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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유난한 잣나무를 좀 봐.'

 

축령산에 들어서면 겨울에도 특유의 푸름을 뽐내는 우렁한 잣나무숲을 만난다. 축령산은 잣나무가 유명하여 '가평잣'으로 이름난 곳이기도 하다. 가끔 텔레비전에 잣 따는 풍경이 비춰지면 그곳이 축령산이기 십상이다. 생태계의 교란 작용으로 부쩍 늘어난 청설모가 잣을 훔쳐 먹던 장면이 생각난다.

 

지나한 겨울이 2월과 함께 물러갔겠거니 싶었는데 3월의 축령산 계곡은 얼음이 두껍다. 그 많던 청설모도 안 보이고 축령산은 여전히 겨울이다. 볕 좋은 햇살만 3월이라 말한다. 그래서 햇살이 드는 동쪽 능선은 언 땅이 녹느라 땅이 질펀 거렸고 반대쪽 서편 능선은 낙엽 사이로 언 땅이 숨어 있어 미끄러워 조심스러웠다.

 

그렇다. 지금은 겨울과 봄이 공존하는 시기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것이 아니라 겨울의 흔적을 조금씩 지우며 봄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볕 바른 동쪽 능선으로 오름길을 시작한다. 잣 말고도  축령산에 유명한 것이 있다면 바위라고 말하고 싶다. 사방이 산지인 이 나라에 내로라하는 바위산이 오죽 많을까 싶지만 축령산 또한 그에 못지 않다.

 

축령산의 등걸에 해당하는 동쪽 능선으로 등산로를 선택하자면 자주 마주치는 게 기괴한 모양의 우람한 바위들이다. 바위능선이라고 할 만한 그 길은 그냥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니다. 바위 사이로 로프가 설치되어 있거나 혹은 낑낑대며 바위를 타오르건간에 두 손 두 발을 모두 사용해서 올라야 하는 난코스가 산재해 있다.

 

축령산은 충분히 워밍업을 하고 올라야 하는 산인 것이다. 운동 전엔 충분한 스트레칭은 기본이라고 알고 있으면서도 보통은 스트레칭을 생략하곤 했다. 그러나 축령산에서는 예외다. 등산로 초입부터 가파른 오르막으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매표소를 지나면 오른쪽으로 휴양림으로 가는 길이 축령산 오르는 길이다. 왼편 오르막은 서리산 가는 길이다.

 

축령산(886m)은 비슷한 고도의 서리산(832m)과 나란히 봉우리를 맞대고 있다. 넓게 보아 서리산을 축령산 줄기로 부르는 이들도 있고 실제로 이 두개의 능선을 종주하는 이들도 많다.

 

매년 5월말 경이면 철쭉축제가 열리는 곳이 서리산이다. 통상 축령산 철쭉제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의 철쭉은 연한 분홍색의 철쭉꽃빛이 곱기로 유명하다. 규모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렇게 축령산엔 유명한 것들이 참 많기도 하다. '축령산 휴양림' 또한 축령산의 유명세를 더하는데 시설 좋고 수도권에서 가까운 탓에 늘상 휴양객들로 붐비는 곳이기도 하다. 

 

축령산과 서리산을 가르는 계곡은 제법 규모가 크다. 축령산으로 가기 위해 제2목교를 건넌다. 계곡에 걸린 두 개의 나무다리는 제법 운치가 있어 이곳을 다녀간 이들은 한번쯤 사진을 꼭 찍고 지나간다.

 

본격적으로 등산로가 시작되는 지점은 휴양림 시설이 들어선 곳이다. 오늘따라(3월 1일 일요일) 모 산악회 팀원들이 시산제(始山第)를 하느라 소란스럽다. 휴양림시설을 뒤로 하니 비로소 잣나무 울창한 한적한 등산로가 나타난다. 한 아름이 넘을 것 같은 둥치를 자랑하는 잣나무들이 우뚝우뚝 키를 자랑하며 서 있다. 산의 정기가 이곳에 모여 있을 것 같은 나무와 나무 사이로 햇살이 비춰드는 풍경은 신비로움을 더한다.

