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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의 공정성은 사법부 독립의 존재 기반이다. 따라서 이것이 훼손된다면 사법부의 존재 이유가 없어진다. 민주주의 헌법에 '법관의 독립'을 명시한 것은(103조) 재판의 공정성을 위함이다. 그런데 최근 '법관의 독립'을 무너뜨리는 일들이 다른 기관도 아닌 사법부에 의해 자행되었다.

사실 재판의 공정성은 굳이 근·현대의 민주주의를 거론할 필요도 없이 고대 전제국가 때부터 강조된 철칙이었다. 우리는 이승만·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에서 공정치 않은 재판이 숱하게 벌어진 것을 알고 있다. 이런 점에서 현대의 독재정권은 고대 전제국가보다 저열한 통치체제라고 해야 한다. 그런데 최근 그 저열했던 체제로 회귀하고자 하는 징후들이 도처에서 준동하고 있다.

신영철 대법관.
 신영철 대법관.
한편 국민의 인권 확립은 사법부의 존재 목표이다. 재판의 공정성도 결국 국민의 인권을 확립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통해 최근 촛불시민의 인권은 철저히 소외되었다. 사법부는 국민 인권의 최후 보루라 하지 않는가. 우리의 충격과 불안이 클 수밖에 없는 것은 이번 사건이 재판의 공정성을 훼손함으로써 국민의 인권을 말살했기 때문이다.

신영철 대법관은 재판의 공정성을 무너뜨리는 일을 부단히 시도한 사람이다. 재판 행위는 당연히 배당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배당이 불공정하면 판결도 불공해진다. 그는 서울중앙지법 법원장 재직 때인 작년 6월 19일~7월 11일, 8건의 촛불사건을 보수성향의 부장판사에게 무더기로 배당했다. 이는 촛불 피고인에 대한 신속한 재판 진행과 무거운 형량을 노린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신속한 재판과 무거운 형량 주문, 누구를 위한 것인가

실제로 무더기로 배당된 촛불재판은 신속하게 진행되었고 촛불피고들이 받은 형량은 무거웠다. 민감한 시국사건을 무더기로 한 판사에게 전담시키는 것은 독재정권 시절의 관행이었다. 하지만 신 대법관은 재판 배당에 문제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의 '법관 마인드'는 독재시절의 것일 터이다.

보도되었듯이 무더기 배당은 양식 있는 판사들의 반발을 초래했다. 지난해 7월 14일 판사 13명이 모임을 열고 항의하자 그는 마지못해 재판 배당 예규에 따라 기계식 무작위 방법으로 환원했다. 그리고 그는 판사들에게 간담회를 소집하는 첫 번째 메일을 보내는데, 간담회의 의제가 분명치 않았고 모임 자체까지 비밀로 해야 한다고 단속했다. 

한편 배당 방식을 환원하자 새로운 촛불사건인 광우병대책회의 안진걸 팀장 재판은 형사7단독 박재영 판사에게 주어지게 된다. 박 판사는 피고인 측이 낸 야간집회 금지조항에 대한 위헌 법률심판 재정신청을 받아들이고 피고를 보석으로 석방했다.

박 판사의 조치는 헌법정신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우리 헌법 107조 1항에는, '법률이 헌법에 위반되는(지) 여부가 재판의 전제가 된 경우에는, 법원은 헌법재판소에 제청하여 그 심판에 의하여 재판한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따라서 차후 다른 판사들이 촛불재판을 헌법재판소 심판 때까지 연기한 것 역시 의당 헌법에 따른 조치였을 따름이다.

여기서 잠시 박재영 판사가 위헌제청을 한 다음날 신영철 서울중앙지법원장(당시)이 판사들에게 보낸 메일을 읽어 보자.

대법원장님 말씀을 그대로 전할 능력도 없고, 적절치도 않지만 대체로 저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들었습니다.... 나머지 사건은 현행법에 의하여 통상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메시지였습니다. 구속사건에 대하여 더 자세한 말씀은 계셨지만 생략하겠습니다. 오해의 소지가 있으시면 제가 잘못 전달한 것으로 해주십시오.(2008.10.14.메일)

이 메일은 읽는 사람을 아주 복잡하게 만든다. 먼저 그는 "대법원장 말을 전할 능력도 없고 적절치도 않"다고 하면서도 대법원장의 말(지침)을 분명히 전하고 있다. 우선 이런 발언은 법관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소신도 없는 기회주의적 말장난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그는 위헌심판 제청 중인 사건을 현행법에 따라 재판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현행법에 따라'란 곧 유죄판결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재판 형량에 대한 간섭이 된다. 또한 이것은 '위헌제청 중인 사건은 헌법재판소 심판에 의해 재판해야 한다'는 헌법 107조에 위배된다. 법원장에게는 판사들의 인사평가 권한이 있으며 대법원장에게는 판사들의 인사권이 있다. 따라서 그의 메일은 재판에 간섭하고 부당한 압력까지 행사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그럼에도 신 대법관은 메일이 판사들에 대한 압력이 아니라고 말한다. 한 술 더 떠 그는 "이것을 압력으로 받아들이는 판사가 있다면 그는 판사 자격이 없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자기 메일이 얼마나 큰 문제가 있는지를 스스로 알고 있었다. 그는 메일 마지막에, "오해의 소지가 있으시면 제가 잘못 전달한 것으로 해주십시오"라고 함으로써 자기가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았지 않은가? 이로 볼 때 그의 행위는 확신범적인 성격을 띤다. 이래 놓고도 그는 다른 판사들의 자격을 운운한 것이다.

