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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은근히 중독성 있어."

"말이 안 되긴 하지만 재밌어. 대리만족을 느껴."

"좀 억지스럽긴 하지만 통쾌해."

"빨리빨리 진행되니까, 재밌어."

 

SBS <아내의 유혹>을 즐겨보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처럼 이야기했다. 그 많고 많은 사람 중 하다못해 '변우민의 팬이다'라거나 '오영실의 연기가 천연덕스러워서'라는 대답도 기대해봄직 하건만 대답자의 열이면 열, 모두 약속이나 한듯이 이처럼 이야기했다.

 

새삼스런 이야기지만 <아내의 유혹>을 보는 것은 아줌마들만이 아니다. '귀가의 유혹'이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남성 직장인들의 시청률도 무척 높다. 남성뿐 아니라 요즘은 초등학생들까지 <아내의 유혹>에 흠뻑 빠져 있다.

 

"사람이 물에 빠졌는데 어떻게 살아나요? 말도 안 돼."

"민소희는 못하는 게 없잖아요.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다 잘할 수가 있어요? 진짜 말도 안 돼요."

 

얼마 전 만난 초등학교 5학년 조카와 그 친구들의 이야기다. '말도 안 되는데 왜 보느냐'는 질문에 그들은 '재밌으니까요'라는 한마디로 일축해 버렸다. 그들은 KBS <꽃보다 남자>에도 열광하지만 <아내의 유혹>에도 역시 푹 빠져 있었다.

 

<아내의 유혹>에 빠지지 않은 이는 '갓난아기'뿐

 

그렇다. 이유는 단순하다. 재미있기 때문이다. 물론 초등학생들이 드라마 속 구은재(장서희 분)처럼 '이루지 못한 꿈'과 '배신', '희생'과 같은 파란만장하고 쓰디쓴 경험이 있을 턱이 없다. 그저 재미있다는 이유로 <아내의 유혹>을 본다. 다른 이유는 없다. 바야흐로 <아내의 유혹>에 빠지지 않은 사람은 갓난아이들 뿐인가 보다. 

 

일흔다섯을 훨씬 넘긴 시부모님도 <아내의 유혹> 팬이시다. 요즘 이 드라마를 보는 재미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의 마니아 수준이다. 시부모님께 며칠 전 재미있는 질문을 던져보았다.

 

"아버님, 이들 중에서 누가 젤 나쁜 것 같아요?"

"잘못이야 애리가 처음에 했지. 썩을 년이 왜 멀쩡한 남의 집을…."

 

"제 생각엔 교빈이가 젤 나쁜 놈 같은데요?"

"그놈도 나쁜 놈이지. 근데 이제 저년(은재)도 이제 그 정도로 했으면 됐지 싶어. 아휴~징그러워. 징그러워서 볼 수가 없어. 애리가 불쌍혀."

 

"(장난기 발동) 그럼 그만보시지 그러세요?"

"(약간 뜬금없는 표정) 그런데 재밌잖어. 너는 안 보냐?"

 

이번엔 어머님 말씀이시다. 언젠가는 애리(김서형 분)를 무지막지하게 비난하시더니 이젠 되레 애리가 안 됐단다. 은재가 해도 너무한단다. 그러나 이것이 비단 시부모님만 느끼는 건 아닌가 보다.

 

애리가 파산하고 아들 니노와 헤어지는 장면이 방영된 다음날 포털사이트 게시판에는 애리를 동정하는 감상평이 수없이 올라왔다. 애리를 욕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애리를 동정하는 것이다.

 

'말도 안 된다'고 하면서도 흥미진진하게 보고, 막장드라마라고 하면서도 시청률은 40%를 육박한다. 은재의 복수에 통쾌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애리를 동정한다. 이 묘한 심리는 무엇일까.

 

'막장드라마' 비난에 동의하기 싫은 이유

 

예전에도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다. 주인공은 2002년 방송된 일일드라마 <인어아가씨>였다. 그때도 상황은 이와 비슷했다. 욕하면서 보고, 말도 안 된다고 비난하면서도 사람들은 눈길을 떼지 않았다. 그때 나는 첫애를 임신 중이었는데 심지어는 태교에 안 좋으니 보지 말라는 말까지 들었다(물론 나는 끝까지 한편도 빼놓지 않고 열심히 보았다).

