 모양에 관심이 많으니, 신부님 되기는 다 글은 것 같다"며 탄식(?)을 하셨다.

학교에서는 졸업생들에게 정장차림을 하고 오기를 권했다. 그에 따라 졸업생 대부분이 정장 차림이었다. 한결 의젓하고 정숙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옛날 교복차림으로 졸업식을 할 때는 밀가루 세례도 난무하고 옷을 찢는 행동들이 벌어지기도 했다는데, 정장차림으로 졸업식을 하니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녀석은 친구들 사이에 인기도 많은 것 같았다. 개별적으로 이런저런 상을 받는 졸업생들은 맨 앞자리에 앉았는데, 녀석의 이름이 불려지자 많은 학생들이 여기저기에서 환호를 보내주었다. 그 순간 녀석이 더럭 고마워지는 마음이었다. 졸업식장 안과 밖에서 꽤 많은 학생들이 내게 머리 숙여 인사를 했는데, 연유를 묻는 내게 녀석은 "쟤들 다 아빠의 독자들이에요"라는 말을 했다. 1학년과 2학년 때 내 책을 아이들에게 빌려주어서 많은 아이들이 읽게 했다는 말도 다시 들을 수 있었다.     

졸업식은 오후 2시에 시작되어 3시 30분에 끝났다. 그리고 교실로 가서 30분 정도 담임 선생님과 급우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4시가 넘어서야 빗길을 달려 논산을 떠나올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논산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졸업식 후 교실로 가서 뒷마무리를 한 다음 친구들과 마지막 기념촬영을 했다. 아들녀석은 논산에서 먼 태안에서 사는 관계로 하룻밤을 함께 지내자는 친구들의 요청을 뿌리치는 아쉬움을 안고 와야 했다.
▲ 정든 교실, 마지막 장면 졸업식 후 교실로 가서 뒷마무리를 한 다음 친구들과 마지막 기념촬영을 했다. 아들녀석은 논산에서 먼 태안에서 사는 관계로 하룻밤을 함께 지내자는 친구들의 요청을 뿌리치는 아쉬움을 안고 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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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학생을 시외버스 터미널에 내려주고 논산 시내를 벗어날 때 어머니가 말했다. 어언 간에 겨울방학이 끝나 학교에 출근한 마누라를 대신하여 먼길을 마다 않고 동행해 주신 어머니였다.  

"삼 년 동안 애비 고생이 참 많었네. 나두 두세 번 와본 길이지먼, 이 길이 너무 멀어. 이 먼길을 그렇게 자주 댕겼으니, 그 고생이 얼마랴. 이제 그 고생두 끝났구먼, 그려."

"예, 끝났어요. 고생이 다 끝난 건 아니지먼, 논산을 오가는 건 다 끝났어요. 오늘 이 길이 마지막이에요. 논산을 오고 간 지난 삼 년 세월도 바람같이 지나가 버린 거지요."

"그려. 바람같이 지났어. 그 삼 년 세월도 바람이여. 인생 자체가 바람인디, 그 바람 같은 인생을 사느라구 이렇게 저렇게 아등바등 애들을 쓰구 산다니께."

어머니는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거울 속으로 어머니를 보며, 86세 연세에도 눈이 밝으시고 청력도 좋으신 어머니께 감사하면서도, '바람 같은 인생'이라는 말에 절로 숙연해지는 느낌이었다. 논산을 왕래한 지난 3년 세월도 바람이었음을 실감하며….

지난해 11월 13일 오후 6시 42분, 대입수능시험장인 논산고 교문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시험이야 잘 보았든 못 보았든 시험 후의 해방감이 너무 좋다며, 아들녀석은 김창주 담임 선생님 앞에서 활짝 웃음을 지었다.
▲ 수능시험 후의 해방감 지난해 11월 13일 오후 6시 42분, 대입수능시험장인 논산고 교문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시험이야 잘 보았든 못 보았든 시험 후의 해방감이 너무 좋다며, 아들녀석은 김창주 담임 선생님 앞에서 활짝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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