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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작품들 느티나무로 탄생된 작품들.
각자의 작품들느티나무로 탄생된 작품들. ⓒ 김재경

안양시 호계동2동 육교 앞에는 느티나무 식당이 있고, 느티나무 버스정거장이 있다. 필자는 왜 이곳을 느티나무라고 부르는지 적잖이 궁금했었다. 취재차 호계2동을 방문, 최명복 동장의 안내로 한 식당에 들어서며 그 궁금증을 풀 수 있었다.

식당지하에서 열린 조각교실에서 만난 김수선 작가는, 맑고 쩌렁쩌렁한 음색으로 보아 영락없는 성악가처럼 보였다. 작가는 중학 시절 공예가로 미국에 거주하는 사촌형을 보며, 군 제대 후 목공예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공예에서도 최고로 치는 옻칠을 배우면서 현대에 접목 시키면 좋겠다는 꿈을 늘 갖고 있었다.

80년대 초 서울의 작업장이 좁았던 터라 예술 방면으로 앞서가는 안양으로 이주했느데, 그때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 고사된 채 방치되어 있던 수령 250년 된 느티나무였다. 이 위풍당당한 느티나무가 햇볕이 쨍쨍한 여름에는 주민들에게 그늘이 되어 오순도순 정담을 나누는 쉼터가 되었고, 가슴 답답한 일이 생기면 치성을 드리는 신성한 터전이  되었다.

하지만 90년대 산업도로가 뚫리면서 이 나무는 애물단지처럼 구설수에 휘말리게 되었다. 곧게 뻗어야 할 도로는 이 느티나무를 피해 도로를 확장해야 되는 시점에서, 왈가불가 말 많고 탈도 많은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나무뿌리 나무뿌리가 작품이 되다.
나무뿌리나무뿌리가 작품이 되다. ⓒ 김재경

원주민 김모씨는 “도로 안에 서 있던 이 느티나무의 무성한 잎은 상가 간판을 가리는 것은 물론, 차량들이 질주하다가 갑자기 이 나무를 들이받는 교통사고 다발지역이 되었다”고 술회한다.

한때는 마을의 수호신에서 애물단지가 된 느티나무는 주민들의 외면 속에서 점점 말라 죽어갔다. 죽은 채 한동안 도로에 방치되어 있던 이 느티나무를 마을 어르신들은 그대로 놔두길 원했고, 시에서는 경수산업도로를 일직선으로 내야한다고 주장했다.

완강하게 시와 맞서 온 동네 어르신들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지만, 마을 수호신이었던 이 나무를 의미 있게 보존하고 싶은 마음에서 김수선 작가에게 기증하게 되었다.

작업 중인 작가 작업 중인 작가
작업 중인 작가작업 중인 작가 ⓒ 김재경
이주해오면서 엄청 욕심이 생겼던 터라 작가는 첫 작품부터 끝 작품까지 나무의 특성에 따라 부분별로 분야별로 작업을 해나갔다. 인척이나 다른 작가들이 느티나무 한 토막만 달라고 애원했지만, 느티나무의 부활을 위해 일언지하에 거절 했다고.

이 느티나무는 작가의 투박한 손을 통해 영롱한 문향을 고스란히 간직한 32점의 작품으로 부활할 수 있었다. 그는 안양시의 자랑이자 호계동의 역사인 느티나무 공예를 12년의 인고 끝에 탄생시켰지만, 온전히 보존할 공간이 없어서 안양 문화원을 찾았다.

문화원에서는 “전시하고 싶어도 살아있거나 죽어서 제를 지낸다면 몰라도, 이미 작품으로 만들어졌으니 지원할 방법이 없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작가는 “전남 광주에서는 200년도 안 된 느티나무 뿌리형상 작품을 보존하고 있는데, 우린 더 좋은 나무를 현대와 접목 시키는 것이 이렇게도 힘드네요”라며 못내 아쉬운 표정이다.

느티나무가 서 있던 육교아래를 손으로 지목하는, 김수선 작가의 얼굴에도 느티나무 그늘이 가득 드리워져 있었다.


#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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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 인간 냄새나는 진솔한 삶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현재,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원이며 (사) 한국편지가족 회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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