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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호텔의 원래 이름은 강변마을. 이 낭만적인 이름을 바꾼 자 누구인가. 마을 초입에 마을의 해발고도를 알리는 푯말이 서있다.
 라마호텔의 원래 이름은 강변마을. 이 낭만적인 이름을 바꾼 자 누구인가. 마을 초입에 마을의 해발고도를 알리는 푯말이 서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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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건 마을이건 이름을 바꿀 땐 다 이유가 있다

사람이건, 꽃이건, 땅이건, 본래 이름을 버리고 다른 이름을 짓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지금까지 힘겹게 지탱해온 자신의 정체성과 여러 관계에 무시할 수 없는 변화가 왔다는 것을 뜻한다.

랑탕히말을 걷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틀째 밤을 '라마호텔'이란 곳에서 묵는다. 라마호텔은 롯지(히말라야 산간에 있는 여관을 그렇게 부른다) 이름이 아니다. 라마호텔은 지명이다.

카트만두에서 산 지도에는 라마호텔이 해발 2410m에 위치해 있다고 표기돼 있다. 하지만 마을 초입에 있는 간판에는 2420m라고 두껍게 적혀 있다.

한국 같았으면 난리가 날 일이다. 표준고도 하나 통일시키지 못한 정부의 안일함을 질타하는 보도는 흥분한 제보자의 목소리와 함께 높게 전파를 탈 것이다. 만약 지도를 제작한 회사의 잘못이 드러나면 "외국 방문객들이 대한민국을 뭘로 알겠나, 이윤만 좇다가 조국을 망신시킨 천박한 장사치"라는 까칠한 회초리가 신문을 가득 메울 일이다.

하지만 '여기는 네팔'이다. 표준이 되는 기준들은 아직 정교하게 정렬되지 않았고, 거래에서는 정찰가격보다 흥정이 여전히 효과적인 'good price(좋은 가격)'를 결정한다.

그래서 네팔 방문이 잦은 이들은 한국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면-이를테면 직통버스가 출발예정시각을 한참 넘겼지만 기사는 옆 버스 기사와 태평하게 수다를 떨고 있다는 둥- 체념과 자조 섞인 목소리로 "여기는 네팔이잖아"하고 쓰게 웃곤 한다.

하긴 라마호텔의 해발고도가 2410m건 2420m건 그건 별로 중요치 않은 문제일 수 있다. 왜냐면 평균 해수면을 기준으로 산의 높이를 재고 가는 것 자체가 이미 오차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도의 뱅골만을 기준으로 할 때와 중국의 남중국해를 기준으로 할 때가 분명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덧붙여 얘기하면 내가 차고 간 한 이름난 회사의 산악전문시계는 라마호텔의 고도를 2440m라고 우겼다.

히말의 능선마다 이방인이 늘어날수록 함께 늘어난 롯지

라마호텔 가는 길, 어느 능선 구비에 새 룽다가 펄럭이고 있었다.
 라마호텔 가는 길, 어느 능선 구비에 새 룽다가 펄럭이고 있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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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고도보다 더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는 것은 '라마호텔'이라는 지명이다.

라마는 인도신화에 나오는 비슈누신의 일곱 번째 화신이다. 고대 인도에서 미와 윤리의 상징이었던 그는 지금도 민중들에게 높은 존경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신성한 이름인 라마와 자본주의를 가장 잘 드러내는 호텔이라는 단어가 만나 마을의 새로운 이름이 됐다니….

라마호텔의 원래 이름은 '창탕', '강변마을'이란 뜻이란다. 랑탕히말의 만년설은 녹아 흐르며 랑탕계곡을 이루고 마침내 트리슐리 강에 이른다.

랑탕의 유려한 계곡물이 트리슐리강을 향해 아래로 한참 흐르다 슬쩍 거쳐 가는 작고 아름다운 마을이 바로 창탕이다. 창탕은 이름 그대로 강변마을이다.

그런데 어쩌다 사람들은 마을의 모양과 역사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마을이름을 버리게 된 것일까. 강변의 조용한 마을이었던 마을에 어떤 변화가 몰아쳤던 것일까. 강변사람들에게 어떤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던 것일까.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히말라야 여러 산군(山群)에선 트레킹 코스가 한창 개발되었다. 주로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일본과 호주 산악인들에 의해서였다. 트레킹 코스가 개발되면서 전문산악인들만이 띄엄띄엄 지나가던 히말라야 고지능선에, 그 능선에 기댄 산간벽지 마을에 한 무더기의 이방인들이 심심치 않게 지나다니게 됐다.