 

그때 그런 드라마가 인기를 얻는 이유를 곰곰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 안에 이중적이고 이율배반적인 인물이 출연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바로 그게 나 자신의 모습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처음 <아내의 유혹>을 보는 내 눈길 역시 곱지 않았다. 사실 <아내의 유혹>을 꼬박꼬박 챙겨보는 편도 아니다. 어쩌다 보고난 후에는 '저 드라마 진짜 웃기네. 쟤 진짜 꼴불견이다'라고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리고 스스로 묻는다. '그러면 안 보면 될 거 아냐?' 하지만 궁금하다. 그리고 끌린다. 내 이중성에 그냥 실소만 나올 뿐이다.

 

물론 이 드라마, 조금 억지스럽긴 하다. 그러나 이 드라마가 '막장드라마'라 하여 비난받는 점에는 다소 동의할 수 없다. 그렇다고 그 드라마를 옹호할 생각도 없다. 그렇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 '막장 드라마'라 하여 비난을 받고 있지만 비난만 받는다면 어떻게 40%에 가까운 시청률을 올릴 수 있겠는가.

 

우선 재밌다. 여기에는 한 회만 빠뜨려도 이해불가할 정도의 빠른 전개와 극적인 에피소드, 입체적인 캐릭터 역할이 크다. 그리고 무엇보다 스트레스가 풀린다. 아무리 번듯하고 값비싼 집이라 할지라도 쓰레기통이 없이는 살 수 없듯이, 사람의 감정도 마찬가지다. 평소 배출하고 싶어도 꾹꾹 누르고 있는 질투, 복수, 원망, 열등감, 소외감, 피해의식, 우쭐함, 긴장과 같은 온갖 너저분한 감정을 드라마를 통해 대신 배출하고 있는 것이다.

 

<아내의 유혹>은 잘 만들어진 '감정의 쓰레기통'

 

사람들이 욕하면서 <아내의 유혹>을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내의 유혹>이 감정의 배출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은재의 복수를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고, 통쾌함을 느낀다. 하루아침에 딱한 신세가 된 애리를 보며 동정을 하기도 하고, 그나마 평탄하고 평온한 내 삶과 애리의 삶을 견주어보며 위안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리고는 다음날 아침 직장에서, 학교에서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눈다.

 

"어제 <아내의 유혹> 봤어? 진짜 웃기지 않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정교빈 그게 인간이야? 진짜 말도 안 된다. 민소희 걔는 무슨 지가 하느님이야? 그런 사람이 세상에 어딨냐? 진짜 막가더라. 막 가."

 

그러고는 다시 저녁이 되면 <아내의 유혹>을 보기 위해 텔레비전 앞으로 모여든다. 그 안에 바로 우리의 모습이 있어서 자석처럼 끌리는 것은 아닐까.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이 구은재, 신애리, 정교빈 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은 것은 아닌지.  

 

막장드라마? 요즘 세상이 더 막장 아닌가요?

 

 

인터넷상에서 구은재는 요즘 '구느님'으로 통한다. 마음만 먹으면 하느님처럼 모두 다 할 수 있다는 의미의 '구은재 하느님'을 줄인 것이라고. 이 말에는 작품 중 지나치게 미화된 민소희라는 인물을 약간 비꼬는 뉘앙스도 들어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은연중에 요즘 요지경 세상을 구원해 줄 하느님을 그녀에게서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를 짓밟은 사람에게 복수를 하고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은 것이다. 가진 것 없고 순진하다고 무시당하며 받았던 설움을 보상받고 싶은 것이다. 나를 짓밟은 그 사람에게 단단히 본때를 보여주고 싶은 그 보상심리가 '구느님'이라는 말을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앞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초등학생 조카의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던 중 그들은 끄트머리에 아주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너희들은 그 드라마 그렇게나 재밌어?"

"네. 완전 재밌잖아요."

 

"말도 안 된다면서 왜 재밌는데?"

"말이 안 되니까 재밌죠. 말이 되면 무슨 재미가 있어요. 그리고 뭐, 요즘 우리나라가 더 막장 아닌가요? 현실이 더 장난 아니에요. 드라마보다 더 해요."

 

초등학교 5학년의 눈에도 요즘 세상은 '막장'보다 더한 요지경처럼 보였나 보다.


태그:#아내의 유혹, #막장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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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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