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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수분 : 재물이 계속 나오는 보물단지. 그 안에 온갖 물건을 담아 두면 끝없이 새끼를 쳐 그 내용물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설화상의 단지를 이른다.

화수분이라는 게 있다면… 재물이 계속 나오는 보물 단지라고는 하지만, 굳이 재물이 아니더라도 원하는 걸 계속 얻을 수 있다면… 지금 현재 체스에 푹 빠져 체스를 시험 공부하듯 공부하는 친구는 생활비로 쓸 돈이나 계속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테고, 5년을 끌어온 짝사랑을 결국 끝내 버린 후배는, 그 사람의 사랑이 끊임없이 샘솟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러면 나는, 나는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만병 통치약 같은 게 딱 한 병만 나왔으면 좋겠다.

직장을 다니지 않다 보니, 끼니를 매일 집에서 챙겨 먹게 된다. 집에서 매 끼니를 먹는 일이란… 얼마 전 배우 최민수씨가 "최민수, 죄민수… 그리고 소문" 에서 했던 인터뷰가 생각난다. 매일 세 끼를 챙겨 먹자면 하루 종일 밥만 먹다 하루 다 보내게 된다고. 그러게나 말이다. 그래서 나는 집에 있을 때는 두 끼만 먹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 두 끼도 만만치가 않다. 밥을 하고, 국을 끓이고, 반찬을 만들고, 먹고, 뒷정리하고, 설거지하고, 식탁 닦고 싱크대 닦고. 먹고 치우고 먹고 치우고,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린다.  그게 하루 두 번이니 네 시간을 밥 먹느라 보내는 셈이다.

그러나 나는 그 시간을 단축 시킬 수 있는 보물단지가 있으니, 냉동실을 가득 채운 각종 음식들과 냉장실에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빨간 김치통. 

간식으로 먹는 떡
 간식으로 먹는 떡
ⓒ 이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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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밥 먹을 준비를 하면서, 냉동실 문을 열었다. 오늘은 어떤 생선을 꺼내서 먹을 건지, 어떤 떡을 꺼내서 간식으로 먹을 건지, 뿌듯한 눈길로 냉동실을 훑었다. 언제나 가득 채워져 있을 것 같은 냉동실. 그 때 문득 나는 냉동실이 화수분이라고 생각했다. 내 화수분. 꺼내도 꺼내도 채워지는 내 화수분, 내 끼니를 책임지는 화수분. 그리고 그 화수분을 채워 주는 엄마.

명절이 지나고 어느 날 내가 자주 찾는 어느 게시판에서, 명절 음식이 쳐다보기도 싫다는 글을 읽었다. 명절 지나고 나서 먹는 전은 맛도 없을 뿐더러, 정작 부모님이 싸주셔서 집에 가지고 오긴 해도 냉동실에서 몇 개월을 잠자고 있다 결국 음식쓰레기 통으로 들어간다는 글이었다. 나는 놀랍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다. 버려지는 명절 음식, 나는 잘 먹을 수 있는데 생각하면서. 나는 설이든 추석이든, 언제나 두 손 가득, 여행가방이 터질 정도로 가득 먹을 거리를 챙겨온다. 엄마가 싸주신 전을 냉동실에 넣어 두었다가 끼니 때마다 조금씩 꺼내서 데워 먹는 그 맛을 왜 다른 사람들은 못 느낄까. 

고구마 전 데워 먹기
 고구마 전 데워 먹기
ⓒ 이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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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냉동실 문을 연다. 놔둘 곳이 없어 냉동실 문짝에 아슬아슬 놔두었던 곶감이 하나 남아 있다. 곶감 반 상자를 가지고 왔었는데, 하나 남았다. 아쉬운 마음으로 곶감을 꺼낸다. 한 입 베어문다. 오동통한 곶감은 언제나처럼 달달하다. 곶감을 빼낸 문짝 자리가 휑하다. 화수분 같았던 냉동실이 비어간다. 뭐 하나 비집고 넣을 자리가 없어 냉동실에 터줏대감처럼 자리잡고 있던 고춧가루까지 냉장실로 옮겼건만, 이제 다시 냉동실에 자리가 났다.

설이 지난 지 어느덧 한 달이나 흘렀다. 공기 들어가면 눅눅해 진다고 꼭 묶어두라고 엄마가 신신당부를 했던 강정도 이제 다 먹어간다. 먹는 음식 오래 놔둬서 좋을 일 없기에 빨리 먹어야 한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줄어드는 강정이 아쉽다. 까만 콩을 튀겨서 간식으로 먹든지, 간장에 조려서 먹든지 하라고 엄마가 보내준 걸 보고, '까만 콩 강정에 넣으면 좋겠다'라고 무심코 한 마디 내뱉었는데. 올 설에 집에 가보니 강정에 예년과는 달리 까만 콩이 박혀 있었다.  

까만콩이 들어간 강정
 까만콩이 들어간 강정
ⓒ 이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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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에는 냉동실에서 생선 두 마리와 시래기를 꺼냈다. 집에서 가지고 온 된장을 잘 풀고 엄마가 기르신 청양고추도 조금 썰어 넣어 된장국을 끓였다. 그리고 엄마가 사서 보내주신 이름 모를 생선을 구었다. 아빠는 분명 엄마 옆에서 '서울엔 생선도 안 파나?' 하셨을 거다.

생선구이와 시래기 된장국
 생선구이와 시래기 된장국
ⓒ 이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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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동실이 비어간다. 오늘은 쑥떡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돌려 아침으로 먹고, 강정을 간식으로 먹었다. 잘게 썰어 얼려 둔 버섯과 애호박, 청양고추를 역시나 얼려 둔 청국장에 넣어 찌개를 끓이고, 얼려둔 갈치를 꺼내 찌개를 해먹거나 구워 먹고, 찹쌀떡을 꺼내 간단한 끼니나 간식으로 먹고, 그러다 보면 냉동실이 다 비워질 것 같다.

그러나 내게는 화수분이 있다. 비어가는 냉동실을 새로운 먹을 거리로 가득 채워 줄 화수분, 엄마. 엄마는 '엄마, 김치가 떨어졌어, 엄마, 집에 냉동실에 있는 떡 좀 보내줘'라는 내 전화를 반갑게 받아주실 거다.

화수분 엄마가, 오늘 대장에 혹을 떼내는 수술을 하시고는 병원에 누어 계시다. 엄마는 금식이라서 밥을 드시지 못한다. 엄마는 전화한 내게 '저녁은 먹었나'라고 물으셨다. 아픈 동생은 집에서 혼자 밥을 먹었을 테다. 나는 식구들과 떨어져 여기서 혼자 무엇을 하고 있나 생각이 들어 갑자기 우울해진다. 나는 엄마에게, 그리고 우리 식구들에게 무엇을 끊임없이 퍼내는 화수분이 되어야 하는 걸까.   


태그:#엄마,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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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만큼 남아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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