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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공부하는 방통대 교과서
 내가 공부하는 방통대 교과서
ⓒ 이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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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어떻게 오고 가는지, 느끼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봄이 오는 것을 어떻게 느낄까. 어떤 이는 출근길 여자들 옷차림에서 봄을 느낀다고 하는데. 출근 할 곳 없는 나는, 아이들 재잘거림에서 또 봄이 오는구나, 생각을 한다. 내 방에는 남쪽으로 향한 커다란 창이 있고, 바로 그 너머에는 초등학교가 있다. 3월이 오면 아이들은 정확히 개학을 하고, 나는 그 아이들 소리에 잠을 깨고, 음악시간에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 소리에 한 계절이 다시 시작되었구나, 생각을 한다.

이 아이들처럼 내게도 봄이 왔고, 내게도 새학기가 시작되었다. 지난 일요일 그동안 미루어두었던 교과서를 사러 갔다. 나는 2003년도에 방송통신대학교에 편입을 했고, 5년여를 내리 휴학만 하다 작년 가을에 드디어 복학을 했다. 그렇게 나는 대학교를 졸업한 지 거의 8년여 만에 다시 대학생이라는 직업 아닌 직업을 가지게 되었고, 이 봄 다시 새학기를 맞는다. 그리고 투병생활 4년째로 접어든 내 동생은 방송통신대학교 일본어학과 1학년이 되었다. 

나에게는 13살 차이가 나는 사촌 동생이 있다. 내가 중학생이 되었을 때 태어난 이 아이가 올해 대학생이 된다. 지난 설날 아침, 부엌엔 차례상 차릴 준비로 한창 분주했고 나는 동생이 편히 누워있을 수 있도록 이불을 정리하고 있었다. 마침, 차례를 지내러 작은아버지 식구들이 집으로 왔고, 사촌 동생과 동생과 나는 잠깐 동안 사촌 동생이 다닐 대학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동생한테 말했다.

"너, 윤희(사촌동생)한테 해 줄 얘기 없어? 뭐, 20대를 어떻게 보내야 한다든가, 이렇게 살아야 20대를 후회하지 않게 보낸다든가… 그런 얘기 좀 해줘."

동생이 나를 멀뚱히 쳐다보더니, 한 마디를 했다.

"20대 절반을 암환자로 살았는데,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얘기를 해줘? 아직도 나 병원에 가면 20대라고. 올해 만으로 스물아홉됐더라. "

순간, 나는 말실수를 했다는 걸 알았다. 아직 만으로 서른도 안된 동생은, 20대 절반은 직장 생활을 했고, 20대 절반은 투병 중인 암환자로 살고 있다. 그런 동생과 이제 막 대학생이 되는 사촌동생은 스무살, 그 출발점이 다른 것이다. 

3월의 대학은, 노란색, 분홍색으로 물드는 시기이다. 대학교 새내기들한테서는 새내기들만의 어떤 향이 풍긴다. 희망, 꿈, 설렘 같은 것들로 반짝반짝했던 새내기들. 그 1학년 후배들을 친구들과 함께 잔디밭에 앉아 흐뭇한 얼굴로 바라봤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지금 투병 중인 내 동생에게는 그런 시절이 없었다. 상업고등학교를 나온 동생은 대학교를 가지 않았다. 상업고등학교를 다녀도 진학반에 있던 동생이었는데, 왜 대학교를 가지 않았는지 그 정확한 내막을 나는 잘 모른다. 그 당시 나는 집을 떠나 부산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정확히 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다만, 동생이 대학교를 가지 않은 이유에 대해 동생이 기억하는 것과 엄마가 기억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만 알 뿐. 그리고 동생이 대학생이 되지 못했던 것을 마음 저 깊은 곳에 상처로 안고 있다는 것을 알 뿐. 그래서 동생한테 대학교 이야기는 되도록 꺼내서는 안되는, 그런 약간은 금기 같은 이야기라는 것.

