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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일(1월 10일)

히말라야 발자국
Lobuche(4940)  07:40
Gorak Shep(5147)  10:10


귓가에 스치는 찬바람에 눈을 뜨니 머리에 있어야 할 모자가  바닥에 떨어져 울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12시 40분! 또 시작이군! 어차피 불면증에 시달릴 바에는 즐겁고 유익하게 이 시간을 보내자는 생각으로 평소에 구석에 밀어 놓았던 먼지 쌓인 이야기를 꺼내 본다.

근데, 이놈의 대화가 새벽 3시가 되어도 끝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잠을 들지 못하며 조바심과 근심도 커져만 간다. 지금 자고 있는 로부체의 고도가 4,940m정도이고 기온까지 급강하해 호흡조차 어려웠다. 꼭 폐에 물이 찬 느낌에 몸을 이리저리 돌려보지만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았는다.

'이런, 폐에 물이 찬 것이 분명해! 죽음이 눈 앞에 있어.'

눈덩이처럼 커져만 가는 근심과 두려움에 손전등을 찾아 고산병에 좋다는 약를 하나 꺼내 먹고 잠을 청해 본다.

얼마나 잔 것일까? 밖에서 들리는 요란한 소리에 잠에서 깨어 보니 새벽 6시이다. 함께 투숙하고 있는 미국인 3명이 칼라파타르로 떠날 준비를 하느라 분주한 모양이다. 침낭을 꼬치처럼 두른 채 문밖의 소리를 멍하니 상상하고 있는데, 쿠시가 와서 떠날 준비를 하라고 재촉한다. 허물을 벗듯 어기적거리며 기어 나와 물티슈로 간단히 세면을 한다. 물티슈를 뽑으려 손을 내밀자, 위로 솟아오른 채 꼿꼿이 얼어있는 물티슈가 만져졌다. 어젯밤 정말 추웠구나.

계란 프라이와 갈릭 수프로 간단히 식사를 해결하고 다른 외국 트레커 팀과 어울려 출발한다. 그동안 고생한 포터 나란은 쉬고 쿠시만 동행하기로 하였다. 로부체 롯지를 나서자 엷은 새벽빛을 받은 눕체가 바로 눈앞에 서 있었다. 어제 도착할 때에는 구름에 가려 그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다. 손을 내밀면 닿을 거리만큼 아주 가까이에 있었다. 그 웅장함에 한없이 작아지는 날 찾는다.

이제 다 왔구나! 트레킹 코스 어디서 에베레스트를 보든 항상 에베레스트, 로체, 눕체가 한데 어우러져 보이는데, 나 같은 초보자는 곁에서 누군가 설명을 해주지 않으면 세 산을 잘 구별할 수 없었다. 에베레스트가 최고봉이라는데, 어떻게 보면 눕체가 더 커 보였고, 로체와 눕체의 방향도 보는 곳의 위치에 따라 다르게 보였다. 긴 세월을 함께 해 온 세 녀석이 좋은 친구로 보인다. 세월과 함께 닮아가는 친구들.

히말라야의 하늘이 열리고, 거대한 설산 눕체가 눈앞에 나타났다.
▲ 여명에 비친 눕체(7864m) 히말라야의 하늘이 열리고, 거대한 설산 눕체가 눈앞에 나타났다.
ⓒ 윤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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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사람과 온기가 있는 곳! 자연과의 소통이 인간과의 소통으로 전화되는 곳! 롯지이다.
▲ 로부제의 롯지! 따뜻한 사람과 온기가 있는 곳! 자연과의 소통이 인간과의 소통으로 전화되는 곳! 롯지이다.
ⓒ 윤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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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를 보는 듯 말이 없다! 그저 걷고 보고 느낀다.
▲ 에베레스트로 향하는 길 명화를 보는 듯 말이 없다! 그저 걷고 보고 느낀다.
ⓒ 윤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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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걸으며 우측으로 쿰부 빙하가 긴 혀를 내밀며 억누른 숨을 내쉰다.
▲ 에베레스트로 향하며 만나는 빙하 길을 걸으며 우측으로 쿰부 빙하가 긴 혀를 내밀며 억누른 숨을 내쉰다.
ⓒ 윤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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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앞에 쌓아놓은 아름다움의 더미 때문에 아름다움을 볼 수 없었다

로부제를 떠나 처음 30분 정도는 걷기 편한 평탄한 길이다가, 갑자기 채석장 같이 울퉁불퉁한 돌들이 언덕을 이루며 불규칙한 길을 고락셉까지 이어놓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방의 설산이 거대한 병풍이 되어 우리를 세상과 문명으로부터 고립시켜놓는다. 아니 지리적 고립이 아니라 정신적 단절을 강요하고 있는 듯하다.

