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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여행자는 모두가 가능한 게 아니라 이미 종자가 따로 있다는 걸 일러준 작은 애. 여행을 너무 즐기는 스타일이었다.
 생활여행자는 모두가 가능한 게 아니라 이미 종자가 따로 있다는 걸 일러준 작은 애. 여행을 너무 즐기는 스타일이었다.
ⓒ 김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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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애는 온실 형 작은 애는 잡초 형

식당에서 절망했다면 터미널에서는 불행했습니다. 차에 오르기까지 무려 3시간을 기다려야 했는데, 추위와 배고픔을 느끼며 앉아있는 동안 정말 힘들었습니다.

큰 애의 표정은 날 더욱 힘들게 했습니다. 괴롭지만 아무 말도 않고 참아내고 있는 게 역력한 그 표정을 보면서 애잔함과 미안함, 후회 이런 감정이 마구 올라왔습니다. 무모하고 대책 없는 엄마 만나서 애들이 생고생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도 애들이 이 어려움을 참아내고 돌아가면 앞으로 어려운 일이 생겨도 지금 쌓은 인내력으로 슬기롭게 잘 극복할 것이라고 나 자신을 위로를 했습니다.

아마도 애들에게는 지금이 살아오면서 겪은 일 중 가장 고생스러운 경험일 텐데 꽤 난이도가 있는 고난이었습니다.

작은 애야 워낙 낙천적이고 에너지가 넘치다 보니까 오히려 이런 다이나믹한 상황을 즐기는 편이었습니다. 난세에 영웅 나온다는 말이 있는데 우리 작은 애는 언제나 이런 상황에서 자기 진가를 발휘했습니다. 결코 지치거나 재미없는 표정을 안 보였습니다. 사실은 너무 재미있어했습니다.

설악산 대청봉을 오를 때 13시간의 등반 동안 한 번도 힘들어하지 않을 만큼 작은 애는 넘치는 에너지의 소유자입니다. 써도 써도 마르지 않는 에너지를 소유한 꽤 운 좋은 사람 중의 한 명이다 보니까 몇 끼 굶는 것, 하루 종일 걷는 것, 추운 데서 자는 것, 이런 건 우리 작은 애에게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작은 애를 괴롭히는 것은 무료한 시간입니다. 오늘이 내일 같고 내일이 오늘 같은 날들, 방학 때 아무 일 없이 집에 있어야 하는 그런 시간을 두려워하는 편이지요. 그런데 그 시간에서 탈출해 다이나믹의 극치인 지금은 하늘로 튀어오를 만큼 행복한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여행이 끝났을 때 우리 일행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이번 여행을 가장 즐긴 사람이 우리 작은 애라는 것입니다. 여행을 업으로 삼는 생활 여행자의 싹수가 보인다는 말도 덧붙일 정도였습니다.

반면에 큰 애는 하우스 속에 자란 화초다 보니까 비바람과 강한 햇빛이 쏟아지는 들판에 내놓은 것 같은 상황이 되면 죽을 것처럼 괴로워했습니다. 큰 애에게는 쳇바퀴 돌아가는 것처럼 돌아가는 일상이 오히려 안전한 울타리였습니다. 거기서 평안을 느꼈던 애입니다.  그러니 큰 애가 지금 처한 우리 현실에 불만을 품는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사실 큰 애는 지금의 다이나믹한 현실에 불만과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있습니다. 큰 애의 불만은 시한폭탄처럼 언젠가는 터질 것이라는 걸 난 알고 있었습니다.

매끼 따뜻한 밥에 편안한 잠자리에서 잠들다가 갑자기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고 몸을 따뜻하게 데워줄 난로 하나 없이 거리를 떠돌고 있는 현재를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물론 사서 한 고생이지만 사실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기에 나도 당황스럽고 고통스러웠습니다. 내가 이러할진대  우리 큰 애가 겪는 고통은 꽤 심각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터질 그 시한폭탄을 난 감수해야 합니다.

여행을 좀 버거워했던 큰 애. 여행 내내 맑았다 찌푸렸다를 반복했다.
 여행을 좀 버거워했던 큰 애. 여행 내내 맑았다 찌푸렸다를 반복했다.
ⓒ 김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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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미널 화장실서 <고래사냥>체험을 하다

애들은 낮에 다니느라 피곤했는지 의자에 앉아서 졸았습니다. 피곤한 것도 있지만 추워서 더 졸리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추우면 오히려 정신이 번쩍 날 것 같은데 이상하게 추우면 더 심하게 졸릴 때가 있습니다. 침낭을 풀어서 애들의 어깨에 씌워주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저녁 샤레인 온천으로 가는 10시간짜리 버스를 탈 것인데 아마도 밤 내내 달려서 내일 아침이나 돼야 도착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장거리 버스를 탈 때나 얼굴을 볼 수 있는 일행들이 버스에 오르기 전에 좀 씻고 탄다고 화장실로 우르르 몰려갔습니다. 한 번도 여행을 안 해본 나와 달리 이 선생님들은 방학마다 여행을 다녔기에 40개국을 다녀온 사람이 있을 정도로 모두들 여행 베테랑입니다.

나 같은 초보는 무조건 이들의 행동을 따라하면 되기에 나도 세면도구를 챙겨서 화장실로 갔습니다. 화장실은 세면대가 6개 정도 있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하나씩 맡아서 양치질도 하고, 세수도 했습니다. 어떤 선생님은 사과까지 씻었습니다.

이건 어디서 본 모습이었습니다. 영화 <고래사냥>에는 거지노릇을 하던 안성기가와 배철수가 지하철 화장실에서 씻고 자고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장면을 난 참 인상적이게 봤었습니다. 공부에 압박감을 느끼던 중학교 때 이 영화를 봤는데 마음 한 구석에는 이들의 자유를 갈망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갈망이 싹을 틔워 지금 열매를 맺는 모양입니다. 난 영화에서 본 안성기와 김수철처럼 공용 화장실서 양치질도 하고 세수도 하고, 발까지 씻었습니다. 

우리가 씻고 있을 때 이란 여자들은 우리 뒤에서 서로 귀엣말을 하며 우리를 동물원 원숭이 구경하듯 지켜보았습니다. 이란은 아직 여행의 불모지라서 여행자를 만나기 어렵습니다. 이곳저곳 다녔지만 외국인을 거의 보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니 이들 이란 여자들이 우리처럼 생긴 동양인을  만나기는 정말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동양 여자들이 떼거지로 화장실에서 씻는다고 난리를 부리고 있으니 좋은 구경거리였음은 분명할 것입니다.

씻고 나니까 기분이 좀 나아졌습니다. 대합실로 돌아왔을 때 애들은 여전히 고개를 떨구며 졸고있었습니다. 난 그 옆에서 조용히 차시간을 기다렸습니다.


태그:#이란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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