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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복날의 손수레 5

 

위철산과 이진현에게 크게 실망한 선호는, 한동안 외상술에 자신의 모습을 실어 버렸었다. 세상에는 믿을 만한 사람도 있지만, 믿지 못할 사람도 참 많았다. 그렇다고 달려가서 멱살을 붙잡고 돈을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당장 일당이라도 벌지 않으면 먹고 살 일이 문제였다. 백성은행에 고리(高利)를 갚으려고 여기저기에 손을 벌렸기 때문에 더 이상 빌릴 데도 없었다.

 

"요즘은 언론 창업의 위험도가 너무도 높습니다. 하지만 우리 회장님께선 창간을 뒤로 유보해 두었을 뿐이지 반드시 애견신문을 창간하실 겁니다. 그때는 김 선생님께서 꼭 좀 도와주십시오."

 

애견신문 창간 편집주간 영입을 제의했다가, 창간 유보 상태라고 전해 주었던 일간 <타임 스포츠> 편집국장한테서도 아직 연락이 오지 않고 있었다. 언론 창업 환경은 더 안 좋아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날부터 선호는 인터넷을 검색하며 편집주간 자리나 편집국장을 구하는 데 열심히 이력서를 보내 보았지만, 연락조차 오지 않았다. 모집요강을 보면, 주간신문이나 월간지 쪽은 대부분 선호보다 젊은 나이의 책임자를 뽑으려고 하고 있었다. 출판사는 어디건 30대 책임자를 원하는 쪽이었다.    

 

그렇다고 실입주금도 뽑지 못할 빌라를 팔 수도 없는 처지. 그래서 생각다 못해 선친으로부터 물려 입고 있는 것을 포함한 자신의 옷과 자료로 모아둔 신문이며 잡지, 그리고 소설책 등을 모래 시장 부근에 있는 고물상에 팔기 시작한 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자기 재산을 하루 종일 싸 모아서 가파른 고갯길을 수백 미터 손수레로 끌고 내려가 팔아보아야 하루에 2만 원 벌이를 하기도 어려웠다.

 

그러니 등이 구부러진 채 부지런히 박스 등의 파지를 모으고 다니는 80 넘은 할머니들은 하루에 얼마나 벌겠는가. 5000원이라도 벌면 다행일 것이었다.

 

그래도 지금처럼 어렵지 않을 때는 그 할머니들에게 신문을 가져다 드리거나 빈병을 가져다 드리곤 하던 선호였었다. 갈 길이 바쁘지 않을 때는 언덕길을 오르내릴 때 그분들의 작은 손수레를 끌어다 드리곤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처지도 못 되었다. 당장 배가 고프니, 짐 없이 걷기도 힘든 처지가 아닌가.   

 

아무리 좋은 책이라고 하더라도, 엄청난 광고를 하지 않으면 책이 잘 움직이지 않는 나라 대한민국. 또는 사재기 작전으로 최상급 베스트셀러에 올려놓아야 좋은 책인 줄 알거나, 그나마 사 보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지는 줄 알고, 유행하는 옷을 사 입듯이 책을 사 보는 사람이 많은 나라 대한민국.

 

유럽 선진국에서 열리는 도서전시회에서도 책의 품질이나 저자의 수준이 최상급으로 평가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서 인구는 형편없는 게 바로 대한민국의 현실이었다.

 

겨우 방글라데시 수준이었다. 방글라데시야 형편없는 문맹국(文盲國)인 데다, 설령 돈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 읽을 책마저 생활 주변에 없지 않은가. 그런데 그 나라와 독서 수준이 똑같으니 얼마나 우스운 대한민국인가.

 

일간지나 방송기자들로부터 '아주 좋은 책'이라는 평가를 받은, 선호가 1월에 내놓은 생명 에세이집 <생명을 사랑하는 명사들>이 대한민국 국민들로부터 푸대접받은 경우만 해도 그랬다. 겨우 3000권을 찍었는데, 8월에 이르도록 더 찍었다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책 값은 1만 원. 저자가 받는 10% 인세라야 권당 1000원. 3000권 인세라고 해야 300만 원인 셈이었다. 이게 많은 것 같지만, 대기업 과장 한 달 봉급에도 못 미치는 액수였다.

 

그 책의 원고를 쓰기 위해 걸린 시간은 3개월. 명사 15인을 만나느라 든 여행 경비만 200만 원이 넘게 들었다. 그러니 여행 경비를 빼고 나면 100만 원 번 셈인데, 아무리 혼잣몸이라고는 하지만, 그 돈으로 반 년 이상을 어찌 살 수 있단 말인가.

 

동사무소나 사회복지관 등에 기증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자신의 저서와 스승의 저서, 그리고 저자로부터 직접 선물받은 책을 빼놓고는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 거의 다 팔아버린 선호.

 

그런 선호가 직접 재활용품 수거 일선에 나서 손수레[rear car]를 끌고 가다가, 까르푸와 건설회관 사이에 있는 중앙공원에서 자신을 알아보는 20대 초반의 한 여성을 만났던 것이다.

 

탤런트 이요원을 빼닮은, 더 없이 청순한 인상의 그녀는 외쳤다. 

 

"선생님, 저 효진이에요… 정효진"

 

정효진!

순간, 선호의 기억은 2004년 여름으로부터 8년 전인 1996년으로 돌아갔다.

 

[계속]

 

 

덧붙이는 글 | 몇 년 전에 완성해 놓고 출간하지 않고 있던 소설인데, 최근의 달라진 세상 모습을 덧붙여서 많은 부분 개작해 가며 연재한 뒤에 출간하려고 합니다. 가난한 서민들의 삶의 모습이 그려질 것입니다. 


태그:#모래마을, #모래내시장, #모래내고개, #베스트셀러, #재활용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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