ㄱ. 능률적으로 처리해야
.. 일 자체는 특별한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성격상 한꺼번에 쇄도하기 때문에 능률적으로 처리해야 한다 .. 《조지 오웰/권자인 옮김-하얀구름 외길》(행림각,1990) 93쪽
“일 자체(自體)는 특별(特別)한 변화(變化)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은 “일은 딱히 달라지지 않았지만”이나 “일은 그다지 바뀌지 않았지만”으로 다듬습니다. ‘성격상(性格上)’은 ‘워낙’으로 손보고, ‘쇄도(殺到)하기’는 ‘몰려들기’나 ‘쏟아지기’로 손보며, ‘처리(處理)해야’는 ‘다뤄야’나 ‘해내야’로 손봅니다.
┌ 능률적(能率的) : 능률을 많이 내거나 능률이 많이 나는
│ - 능률적 생산 / 능률적인 경영 / 능률적으로 일하다
├ 능률(能率) : 일정한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의 비율
│ - 능률을 올리다 / 능률을 높이다 / 능률이 낮다
│
├ 능률적으로 처리해야 한다
│→ 제때제때 해내야 한다
│→ 바지런히 해야 한다
│→ 부지런히 해야 한다
└ …
한꺼번에 쏟아지는 일을 빠짐없이 해내야 한다면, 알뜰히 해내기도 해야 하지만, 빈틈없이 해내야 합니다. 이렇게 하자면 ‘바지런해야’ 합니다. 굼뜨거나 게을러서는 이런 일을 치러내지 못해요.
┌ 능률적 생산 → 많이 만들어 내기
├ 능률적인 경영 → 알뜰히 꾸리기
└ 능률적으로 일하다 → 부지런히 일하다 / 잘 일하다
으레 회사나 공장에서 ‘능률’을 이야기하곤 합니다. 그렇지만 ‘능률’이 또렷하게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능률을 높이라고는 말해도 ‘능률’이 어떻게 해야 하는 일인지 콕 집어내지 못합니다.
우리가 쓰는 숱한 한자말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쓸모와 쓰임새를 살피면서 빚어낸 낱말이 아니라, 일본이 우리를 식민지로 삼을 무렵부터 들여와 쓰게 된 낱말이라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냥저냥 쓰는 낱말입니다. 한자말을 쓰고 싶으면 쓰고, 쓰고 싶지 않으면 안 쓰면 될 노릇이지만, 우리들은 때와 곳에 알맞춤하게 어떤 낱말을 넣으면 되는지를 거의 헤아리지 않아요. 그저 대충대충입니다. 말도 대충, 생각도 대충, 넋도 대충, 일도 대충, 놀이도 대충, 게다가 삶마저 대충입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지 않고 대학입학 시험을 치르는 우리들 아닙니까. 자기가 앞으로 할 일이 대학교에서 무엇인가 더 배워야 하는 일인지, 다른 데에서 익혀야 하는지, 일찌감치 사회에 뛰어들어야 하는 일인지 가누지 못해요. 아이들을 낳아 기르는 어버이 스스로도 가누지 못합니다. 그냥 물결에 휩쓸려 보냅니다. 제도권 학교에서 교과서 지식에 빠져 허우적거리도록 내팽개칠 뿐입니다.
우리가 우리 삶을 우리 손으로 단단하게 붙잡는다면, 우리가 늘 쓰는 말과 글이 엉터리로 뒤죽박죽이 되거나 형편없이 나뒹굴지 않습니다. 단단한 삶에는 단단한 생각이요 단단한 말입니다. 물러터진 삶에는 물러터진 생각이요 물러터진 말입니다. 흐리멍덩한 삶에는 흐리멍덩한 생각이요 흐리멍덩한 말입니다. 뒤죽박죽 삶이기에 뒤죽박죽 생각에다가 뒤죽박죽 말입니다.
사랑과 믿음이 가득한 삶이라면 사랑과 믿음이 가득한 생각이면서 사랑과 믿음이 가득한 말이 됩니다. 따뜻한 삶으로 꾸리고 있으면 따뜻한 생각이 넘실대면서 따뜻한 말이 쏟아집니다. 살아가는 대로 생각하고, 생각하는 대로 말하게 됩니다. 삶을 추스르고 생각을 가다듬어야 말을 북돋울 수 있습니다.
ㄴ. 능률적으로 지배하려면
.. 식민지 인민의 정서를 모아 능률적으로 지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 《이이화-한국사 나는 이렇게 본다》(길,2005) 54쪽
“식민지 인민(人民)의 정서(情緖)”는 “식민지 사람들 마음”으로 손봅니다. ‘지배(支配)하려는’은 ‘다스리려는’이나 ‘휘어잡으려는’으로 다듬고, ‘의도(意圖)’는 ‘뜻’이나 ‘생각’으로 다듬습니다.
┌ 능률적으로 지배하려는 의도
│
│→ 수월하게 다스리려는 뜻
│→ 손쉽게 휘어잡겠다는 생각
│→ 어렵잖이 다스리려는 뜻
│→ 어려움 없이 휘어잡겠다는 생각
└ …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총독부 이름을 ‘조선’총독부라고 붙이면서, 식민지 종살이를 해야 한 우리들은 ‘조선’이라는 낱말에 익숙해지게 되거나 무디게 된다는 이야기를 펼치는 대목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우리네 정치꾼들이 정당이름으로 삼는 ‘한나라’나 ‘열린우리’나 ‘자유민주’나 ‘공화’나 ‘민주’나 ‘민주정의’ 같은 이름이 한낱 부질없는 겉발림과 같지만, 우리 스스로 ‘한나라’가 무엇이고 ‘열린우리’가 무엇이며 ‘자유민주’가 무엇이고 ‘공화’가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노릇을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낱말을 낱말뜻 그대로 쓰지 않고 거짓스레 쓰거나 얄궂게 쓰면서, 우리 스스로 자유를 버리고 민주를 잊고 정의와는 동떨어지게 되고 마는구나 싶기도 합니다.
1950년대 ‘자유’당 사람들이 이 나라 어느 누구한테 ‘자유’를 베풀었습니까. 1960∼70년대 ‘공화’당 사람들이 ‘다 함께 아름다운’ 세상을 베풀었나요. 민주나 정의하고는 동떨어진 군사독재자 전두환과 노태우는 ‘민주정의’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억누르고 죽이고 괴롭히고 검은돈을 빼돌렸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들 가운데 이 무서움을 느끼는 사람은 몹시 드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몹시 무섭고 두렵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이런 이름이 우리 스스로를 얼마나 갉아먹고 있는가를 못 느끼게 되며 생각과 말과 삶 모두 두동지거나 엇나가게 될 수 있음을 생각하며 걱정이 되고 근심이 됩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한나라’라는 이름은 아주 훌륭하여, 지난날 《뿌리깊은 나무》라는 잡지를 펴내던 한창기 님은, 1980년에 쓴 어느 글에서, 우리 나라 이름은 ‘대한민국’이 아닌 ‘한나라’로 고쳐야 한다고 외치기도 했습니다. 남녘과 북녘이 어깨동무하며 하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겼던 이 ‘한나라’를 정당이름으로 쓰시는 분들은, 당신들 정당이름에 얽히고 맺힌 이야기를 얼마나 깊이깊이 되새기고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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