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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겉그림 홍명진의 〈숨비소리〉
책겉그림홍명진의 〈숨비소리〉 ⓒ 삶이보이는 창

요즘 <워낭소리>가 세상에 이야기 거리가 되고 있다. 평생 싫은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한 집안의 몸종처럼 뼈가 바스러지도록 일하다, 마침내 제 수명을 더할 수 없어서 스스로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소의 일생을 그린 작품이다.

 

어렸을 적부터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소를 키워 본 나로서도 우리 집 소를 잊을 수가 없다. 그 소는 해마다 한 번씩 송아지를 낳아 형제들 학비에 보탬이 되었고, 논밭과 들녘의 쟁기질뿐만 아니라 볏짚과 콩가마니를 실어 나르는 달구지도 일평생 짊어졌다. 그야말로 자기 삶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우리 집 소였다.

 

그렇지만 어디 소의 일생만 그렇던가? 우리들의 어머니들 또한 그런 워낭소리에 더 충실한 삶을 살지 않았던가. 술과 화투 놀음에 놀아나는 무능한 남편을 만났음에도 남존여비라는 시대상을 거스를 수 없었던 울 어머니들, 더욱이 제 몸 아파 낳은 자식들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서 한 평생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었던 울 어머니들은 제 뼈마디가 녹아나기까지 온 생을 다 바쳐야 하지 않았던가.

 

시집 삼 년 놈의 첩 삼 년 언 삼 년을 살았다마는

열두 폭의 도당치매 눈물로 다 여무왔드다(젖었도다)

임아 임아 정한 말하라 철구(절구) 뒤에 놈우(절구공이)로 알마

임 없이도 날 새히더라 돍새기(닭) 없어도 날 새히더라

임과 돍새기 없어도 산다

밤에 가고 밤에 온 손님 어느 개울 누겐 중 알리

저 문 앞에 청버들 남게(나무) 이름 성명 쓰두멍 가라(215쪽)

 

이는 홍명진의 〈숨비소리〉에 나오는 제주 해녀들의 '숨비소리'다. 가히 〈워낭소리〉에 못지 않는 또 하나의 서글픈 소리다. 그 소리는 제주 해녀들이 내 지르는 소리로서, 배를 타고 먼 바다에 나가거나 뭍에서 가까운 인근 바다에 뛰어들어 해삼이나 멍게 같은 것을 잡아 올릴 때에, 바다와 바람에 흩날려 보내는 그녀들의 한탄과 푸념이다.

 

이 책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칠순 할머니 역시 육십 평생을 바다 속에서 물질을 하며, 남편과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고 학교 보내는 박복한 인생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녀의 나이 열일곱에 해방을 맞았지만, 왜정시대보다 더 무서운 공출과 폭압에 시달려야 했고, 급기야 스무 살도 안 된 열여덟 살 꽃다운 나이에 시집을 가야 했다.

 

이어 터지는 4·3사건 속에서 산 속 '폭도대'와 마을 동네의 '토벌대' 사이에 학살과 총살이 끊이지 않았고, 관군까지 동원되던 그 무렵 급작스레 남편을 잃게 되었으니 그녀의 나이 스무 살 때의 일이었다. 한국전쟁을 겪은 이후 딸 아이 하나와 함께 그녀는 경상도 남쪽 해안으로 옮겨 와 박정희 시대가 끝날 때까지 새로운 남편과 함께 자식들 뒷바라지에 온 생을 다 바쳤다.

 

그러나 자식들에게 집착하면 할수록 밀려드는 죽음의 굴레는 좀체 벗어날 수 없었다. 스물도 안 돼 시집간 첫째 딸아이가 급작스레 암에 걸려 죽지를 않나, 그 집안의 대들보로 태어난 아들 녀석까지 버젓이 대학에 들어갔지만 군대에서 그만 목을 매달아 자살을 하지 않나, 허구 헌 날 남편은 술에 찌들어 동네방네 싸움질을 하고 다녔으니, 가히 죽지 못해 사는 모진 인생이었다.

 

작가 홍명진의 실제 어머니를 그린 이 책을 읽노라니, 문뜩 중고등학교 시절에 논밭에서 혼잣말로 노래하던 울 엄마의 또 다른 '숨비소리'가 들려온다. 왜정시대 남몰래 학교 창문 너머로 도둑공부를 해야 했던 울 엄마는 꽃다운 나이에 남편을 여의고, 홀로서 우리 자식들 7남매를 키워내야 했으니, 그 한스러움과 외로움을 논밭의 노랫가락 소리에 흘려보냈던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 울 엄마가 내질렀던 노랫가락 소리가 무슨 뜻을 지니고 있는지는 알길이 없다. 하지만 그 소리가 한평생 몸 종 처럼 살다가 제 스스로 숨을 거두어야 했던 우리 집 소의 '워낭소리'보다도 더 모진 질곡의 소리였음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듯 한 시대의 학살과 총살의 역사를 온 몸으로 받아내야 했고, 그 틈 속에서도 제 몸으로 낳은 자식들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꿋꿋하게 키워보려고 몸부림쳤던 제주 해녀의 그 '숨비소리'를 듣노라면 그 시대를 살아 온 모든 어머니들의 자화상을 엿볼 수 있지 않겠나 싶다.


숨비소리

홍명진 지음, 삶창(삶이보이는창)(2009)


#숨비소리#제주 해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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