해발 8000m 이상의 고봉 등정이 목표였던 전문산악인들은 잠잘 곳은 물론 먹을거리까지 포터를 통해 직접 날랐다. 히말의 산간마을 주민들이 그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할 수 있는 것은 감자 따위를 파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트레커(trekker)들은 달랐다. 일주일에서 보름 안팎을 걷기 위해 온 그들에겐 필요한 것이 너무 많았다. 우선 잠자리가 필요했고, 히말의 경외감을 이어줄 낯선 음식이 필요했으며, 찬바람 숭숭 들어오는 허름한 잠자리에서 몸을 녹여줄 '따또 빠니(따뜻한 물)'가 필요했다.

히말의 능선을 찾는 낯선 이방인들이 늘어날수록 히말의 능선마다 걸린 마을에 롯지도 늘어났다. 대부분의 히말리얀들은 살던 집을 개조해 롯지를 만들어 이방인들에게 잠자리와 음식을 팔았다.           

창탕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랑탕히말 트레킹 코스가 개발되면서 열 가구가 채 안 되는 마을의 살림집은 모두 롯지로 변모했다. 비단 바뀐 것은 이뿐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은 보다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하여 마을 이름을 바꾸기로 전격 결정한다.

누가 이 이름을 처음 제안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마을에 롯지를 두 채나 갖고 있는 유지의 아들이 카트만두에 있는 외국인거리 타멜에 가서 놀아보고 제안했을까. 아니면 트레킹 코스를 개발하러 왔던 짓궂은 서양 인사가 동서양을 억지조합한 것일까.

'강변사람'이길 포기하고 '호텔종업원'이 된 주민들

라마호텔에선 십여 가구 남짓 되는 마을주민들이 모두 롯지를 운영하고 있다.
 라마호텔에선 십여 가구 남짓 되는 마을주민들이 모두 롯지를 운영하고 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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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호텔의 원래 이름은 창탕, 강변마을이라는 뜻이다. 사진에서처럼 유려하게 흐르는 랑탕계곡을 끼고있어서 유래한 마을이름이다.
 라마호텔의 원래 이름은 창탕, 강변마을이라는 뜻이다. 사진에서처럼 유려하게 흐르는 랑탕계곡을 끼고있어서 유래한 마을이름이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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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은 '강변사람'이길 포기하고 '라마호텔의 종업원'이길 자청한다. 강변마을(창탕)이라는 본래 이름을 버리고 '라마호텔'을 마을의 새 이름으로 결정한 것이다.

얄팍한 상술로 마을이름마저 바꿔버린 영혼 없는 자들이라고 이들을 욕할 수 있을까. 눈에 보이는 이문 때문에 고귀한 히말의 영혼까지 팔아버렸다고 이들을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눈만 뜨면 세상이 변했다고 일초라도 빨리 변하자며 속도전을 치르는 우리가, 가족의 행복이라는 그럴싸한 포장으로 동료의 해고를 외면하는 우리가, 그들에게만 그 자리에 끝내 머물러 있으라고, 너희만은 순정한 영혼의 마지막 거처가 돼달라고 강요할 수 있을까.

오래된 마을 이름을 바꾼 이는 마을사람들이 아니다. 강변마을을 라마호텔로 바꾼 장본인은 바로 우리다. 경쟁력으로 단련된 오만한 근육이 달콤하게 쉬어갈 우리의 쉼터를, 우리는 우리 안에 짓지 못하고 그들에게서 찾으려 했다. 누굴 탓할 것 없다. 내가 편키 위해 누구도 아닌 내 자신이, 그들이 강변사람이 아닌 호텔 종업원이길 원하지 않았던가.

랑탕계곡을 따라 흐르던 바람이 롯지 창문을 두드린다. 부끄러움조차 몰랐던 무딘 영혼에 찬바람이 분다. 움츠려드는 것이 어디 육신뿐인가. 다시 내 안으로 걸어가는 연습을 시작해야겠다.

랑탕계곡 위를 지나는 다리 위에 오색 타르초가 새색시처럼 나풀거리고 있다.
 랑탕계곡 위를 지나는 다리 위에 오색 타르초가 새색시처럼 나풀거리고 있다.
ⓒ 이주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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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랑탕히말, #네팔, #호텔, #히말라야, #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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