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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복날의 손수레 1

 

일을 해도 힘들고, 책상머리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힘들고, 누워 있어도 힘든 말복날. 어제도 더웠지만 오늘은 더 덥다.

 

안방 창문, 작은 방에 붙어 있는 베란다 창문, 작업실 창문, 이렇게 밖으로 통하는 창문이란 창문은 다 열어 놓았지만 20평형 실내로는 바람 한 줄기 들어와 주지 않는다.

 

선호는 PC 몸체 위에 놓여 있는 'THE ONE' 담배를 한 대 빼어 물었다. 웬일인지 골초 습관에서 자연스럽게 벗어난 상태이기 때문에 담배를 일부러 사는 일은 없지만, 며칠 전에 만났던 술친구 박정호가 어느 술자리에서 한 갑 사다 주었기 때문에 거의 한 갑 그대로인 채 남아 있었다.

 

선호는 박정호와 함께 갔던 실내 포장마차 '서민(庶民)'에서 받아 온 중국산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한국산 라이터보다 중국산 라이터가 싸기 때문에 그 집에서는 하는 수 없이 술집 선전용으로 중국산을 맞춰 쓰고 있었다.

 

선호는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입주할 때부터 천장에 설치되어 있는 대형 선풍기가 흔들거리며 돌아가고 있었다. 2단으로 놓아서는 바람이 느껴지지도 않고, 3단으로 조정해 놓으면 갑자기 떨어질 것처럼 흔들흔들 돌아가면서 불안감을 주었다.

 

"저놈이 바쁘게 돌아가다가 떨어지면 내 머리가 부서지겠지. 차라리 올려다보지 말자. 얼굴이 부서지는 것보다는 뒤통수가 부서지는 게 나을 테니까."

 

선호는 중얼거렸다. 집 안에는 자기 말고 아무도 없었지만, 누군가에게 투덜거리며 말하듯이 입 밖으로 중얼거리는 게 버릇이 되어 버렸다.

 

선풍기는 두 대 있었지만, 스트레스를 받을 때 화풀이를 한다고 모두 발길로 걷어차서 프로펠러가 부러지는 등 고장이 났기 때문에 작동할 수가 없었다.

 

선호는 지난밤 내내 책꽂이와 박스를 뒤지며 책짐을 꾸렸었다. 따지고 보면 소설가 겸 문화평론가로 활동하는 그에게는 모두가 필요한 자료들이었지만, 그래도 덜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되는 책들은 모두 끈으로 묶어 놓았다. 고물상에 가져다 팔 것들이었다.

 

더 이상 이 책 저 책 보관해 둘 공간도 없었지만, 당장에 밥 사 먹을 1~2만 원이 필요하기도 하기 때문이었다.

 

선호는 개나리 빌라 403호 문을 열고 나왔다. 한 계단을 내려가는데, 301호 집의 세 살배기 사내아이가 집에서 아장아장 걸음으로 나오다가 선호를 발견하고는 "안녕!" 하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하하, 참 착하구나. 잘 있었니?"

 

선호가 덕담(德談)으로 말하자 사내아이가 예쁘게 웃었다.

 

선호가 1996년에 처음으로 입주하여 햇수로 9년째 살고 있는 개나리 빌라는 모래내 시장 등뒤에 있는 모래내 고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옥상에 올라가 둘러보면 동서남북 4면으로 펼쳐지는 경관이 아주 시원했다.

 

굳이 옥상에까지 올라가지 않더라도 선호가 사는 403호 작업실 창문을 열고 바라보면, 오른쪽으로는 문학산과 문학경기장(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월드컵 대표팀이 포르투갈 월드컵 대표팀을 이긴 장소)이 바라다 보였고, 왼쪽으로는 소래포구 가까운 곳으로 짐작되는 바다까지 바라다 보였다.

 

개나리 빌라 현관을 빠져나와, 자동차 한 대도 들어갈 수 없는, 그러나 손수레는 들어갈 수 있는 좁은 골목을 벗어나오자, 골목 왼쪽으로 붙어 있는 빌라 현관 앞에서 채소를 팔고 있는 아주머니들이 보였다.

 

선호는 오른쪽에 있는 가파른 고개를 타고 내려가 단골 고물상인 '구월 재활용 자원'으로 향했다. 고물상에 도착하여 손수레를 한 대 끌고 나온 선호는, 이번에는 가파른 고갯길을 피하여 모래내 시장 뒷길로 손수레를 끌고 이동했다.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귀가하는 주부들이 선호를 발견하고는 '설마' 하는 표정들을 지었다. 언젠가 텔레비전 지역 채널에 '생명을 사랑하고 역사를 바로 찾는 작가'로 소개된 적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았던 주부들은 '저 이가 소설가 최선호씨야' 싶으면서도 막일꾼처럼 손수레를 끌고 가고 있으니 닮은 사람이겠거니 싶었던 것이다.

 

덜 가파르기는 하지만 어차피 언덕배기인 모래내 고개 빌라촌 골목을 손수레를 끌고 오르며 선호는, 며칠 전 저녁 어느 날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구월 중앙공원에서였다. 박스나 캔 들이 가득 든 손수레를 끌고 가며 버려진 캔을 찾고 있는데, 한쪽 나무 그늘 벤치에 앉아 있던 20대 초반 여성이 소리쳤었다.

 

"어? 선생님!"

 

[계속]

 

 

덧붙이는 글 | 몇 년 전에 완성한 뒤에 출간하지 않고 있던 소설인데, 최근의 달라진 모습을 덧붙여서 많은 부분 개작해 가며 연재한 뒤에 출간하려고 합니다. 가난한 서민들의 삶의 모습이 그려질 것입니다. 


#모래마을#빌라#모래내시장#재활용#고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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