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자락 아름다운 마을' 이야기를 연재하며
나와 가족, 친구들이 모여 사는 북한산 자락 인수동 사람들의 신명나는 삶을 소개합니다. 매일 스치는 이웃의 아름다운 인생사도 이야기하고, 더 좋은 마을을 가꿔가려고 애쓰는 이들의 다양한 노력과 제안도 알립니다. 우리 마을은 국립공원 바로 아래 있어서 높은 건물도 없고, 넓은 길도 없습니다. 재개발해야 할 대상으로 오르내리는 곳입니다. 그렇지만 차 두 대가 겨우 비껴가는 골목 안에서 벌어지는 일과 사연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갈아엎기에는 너무나 아깝습니다. 지금도 충분히 아름다운 이웃 이야기를 전합니다.
웬만한 사람들은 아직 이부자리에서 나오지 않은 새벽 여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간, 하얀 도복을 입은 이들이 심신을 단련하느라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이른 아침에 노래하는 게 부담이 되듯, 몸이 채 풀리지 않은 시간에 태껸을 하는 게 어색해보일지 모르겠다. 태껸을 시작한 사람들조차 처음엔 이른 아침부터 이렇게 몸을 쓰면 쉽게 지치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러나 막상 시작하니 괜한 걱정이었다고 한다. 새벽 태껸 수련자들은 신나고 활기 있게 몸을 쓰면서 땀을 흘리다 보면 머리까지 맑아진다고 말했다.
하얀 도복을 입은 여섯 사람이 우리 마을 사람들이 만든 극단 '신명나게' 연습실에 모였다. (태껸하는 사람들이 이 장소를 빌려 사용하고 있다.) 기본 중의 기본인 품밟기부터 차례로 몸을 풀어간다. 평소에는 거의 쓰지 않는 오금을 쓰고, 복근과 허리 등을 단련하는 보법이다. 맨 처음 배우는 동작이지만, 평생을 익혀야 하는 기술이다. 관장이라고 해도 이 기본 동작을 태껸답게 밟기 어렵다고 한다.
올려재기, 발재기, 무릎재기, 너울대기 등 10여 가지 기본 동작을 반복한다. 연습실 벽 전체가 유리라 자신과 친구들의 동작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수년을 수련해도 제대로 익히기 힘들다는 동작이지만 반복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익숙하지 않아 어색한 몸놀림을 눈으로 확인한다. 몸이 뜻대로 따라주지 않고 균형을 잃을 때는 우스꽝스럽기까지 하지만 실없이 웃는 이들은 없다. 마음을 닦아 신의 뜻을 깨치고 따르려는 새벽기도만큼이나 숭고한 자세로 몸을 다지려 한다. 그렇게 한 시간 남짓 훈련한 다음 둥그렇게 원을 그리고 서로 뒷풀이를 도와주고 난 뒤, 각자 삶의 자리로 흩어진다.
새벽에 몸 풀면 정신도 맑아져요
사실 태껸은 서울에서도 한 구에 전수관이 겨우 한두 곳 있을 정도로 흔치 않다. 곳곳에 태권도 체육관이 있는 것과 달리, 태껸하려면 차를 타고 멀리 가야 한다. 이런 마을에 태껸 바람이 분 것은 3년 전이다. 그 때까지 1년 남짓 태껸을 배우고 있던 김은영씨(아름다운마을초등학교 교사)를 따라 몇몇 동네 주민들이 함께 하기로 마음먹었다. 함께 전수관에 가는 게 아니라, 관장님을 마을로 모셔왔다. 한 사람에게라도 태껸의 맛을 보게 해주고 싶었던 관장님도 흔쾌히 응했다.
모든 수련이 그렇듯이 태껸도 만만치 않은 인내가 필요하다. 같은 동작을 천 번을 반복해도 되지 않다가 천한 번째 길이 트기도 한다. 그런데 천 번 가까이 와서 마지막 산을 넘지 못하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마을에서 태껸을 하던 사람들도 이런 한계를 늘 극복한 건 아니다. 처음에 십여 명이 힘차게 시작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둘 이런 저런 이유가 생겨 못 나오게 되었다. 결국 얼마만큼 성실하게 임하느냐, 자기와 싸움이 문제다.
그렇게 일 년 이 년이 지나면서 많은 사람이 들고 났다. 그렇지만 꾸준히 수련의 자리를 지키는 이들도 있다. 안기홍씨는 지난해까지도 몸이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는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는데, 최근에는 태껸하는 재미를 느낀다고 했다. 아무리 해도 변화가 없는 동작을 1년 가까이 하는 게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마지막 1개월에 '어 길이 잡히네' 하는 느낌이 어느 순간 찾아온단다.
무예 익히는 건 마음 닦는 일
나중에는 관장님 대신 김은영씨가 새벽수련을 맡았다. 유단자이기는 하지만 아직 누군가를 가르칠 때는 아니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하지만 수련자들의 격려를 받고 함께 배운다는 마음으로 태껸 수련을 인도한다. 그를 따라 올해 세 명의 주민들이 새롭게 배움의 길을 택했다. 굳어 있는 몸을 풀려는 청년, 유약한 심신을 단련하려는 직장인, 돌이 안 된 아기를 키우는 엄마가 도복을 입었다.
새롭게 시작하는 이들에게 김씨가 바라는 점은 하나다. 산을 넘어 몸을 수련하는 기쁨을 함께 나누자는 것. 그러자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 있다는 것을 서로 잘 안다. 시간이 갈수록 처음 품은 마음이 흐트러진다는 사실도. 누군가 포기하려 할 때 다른 이들이 "더 수련해야 한다" "새벽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수련은 멈추지 않아야 한다"는 말을 건네며 다시 일으키는 관계로 서야 한다. "왜 연습해도 되지 않느냐"고 토로하는 학생에게 "아직 천 번은 더 하라"고 해야 할 말을 하면 모두 도망가 버린다고 관장님이 말했단다. 쉽게 배우고 쉽게 써 먹으려 하는 얄팍한 마음으로는 하기 힘든 무예가 태껸이다.
새벽에 태껸을 배우는 이들에게 공통적인 자세가 하나 있다. 태껸을 싸우는 기술로 익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기 몸을 보호하려고 상대의 힘을 이용해 공격하려는 의지를 무장해제하지만, 타격을 가해서 상처를 주거나 다치게 하지는 않는다. 길게 수련한 이들은 동작 하나하나를 설명하면서, 모든 동작이 단지 상대가 싸우려 덤비는 기세를 꺾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이제 갓 수련을 시작한 이들도 태껸은 폭력적이지 않아 좋다고 말한다. 무예를 익히면서 폭력을 써먹어보려는 작은 욕망을 다스리며, 비폭력과 평화를 추구하는 마음을 기르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