이제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홀로 자연 그리고 생명과 대면하라! 거추장스럽게 옭아매고 있는 사치스런 옷들을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자신을 내맡겨라. '진실'된 마음으로, '성실'한 의지로, '진리'를 마주할 준비를 해라. 20여 년 전 읽었던 책 중에 가물가물 기억의 끈을 붙잡고 있는 이야기 하나가 있다. 책 제목도, 저자도, 자세한 내용도 모르지만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어떤 한 아이가 세상에 태어났다. 호기심이 가득 찬 아이는 뒷동산에 올라 처음으로 자신이 살아갈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그는 경이에 찬 마음으로 흥분하게 된다. '아름답다. 눈부시다. 어찌,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으리! 이 아름다운 세상을 모두 가져야지.' 그는 세상의 온갖 아름다움을 소유하리라 다짐을 한다. 그로부터 그는 매일매일 세상의 아름다움을 모아 자기 앞에 하나둘씩 쌓아놓기 시작한다. 세월이 갈수록 소년 앞에 쌓이는 아름다움의 더미들은 높아만 갔다. 하지만 비극은 멀지 않아 찾아왔다. 소년이 더 이상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자신이 쌓아놓은 아름다움의 더미들이 세상을 가로막는 벽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어떨까? 나는 정말 세상을 진실하게 보고 있는 것일까? 내 앞의 벽은 없을까? 세상이 만들어 준 프레임 속에 갇혀 노예처럼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그 벽을 무너뜨려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 있는가? 그 벽이 곧 나인 것을 어떻게 무너뜨리겠는가?

그럼, 이 방법은 어떨까? 내가 만들어 놓은 벽 위로 올라서는 것이다. 그 벽을 받침대로 삼아 더 멀리 볼 수 있는 기반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 그렇게 하자. 나를 나답게 하는 모든 것을 부정하지 말고, 긍정하자. 하나도 버리지 말고 부둥켜 안자. 내 삶이다. 긍정이 더 넓은 자유를 허락해 주리라.

고락셉에 도착할 즈음, 왼편으로 푸모리와 칼라파타르가 아름다운 한 쌍의 부부처럼 그 자태를 보여준다. 마치 남편인 푸모리가 바로 앞에 아내인 칼라파타르를 앉혀 놓고 꼬옥  포옹하고 있는 형상이다.

드디어 이번 여행의 종착역인 칼라파타르가 보인다. 저 토산에서 뒤돌아서면 에베레스트와 쿰부히말라야 전체를 조망하게 된다.
▲ 왼편으로 보이는 푸모리(7138)와 토산 칼라파타르(5550) 드디어 이번 여행의 종착역인 칼라파타르가 보인다. 저 토산에서 뒤돌아서면 에베레스트와 쿰부히말라야 전체를 조망하게 된다.
ⓒ 윤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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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주세요! 제발!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 에베레스트에서 세상으로 뻗은 빙하 살려주세요! 제발!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 윤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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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승지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는 고락셉에 도착해 칼라파타르와 그를 뒤에서 꼬~옥 안아주는 푸모리를 본다.
▲ 십승지, 고락셉(5147)에 도착하다! 십승지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는 고락셉에 도착해 칼라파타르와 그를 뒤에서 꼬~옥 안아주는 푸모리를 본다.
ⓒ 윤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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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선물한 십승지! 인간이 파괴하다

고락셉에는 2개의 롯지가 있는데, 롯지 앞으로 축구 경기장만한 거대한 공터가 놓여 있다. 롯지와 공터 주위를 푸모리, 쿰부체, 에베레스트, 로체, 눕체 등 거대한 설산들이 성벽처럼 둘러싸고 있다. 나 같은 무식쟁이가 보아도 신이 만들어 놓은 요새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다. 다시 한번 신의 창조적 드러냄에 침묵으로 답한다. 

