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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화요일에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서울동지방의 지방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물론 그 지방회는 서울강동지방회가 새롭게 탄생되는 날이기도 했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회에서는 이미 총회장의 이름으로 된 공문을 통해 두 지방회가 분리된다는 사실을 통보해 왔고, 그 회의를 통해 총회 대의원을 선출해야 한다는 사실을 회의 순서에 포함시켜 놓았다.

 

그날 오전 9시에 시작된 개회 예배를 비롯해 회순 통과는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그런데 회의 법대로 의사 진행을 하려던 지방회장과는 달리 몇 몇 연륜을 갖춘 목사들이 뜻밖의 상황을 연출해 가고 있었다. 그것은 이전의 한 지붕에서 두 지방회로 분리될 바에야, 법과 절차를 따라서 대의원을 선출할 게 아니라 차라리 서로 포옹하며 아름답게 헤어진 후에, 각자의 지방회에서 대의원을 선출하자는 의견이었다. 그 뜻에 대부분의 목사와 장로들이 박수로 화답했고, 모두가 함께 일어나서 악수하며 헤어질 수 있었다.

 

생각할수록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날 회의에 참석한 여러 대의원들도 느낀 바였지만, 의사 진행을 주관하고 있던 회장의 견해와 여러 목회자들의 견해가 처음부터 일치한 것은 아니었다. 회장은 법과 절차를 주장했고, 경륜이 많은 목회자들은 초법적인 용서와 사랑으로 해결할 것을 주문했다. 결국 의사진행을 하던 회장의 아량으로 법과 절차를 뛰어 넘는 화해의 장이 열릴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은 누구든지 주어진 자리가 크면 클수록 대단한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된다. 더군다나 그것이 한 기관의 대표이거나 한 나라의 수장이라면, 그것을 통해 자기 자신의 권력을 더 확대해 나가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일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자리가 되었든지 간에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를 용서와 사랑의 자리, 빛과 소금의 자리로 삼는다면 이 땅의 많은 사람들에게 추앙 받게 될 것이다.

 

지난 20일에는 향년 87세로 선종(善終)한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미사가 서울 명동성당에서 치러졌다. 16일부터 김수환 추기경의 빈소를 찾은 조문객 수가 40만 명에 달했으며, 장례미사 당일에는 명동성당 안팎에서 무려 1만여 명이 넘는 추모인파가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와 같이 많은 조문객과 추모인파가 몰려든 이유가 무엇일까?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47세라는 최연소 나이로 추기경의 서품을 받았기 때문일까? 우리나라 70년대와 80년대의 군부독재 시절, 정권에 휩쓸리지 않고 시대의 양심으로 국민들의 심장에 깊이 각인돼 있는 까닭일까? 더욱이 임종하기 직전에 서약한 안구기증을 통해 앞을 보지 못한 70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새로운 빛을 보았다는 사실 때문일까?

 

그런 일들도 분명 그 분이 추앙받을만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내용들은 대부분 언론에서 대서특필하는 부분이고, 진정으로 그 분이 존경받는 이유는 더 깊은 삶에 있지 않겠나 싶다.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란 책에서 밝힌바  있듯이, 성직생활 52년 중 가장 행복했다던 안동 본당의 재임신부로 살던 그 시절의 삶이 그것이다.

 

그 시절 김수환 신부는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안동주민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뛰어다녔다. 그러던 터에 부산에 내려가 안 제오르지오 당시 미국 주교회의 구호사업 한국지부장을 통해 2천 만 원이 든 봉투와 함께 대구에 있는 최덕홍 주교에게 전해 달라는 편지 한통을 받게 된다. 최덕홍 주교는 김수환 신부에게 2천 만 원 중에서 얼마를 받아가겠냐고 물었다. 김수한 신부는 주시는 대로 그저 받겠다고 대답했다. 최덕홍 주교는 그 중 절반을 떼어 김수환 신부에게 건넸고, 기쁨에 젖은 김수환 신부는 단번에 기차를 타고 돌아왔다.

 

그렇지만 김수한 신부의 생각에 무작정 안동 사람들에게 돈을 나누어 주는 게 옳은 방법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성전 보수 공사를 품삯으로 하는 돈을 나누어 주기로 결정했다. 일할 능력이 되지 않는 사람들은 고해성사실로 따로 불러서 집안형편과 생업수단, 그리고 농사평수 등을 꼬치꼬치 캐물은 뒤에 형편에 따라 현금을 나누어주기도 했다. 물론 그런 당부도 빠트리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는 비밀이 지켜져야 하는 고해방입니다. 여기서 돈 받은 얘기를 밖에 나가서 하면 절대 안 됩니다."

 

그 시절 김수환 신부가 엮어 나간 안동 본당과 고해성사실의 자리를 바라보았을 때, 문뜩 중세 가톨릭 신부들의 모습이 겹쳐졌다. 중세 가톨릭 신부들이 사람들을 고해실로 불러들여 고액의 면죄부를 판매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를 재정 창고와 권력의 보고로 만들었던 셈이다. 그에 비해 김수환 추기경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를 빛과 소금의 자리로 엮어 나갔으니,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큰 빛으로 추앙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싶다.

 

그렇기에 성인(聖人) 김수환 추기경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는 이 땅의 사람들이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자리를 용서와 화해의 자리로, 빛과 소금의 자리로 엮어 나가는 것 보다 더 중한 일도 없을 것이다. 그것만이 성인 김수환 추기경을 말로만 추앙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추앙하는 일일테니까.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김수환 지음, 사람과사람(1999)


태그:#김수환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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