작년 11월부터 동생은 몸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소화를 시키지 못했고, 구역질을 했고, 통증으로 밤에 잠을 자지 못했다. 먹지 못하니 살이 엄청난 속도로 빠졌고, 움직이지 못하니 근육이 다 사라졌다. 그리고 다시 항암치료가 시작되었다. 영양제를 맞고, 항암치료를 하고, 방사선 치료를 시작했다. 동생은, 그렇게 하루하루를 그냥 살아가고 있었다. 아니, 살아내고 있었다. 먹는 것도 아니게 아침을 먹고, 누워있다가 잠이 들고, 다시 먹는 것도 아니게 한 끼를 먹고, 아니면 굶어버리는 날들.

나는 그런 동생을 보며 동생이 뭔가를 하면, 그래도 삶의 자락을 붙잡지 않을까, 생각했다. 뭔가 내일 할 일이 있고 다음 주 할 일이 있고 다음 달 할 일이 있으면 그래도 살고 싶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슬그머니 동생에게 방송통신대학교에 등록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다.

그 당시 나는 공부하는 재미에 푹 빠져있었고, 학교를 갈 필요가 없는 방송대가 동생에게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언제 끝날지, 끝나기는 할 건지 알 수 없는 투병 생활이기 때문에, 더더욱 뭔가를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투병생활이 끝났는데, 동생에게 남겨진 게 아무것도 없다면, 그 긴 세월을 그냥 보낸 걸 후회하게 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동생에게 방송대 일본어학과를 다니면 좋지 않겠냐고 제의를 했다. 동생이 일본어를 좋아했고 그 동안 틈틈이 혼자 공부했던 일본어가 중급 실력은 되었기 때문이다.

방송대 원서 접수 기간이 끝나고, 조심스럽게 동생에게 전화를 해서 원서 접수를 했는지 물어보았다. 그러나 동생은 접수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솔직히 실망했다. 평생 그렇게 이불 속에서 누워만 있을 건지. 목적도 의미도 없는 그런 삶을 살 것인지. 그러나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그런데, 방송대 일본어학과가 미달되었다. 나는 또 내 욕심에 슬그머니 동생에게 추가모집 하더라고 알려주었다. 그러나 이번엔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게 다였다. 왜 공부를 해야하는지, 왜 방송대여야 하는지, 그런 말들을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그냥, 추가모집을 하더라고 알려 주는 것,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원서 접수를 했는지 물을 수도 없었다.

내가 얼마나 가혹하고 못된 언니인지 깨달았던 것이다. 동생은 자기 체력만 받쳐주면, 혼자 움직일 수만 있다면 내가 닦달하지 않아도 뭔가를 끊임없이 할 아이였다. 그런데 자기 몸이 어떤 상태인지, 자기가 지금 얼마나 힘들고 아픈지는 알아주지도 않고, 공부하라고 몰아대는 언니라는 사람이 얼마나 미울까,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런데, 2월말 쯤 동생이 전화를 했다. 자기도 방송대 1학년이 되었다고. 목소리는 여전히 모기소리만 했지만, 그래도 그 작은 목소리에 어떤 흥분같은 게 느껴지는 듯도 했다. 그렇게 동생은 대학교 1학년이 되었다.

동생은 올해 31살이다. 동생은 암투병 4년차이고, 몸무게는 35kg도 안된다. 동생이 마음속으로 꿈꿨던 대학교 1학년은 이런 게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동생은 마침내 대학생이 되었고, 장학금 받으면서 멋지게 대학생활을 마치기를 바란다. 몸에 상처도 마음에 상처도 아물어 가면서.

대나무는 싹을 틔어 땅 위로 솟아오르기까지 7년의 세월을 땅 밑에서 보낸다고 한다. 그러나 대나무가 일단 싹을 틔어 지상으로 올라와 자라기 시작하면 다른 나무들이 30-40년을 자라서 도착할 높이를 고작 30-40일이면 자란다고 한다. 동생이 대학생이 되기까지 11년 세월이 흘렀다. 그렇게 다져진 세월만큼 남들보다 세 배, 네 배 쑥쑥 배워 나가길. 

나는 방송대 3학년, 동생은 1학년, 우리는 같은 대학교 동문이 되었다.


태그:#방송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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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만큼 남아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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