이 지형을 보며 우리나라 정감록에 기록된 십승지(十勝地)가 생각났다. 각종 예언서에 나타나 있는 십승지는 세상에 천지 대개벽이 일어나 재앙이 닥쳐도 이를 피할 수 있는 10곳의 명당자리를 말한다. 전염병, 흉년, 전쟁 등 인류가 종말에 처할 정도의 고난이 와도 그 땅의 사람들은 생명을 보존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무슨 기준으로 십승지를 정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서 있는 고락셉 또한 세상의 재앙을 피할 수 있는 땅이 아닐까? 아니 역사시대 이전부터 지금까지 이어온 이곳의 평화로운 모습이 모든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하지만 슬프게도 조금씩 재앙이 시작되고 있는 징조가 이곳에 드리워지고 있다. 재앙의 주인공은 바로 인간이다.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문명이다. 인간이 창조한 산업사회, 즉 굴뚝사회는 그들의 종족을 번성시키고 편안함을 증대시켰을지 모르지만, 역으로 자연은 서서히 죽어가며 종말을 고해가고 있다. 

히말라야의 고산들도 마찬가지다.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수 백 만년동안 얼어붙어 있던 만년설이 급속도록 녹아 내리고 있는 것이다. 만년설이 갑작스럽게 녹으면서 인근 나라에는 예고 없는 홍수 등의 자연재해가 발생하고 수 십 년 내로 만년설이 모두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한다. 만년설이 모두 녹은 후에는 가뭄과 기근이 히말라야 인근 지역을 습격할 것이다. 자연은 정직하니까. 모두 인간이 감당해야 할 짐이다. 이 죗값을 어찌 다 받아야 할까?

데카르트가 이야기한 것처럼 자연은 시계와 같은 기계일뿐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성을 가진 우월적 존재여, 자연을 지배하라. 위대한 이성과 수학적 계산을 통해 자연을 해석하라. 

영국의 과학자 제임스 러브록은 그의 책 <지구상의 생명을 보는 새로운 관점>에서 '가이아 이론'을 제시함으로써 데카르트적인 인간중심적, 기계론적 자연관에 메스를 가한다. 가이아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지구를 뜻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지구는 체온(대기)과 허파(아마존 유역 등의 삼림 지대), 피와 수분(바다, 강), 그리고 신체(암석, 흙)를 지니고 숨쉬며 살아온 생명체다.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물질 순환은 생물체가 일으키는 생리 작용에 의한다.

자연은 죽어 있는 기계일까? 살아 있는 생명체일까? 그리고 인간은?

생각의 꼬리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슬프게도 자연을 오염시키고 파괴한 주범은 재앙에서 벗어날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곧 십승지 역할을 하지 않을까? 결국, 그 피해는 고스란히 가난하고 힘없는 후진국 사람들의 몫이 될 것이다. 선진국은 생산하고 소비하며 파괴하고, 후진국은 굶주리고 고통 받고 죽어간다.

소비하는 자는 굶주리는 그들에게 '우리의 선진적인 과학기술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매스미디어를 통해 광고한다. 그리곤 콘크리트 건물 속에 앉아 에어컨 때문에 냉방병에 걸렸다며 짜증을 내면서 인터넷으로 주가의 등락을 확인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유희에 어떤 사람들은 해수면 상승으로 삶의 터전이 가라앉고, 사막화로 인해 유랑민이 되어야 하고, 도움의 손길 없이 질병에 생명을 내맡겨야 한다. 한쪽은 너무 많이 먹어 죽어가고, 반대쪽은 못 먹어서 죽어간다. 배불러 죽는 그들은 누구이며, 배고파 죽는 그들은 누구인가? 근본적인 패러다임의 변화 없이 누가 인간존엄성을 이야기하고, 신의 조화와 섭리를 이야기하겠는가?

삶은 나눌 때 완성된다.
기도하자. 자연과 인간, 그리고 생명에 대해서.
이제 먼발치에서 에베레스트를 바라보자!

덧붙이는 글 |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라 그곳에서 느끼고 고민했던 내용과 관련된 동서양 사상가의 사상을 빌려와 철학적 채색을 하였습니다.(공자에서 샤르트르까지)



태그:#네팔, #히말라야, #쿰부, #에베레스트,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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