 

축령산은 '신령한테 제사를 지낸다'는 뜻을 가진 산이다. 고려 말경에 태조 이성계가 이곳으로 사냥을 왔더란다. 이상하게도 사냥감이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아 산신께 제를 올리고서야 사냥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축령산이라는 이름은 거기에서 비롯되었다고.

 

아마도 매해 3월 첫날에 시산제를 지내는 차원 역시 축령산의 유래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싶다. 여느 산이든 시산제가 열릴 테지만 축령산의 시산제는 특히 그 의미가 깊게 다가오는 것도 신령이 깃든 산의 정기가 남다른 탓이 아닐까싶다.

 

축령산 정상에 서면 큰 돌탑이 정상석을 압도하듯 서 있는 걸 보게 된다.  나도 모르게 돌 하나를 올리며 두 손을 모으고 싶어지는 돌탑이다. 소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질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은 '축령'이라는 이름 때문이 아닐까. 산의 정기를 듬뿍 받으며 산 정상에 올라 산이 주는 신성(神性)에 저도 모르게 엄숙해 지는 순간 소원을 비는 마음이 간절해진다. 

 

나라 안팎의 사정이 급물살을 타듯 시종 불안스럽기 짝이 없지만 무엇보다 일제고사 문제로 몸살을 앓는 교육 현장에서 '인간 몰모토'가 되어 가는 듯한 아이들에 대한 안쓰러움이 크다. 경쟁지상주의의 최전선으로 내몰면서도 우리는 그 아이들이 나름의 창의력이 있는 아이들로 자라 제개성을 맘껏 뽐내는 동량으로 자라길 원한다.

 

말의 앞뒤가 맞을 리 없는 이 공허한 바람을 차마 아이들에게 강요할 순 없다. 다만, 그런 속에서도 너무 세태에 매몰되어 계산적인 인간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우리의 모든 아이들에게 자유로운 교실과 창의적인 사고를 허락해 주는 날이 과연 오기는 할 것인지 의문이다. 공허한 나의 바람이 산의 정기가 남다른 축령산 정상 돌탑에서마는 단단하기를 원했다.

 

남이 장군이 호연지기를 키우기 위해 체력을 연마했다는 '남이바위'를 지났고 그 형상이 영락없이 독수리를 닮았으며 한때 '수리 부부'가 둥지를 틀고 살기도 했다는 '수리바위'도 지나 왔다. 그리고 이름은 없지만 저마다 독특한 모양새를 뽐내던 많은 바위들을 빙 돌아 정상에 도착했다.

 

이제는 올라온 바위길과는 사뭇 다른 빽빽한 침엽수림이 울창한 숲길로 하산을 한다. 축령산과 서리산을 가르는 절고개 아랫길이다. 아마도 오랜 옛날 이 깊은 산중에 절이라도 있었는가 보다. 이름이 절고개 인 걸 보면.

 

축령산 정상을 내려와 서리산과의 경계를 이룬 삼거리, 너른 평원 같은 산중에 심어놓은 구상나무들이 햇살에 반짝이며 서 있는 풍경이 아름답다.

 

다시 잣나무숲이다. 그 많던 바위들은 동편 능선으로 다 이동시켰는지 흙냄새 물씬 나는 평화로운 숲길이 이어진다. 새가 울면 울창한 나무숲에 부딪혀 메아리가 되어 울린다. 숲 한쪽으로 흐르는 계곡물은 여전히 두터운 얼음에 갇혀 있다. 물의 흐름도 끊기고 바람도 잦아들어 숲은 마냥 고요하기만 하다. 숲이 참 좋은 축령산엔 필시 산의 정령이 살고 있는 게 틀림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울창한 잣나무 숲을 벗어난다. 


태그:#축령산, #잣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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