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만혼에 해당되는 총각이다.
30대 초반까지는 어줍잖게도 내 자신이 가장이 되려면 더 수양을 쌓아야 하며 아내와 아이를 간수하기에는 인격이 모자란다며 결혼 자체를 너무 '거룩'하게 생각했었고, 그 이후 짧게 혹은 약간의 교제기간을 가졌던, 손으로 꼽는 인연도 결혼까지 이르지는 못한 채 끝나곤 했는데 그때만 해도 아직 젊다는 핑계로 눈만 높아 가지고 이런저런 이유를 대고 내 쪽에서 먼저 파토를 놓았던 기억이 난다. 되돌아 보면 후회될 때도 있지만 어차피 인생이란 정답이 없는 터, 지나가버린 짧았던 인연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30대 중반 이후로는 영화 '101번째 프로포즈'만큼은 아니지만 주변 분들의 소개로 적지 않은 수의 여성들을 소개받을 기회가 있었는데 대체로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우선 내가 원래 내성적이었던 성격 탓이 크다. 여자를 만나서 얘기를 나누다가 화제가 궁해지면 어색한 분위기를 극복해보고는 싶은데 말문이 트이지 않아 조금씩 더 길어지는 침묵 속에서 '사태해결'에 대한 실마리를 풀어내지 못하고 전전긍긍했던 때가 많았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이었던 것은, 소개로 이성을 만날 때 가능한 한 자신의 약점은 되도록 덮어두고 내가 가지고 있는 장점을 잘 부각시키면 좋을텐데 그런 걸 잘 못한다는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처음 소개받아 여성을 만나러 갈 때마다 다짐하곤 했다. 나의 약점을 꿍치고 장점만을 드러내자...
그런데 결심이야 그렇지만 막상 상대방을 만나서 대화를 하다 보면 서로가 살아온 인생의 편린이 드러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기억이나 인상적인 장면들.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자신만의 해석이나 느낌이 표현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내 경우는 지금도 과거 대학생시절의, 별로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학생운동을 했었다는 사실과 그 경험이 주었던 가치관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인데 그게 꼭 여자를 만날때는 이야기를 꺼내게 되고 결과적으로 핸디캡으로 작용했었다는 것이다.
정녕 내가 장가 가고 싶다는 목표의식이 뚜렷하다면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르는 그러한 '과거사'를 적절히 제어해내면서 내 입장에서 보면 썩 내키지는 않을지라도 상대방이 호감을 가질 법한 것을 소재로, 취미든 에피소드든 뭐 하다 못해 연속극이나 유명한 인기연예인의 신변잡기까지라도 화제삼아 맞장구도 쳐주고 하면 좋으련만 그게 맘처럼 안된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리고 나서 첫 만남에서 실패한 후 그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 보면 대개 나는 내가 가진 독특한 가치관이나 아니면 스스로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상대방이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이실직고해버리는 순진함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요 며칠 전의 만남만 해도 그랬다.
모처럼 죽이 잘 맞는 상대를 만나 첫만남에서 즐겁게 대화하고 식사에 소주까지 했으며 기분좋게 헤어지면서 다음 약속을 잡고 내심 이번의 인연에 대한 기대감에 부풀어 있는데 기어코 어제 낮에 문자가 오고야 말았다. '곰곰히 생각해 봤는데... 자기와의 인연은 아닌 것 같다...'고 미안하다는 문자가 와 있다. 그래서 나도 곰곰히 그 만남을 기억해 봤더니 역시 여전히 내가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그것이 이번에는 '죽이 너무 잘맞는다고' 생각했던 방심 속에 저질러진 것이다.
세월이 하수상하다.
전에 없이 과거인연의 모임이 여기저기 활발해지고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거꾸로 가는 듯한 세월에 심한 갈증과 답답함을 느끼며 그것을 입으로 표현하게 된다. 여자를 만났던 그 날도 예외는 아니어서, 만나서 간단히 대화를 튼 뒤 점잖게 시작된 대화가 좀 더 활발해지면서 누군가를 심하게 성토하고 또 내가 개인적으로 지지하는 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얘기까지 버무려지면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얘기를 쏟아냈고 상대도 내 얘기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며 맞장구까지 쳐주니 당시 나는 첫만남에서의 '환상적인 파트너'에 감사할 따름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사실상 거기서 상황 끝이 아니었을까 싶다.
문자를 받고 나서, 태연함을 가장한 답신문자를 보내고 난 뒤에, 허탈한 마음과 함께 난데없이 어렸을 적 봤던 영화가 생각나서 혼자 웃었다.
어릴 적 '주말의 명화'라고 해서 텔레비젼에서 영화를 보여줬는데 그 중 '7인의 신부(新婦)'라는 흑백영화가 있었다.
미국배경의, 마을과 고립된 두메산골에 건장한 일곱 형제가 살고 있었는데 큰 형이 장가를 들게 되면서 큰형수가 남은 6명의 잘 생긴 총각 시동생들을 한꺼번에 도시처녀들과 짝지워주는 것을 소재로 하는 뮤지컬영화였다. 그런데 다른 장면들은 별로 기억에 희미하지만 유난히 웃겨서 배꼽을 잡았던, 기억에 생생한 장면이 바로 막내동생이 난생 처음 여자를 만나서 어색하게 하늘만 쳐다보다가, 날씨가 좋다는 것을 핑계로 긴 침묵을 깨고 불쑥 수작을 건다는 첫 마디가 걸작이다.
"저기... 오늘 참 오소리 잡기 좋은 날이지요?"
"....?"
매일 산에서 사냥이나 다니던 떠꺼머리 총각의 입장에서야 당연히 나올 수 있는 '자연스러운' 화제거리였을 것이나 오소리와 별로 상관없이 살아온 도시처녀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황당무계한 얘기란 말인가?
그래도 영화 속의 그 막둥이는 결국엔 작업에 성공하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그동안 적지 않은 여성들을 만나면서 영화 속의 막내동생처럼 상대방 여성에 대한 배려나 눈높이를 의식하지 않고 연속적으로 '오소리 잡는 얘기'나 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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