정작 더 심각한 문제는 메일 문구대로 이런 지침이 정말 대법원장의 것일 수도 있다는 데에 있다. 물론 그가 대법원장을 호가호위하여 판사들을 다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메일 문구는 명백히 대법원장의 지침임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이번 사건엔 사법부의 근간을 뒤흔드는 폭발성이 있다. 만약 서울중앙지법원장과 대법원장이 담합하여 재판을 정치적으로 조종할 수밖에 없었다면 이것은 사법부의 독립을 무너뜨리면서 국민의 인권을 말살한 처사로서, 말 그대로 '사법 공작'이라고 해야 한다. '사법부를 흔드는 보이지 않는 손'이 과연 있는 것일까?

신영철 대법관, 즉각 사퇴하고 조사 받아야

내년 2월이 되면 형사단독재판부의 큰 변동이 예상되기도 합니다. 모든 부담되는 사건을 후임자에게 넘겨주지 않고 처리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구속사건이든 불구속사건이든 통상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어떤가 하는 저의 소박한 생각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내외부(대법원과 헌재 포함)의 여러 사람들의 거의 일치된 의견이기도 합니다.(2008.11.6. 메일)       

역시 이 메일에서도 그는 '자기의 소박한 생각'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내외부 즉 대법원과 헌재의 일치된 의견'이라고 암시하고 있다(차라리 이런 이상한 화법이 그의 복잡한 인격 때문이라면 그나마 다행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메일 문구대로 대법원과 헌재까지 재판에 의견을 개진한 것이라면 사태는 심각한 것이다. 12일 KBS 9시뉴스에서는 신 대법관이 이강국 헌법재판소장을 만났다는 것을 법원 고위 관계자의 말을 통해 보도하기도 했다.

그는 촛불사건을 화급히 처리해야 한다는 모종의 강박관념 같은 것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그의 개인 소신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법원의 윗선 또는 외부의 주문 때문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그는 2월이 되면 자기가 서울중앙지법을 떠난다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대법관 승진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야간집회에 대한 위헌제청사건을 2009년 2월에 공개변론을 한 후 결정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변론하지 않고 연말 전에 끝내는 것을 강력히 희망한 바 있으나, 결정이 미뤄지게 되어 저 자신 실망을 많이 하였습니다... 통상적인 방법으로 종국하여 현행법에 따라 결론을 내주십사고 다시 한 번 당부 드립니다.(2008.11.24. 메일)

그는 비밀 메일을 통해 '통상적인 방법으로 종국(재판을 끝냄?)하여 현행법에 따라 결론을 내주십사 당부'했다. 이쯤 되면 재판 간섭과 압력 행사가 더할 수 없이 노골화된 것이다. 우리는 일개 법원장으로 하여금 이토록 조급하게 만들고 법관으로서 이성을 거의 상실하게 만든 힘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다.

촛불에 따라 갈라지는 대한민국 법관들의 궁달(窮達)

아무튼 그는 지난 2월 대법원장에 의해 대법관에 제청되었고 대통령의 임명을 받았다. 그는 2월 10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촛불재판 무더기 배당을 알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평상대로 기계식 배당으로 알고 있었을 뿐이라고 태연하게 말한 것이다.

"제가 법원장으로 사건에 관여하고 제 의견을 얘기해서 리더십이 발휘됐을까요? 전혀 그런 적이 없습니다. 법원장은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누구한테 일을 맡기고 항상 잘해주기를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전화해서 뭘 어떻게 하라는 사람이 아닙니다."(신 대법관 국회 인사청문회 답변)

일단 이 발언으로 그는 국회에서 위증을 했다는 혐의를 받게 되었다. 그는 판사들에게 전화해서 간섭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일전에 한승수 총리는 '메일'은 곧 '편지'라고 하더니) 신영철 대법관은 '메일' 보내 놓고 '전화'하지 않았다고 증언한 것이다.

신 대법관은 즉각 사퇴하고 조사를 받아야 한다. 아울러 이번 사건은 철저히 조사한 후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 법원은 이번 사건의 자체 진상조사를 벌이기로 했다고 한다. 대법관과 대법원장을 법관들이 조사한다는 것이다. 누가 이런 조사 방식을 신뢰할 수 있겠는지? 최소한 국회나 재야 법조계가 참여하는 진상조사가 이루어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작년 9월 대한민국 사법부는 출범 60주년을 맞이했다. 그때 이용훈 대법원장은, "과거의 불행한 일들을 교훈 삼아 법관의 양심과 사법의 독립을 굳게 지켜나가겠습니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법관의 양심과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려 한 법관들은 사퇴하여 '빈궁'해졌고 법관의 양심을 팔고 사법부의 독립을 무너뜨리려 한 법관은 대법관으로 '영달'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의 모든 배경에는 '촛불'이 있다. 촛불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 판사의 궁달(窮達)이 결정난다면 법관으로서 좀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태그:#신영철, #촛불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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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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