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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와 88만원 세대. 솔직히, 어감에서부터 가난함과 고단함, 그리고 험난한 길 등이 떠오른다. 물론 가난이 꼭 나쁜 걸 의미하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영화의 길과 현실, 88만원 세대의 처지는 '피곤'이라는 말을 연상케 한다.

 

<오마이뉴스>가 창간 9주년 기념으로 마련한 16일 <워낭소리> 상영회에는 약 150여 명의 시민들이 관람했다. 이중 약 30%는 '88만원 세대'라 명명되는 20대 학생들이었다.

 

이날 이충렬 감독과의 대화 시간을 마치며 정윤수 사회자는 "<오마이뉴스>가 걸어 온 9년의 시간은 자본이나 권력으로부터 독립된 길을 가는 독립영화의 길과 같은 게 아니었을까"라고 말했다. 적절한 비유였는지 여부는 각자의 판단에 따라 다르겠지만, 의미 있는 상찬인 것만은 분명했다.

 

<워낭소리> 이충렬 감독 "우리에겐 오늘과 모레만 있다"

 

그렇다면 자본이나 권력으로부터 '독립'을 했다기보다 '외면'을 당한 듯한 88만원 세대는 <워낭소리>를 통해 무엇을 얻었을까. 이날 한 20대 남성은 이충렬 감독에게 "우리들에게 해줄 말이 없냐"고 물었다. 만약 답변자가 일정한 성공이 보장된 상업영화 감독이었다면 쉽게 나오지 않을 질문.

 

"돈이 부족해 <워낭소리> 찍는 내내 고생을 많이 했다"는 이충렬 감독의 대답은 이랬다. 

 

"내가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했는데 결국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게 되더라. 독립PD로 활동하면서 쌀 떨어진 지 오래됐지만 결국 하나만 열심히 파니까 됐다. 성공이 중요하다는 말이 아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오늘 만원 있으면 바로 하고 싶은 것을 한다. 행복은 저축하는 것이 아니라 과소비를 해야 한다. 나에게는 오늘과 모레의 꿈이 있을 뿐 내일은 없다.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하지 말고 멋대로 살자."

 

이 감독의 말대로 "자기 멋대로 살자"는 '깡다구'가 88만원 세대에게 있을까. 그리고 누구도 쉽게 예상하지 못한 <워낭소리>의 성공에서 그들은 희망을 발견했을까. 영화가 끝난 늦은 밤 11시 대학생 네 명과 함께 순대국밥집과 호프집에서 <워낭소리>에 대한 뒷담화를 나눠봤다. 참고로 이들은 최근 <오마이뉴스>에서 인턴을 했던 대학생들이다.

 

소와 늙은 부부, 그리고 농촌의 모습이 담긴 <워낭소리>는 그 모든 것들을 거의 접해보지 않은 20대 대학생들의 가슴을 흔든 듯했다. 모두들 좋은 영화라고 평가하며, 감동을 이야기했다.

 

김환(25)씨는 "절뚝거리며 걷는 할아버지와 늙은 소의 동행을 최고의 장면"으로 꼽았고, 김하진(24)씨는 "소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늙은 부부의 모습이 가슴에 남는다"고 했다. 김태헌(28)씨는 "부모님과 함께 할머니 할아버지를 생각나게 하는 작품"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나영(25)씨는 "오래되고 늙어가는 것들을 생각해 본 시간이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생을 건 작업? 88만원 세대는 주저한다

 

이렇듯 <워낭소리>의 파장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감독이 한 말을 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영화와 마찬가지로 감동? 그리고 깜짝 놀라게 하는 충격? 솔직히 이들의 이야기는 이런 것들과 거리가 있었다. 김환씨의 말이다.

 

"좋은 말인 건 확실하다. 하지만 이충렬 감독의 말은 현재 본인이 성공을 했기 때문에 가능한 말이 아닐까. 솔직히 결과론적인 말로 들렸다. 물론 나도 그렇게 도전하고 싶다. 하지만 현실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다."

 

김태헌씨는 "굳이 이충렬 감독의 말이 아니어도 그런 걸 생각해 보면 자기 생을 건 도박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고 했다. 김하진씨 역시 "좋은 말이긴 한데, 내가 직접 그렇게 실천하기에는..."이라며 말을 흐렸다.

 

이나영씨 역시 "좋은 말이지만, 현실적인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이런 저런 영화 이야기로 밝았던 분위기는 다소 침울해졌다. 조용히 맥주를 들이키는 시간이 길어졌다.

 

이후 몇몇 선배들의 '지루한' 연설과 충고가 이어졌지만, 이 감독의 메시지가 그의 작품처럼 파장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좀더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누구의 말대로 "88만원 세대가 겪고 있는 현실은 위 선배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할 만큼 크고 무거운 것"인지도 모른다.

 

또 이들은 <워낭소리>의 성공은 예외적 현상이고, 실제로는 독립영화를 접하는 일이 무척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나영씨는 "쉽게 만날 수 없는 영화이니 왠지 어려운 영화, 혹은 재미없는 영화라는 선입견을 들게 한다"고 말했다. 김하진씨는 "어느 때는 '공부를 하고 봐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고 밝혔다. 이어 김태헌씨는 "독립영화와 상업영화의 기준이 모호한 듯하다"며 "굳이 그렇게 명확하게 구분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지적했다.

 

"<워낭소리>와 이명박 대통령의 만남, 그렇게 나쁜가?"

 

이명박 대통령의 갑작스런 <워낭소리> 관람과 이충렬 감독의 '접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이들은 대체로 이충렬 감독과 이명박 대통령의 만남에 관대했다. 몇몇 선배들은 "이충렬 감독이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지 않는 게 독립영화에 보탬이 됐을 것"이라고 밝혔지만 이들의 생각은 유연(?)했다.

 

이나영씨는 "이명박 대통령이 영화를 보고, 이충렬 감독이 대통령을 만나는 게 그렇게 나쁜 일인가"라며 "독립영화가 많은 사람들에게는 생소한데, 대통령을 통해 대중성이 더욱 확보되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김하진씨는 "이충렬 감독도 고민이 됐겠지만, 만남을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 있지 않았겠느냐"고 밝혔다.

 

술자리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직장이 있는 선배는 일찍 집에 가자고 했지만, 이들은 더 오래 있자고 했다. 술이 좋아서? 유감스럽지만 그게 아니었다. 이들은 택시 할증이 끝날 때 나가자고 했다.

 

우직한 소와 그에 못지않게 우직한 할아버지의 삶이 녹아 있는 독립영화 <워낭소리>의 성공은 우리 사회에서 일반적 현상이 아니다. 10년 동안 작업해서 힘겹게 내놓은 이 영화를 통해 88만원 세대는 아직 특별한 교훈 같은 걸 얻은 것 같지는 않다. 이들이 감흥을 얻기 에는 <워낭소리>의 성공은 너무 이례적인 듯하다.

 

김태헌씨는 "독립적인 길을 가는 것, 그리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적어도 도박 하는 느낌이 들어선 안되지 않느냐"고 말했다.


태그:#워낭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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