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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BS 대하사극 <자명고>
 SBS 대하사극 <자명고>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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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역사가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편에는 우리가 익히 아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서기 32년(대무신왕 15년) 4월 고구려 3대 왕 대무신왕의 아들인 호동이 옥저에 놀러갔다 낙랑왕 최리를 만나게 된다. 최리는 호동을 보고 "그대의 용모가 범상치 않은데 혹시 북국(北國) 신왕(神王)의 아들이 아닌가?"하며 그를 데리고 돌아와 자신의 딸과 혼인시킨다.

호동은 본국으로 돌아와 사람을 보내 최리의 딸에게 이렇게 전했다. "네가 너희 나라 무기고에 들어가 북과 나팔을 깨뜨릴 수 있다면 내가 예를 갖춰 너를 아내로 맞을 것이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너를 맞지 않을 것이다" 예부터 낙랑에는 북과 나팔이 있는데 외적의 침입을 받게 되면 저절로 울리는 신묘한 힘을 갖고 있어 낙랑을 지켜냈었다. 바로 그 때문에 호동이 최리의 딸을 시켜 그 북과 나팔을 부수게 한 것이다.

최리의 딸은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무기고에 들어가 북의 면과 나팔의 주둥이를 베어내고 호동에게 알렸다. 이에 호동이 대무신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습격했다. 최리는 북과 나팔이 소리를 내지 않았으므로 고구려가 쳐들어오는 줄 모르고 방비를 하지 않고 있다가 고구려 군사들이 코앞에 이르게 되자 북과 나팔이 깨어진 것을 알았다. 결국 최리는 자신의 딸을 죽이고 밖으로 나와 항복했다.

이 짧은 1900여년 전의 이야기가 드라마로 탄생했다. SBS 월화드라마 <자명고>가 지난 10일, 베일에 감춰져 있던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려서부터 한 번쯤은 들어봤던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사랑이야기, 스스로 울려 외적의 침입을 경고한다는 자명고가 존재했다는 믿기 어려운 신비로운 이야기,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의 뒤편에 숨겨져 있던 고구려의 대외 정복 활동기 등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들어진 <자명고>에 대한 관심은 방영 전부터 뜨거웠다.

'여성사극', 새로운 트렌드를 주도해나갈 듯

삼국사기의 호동왕자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나 드라마의 내용은 사서의 기록 그대로이지 않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다소 믿기 어려운 자명고의 이야기, 북이 스스로 울려 외적의 침입을 경고한다는 이 비현실적이고 비과학적인 현상을 제작진은 '사실 자명고는 북이 아니라 사람이 아니었을까?'라고 해석해낸다. 적의 침입을 미리 알 수 있었던, 어떤 스파이 시스템이었을 것이란 해석이었다. 그리고 그 해석을 바탕으로 드라마에는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이외에 또 한 명의 주인공인 자명공주가 등장한다.

<자명고>의 연출을 맡은 이명우 감독은 "새로운 스타일의 사극을 만들겠다"고 했다. 확실히 <자명고>는 여타의 사극과는 조금 차별화된 면을 갖고 있다.

일단 주인공이 '여성'이라는 점에서 차이를 드러낸다. 호동(정경호 분)과 삼각관계를 이루며 극 중에서 팽팽한 신경전을 펼치게 되는 두 여주인공, 낙랑(박민영 분)과 자명(정려원 분)의 존재감은 기존의 사극에서의 전통적인 여성상과는 확실히 차별화된다. 이런 점에서 <자명고>는 현재 방영 중인 KBS <천추태후>, 그리고 제작 단계에 있는 MBC <선덕여왕>과 더불어 '여성사극'이라는 새로운 트렌드를 주도해나갈 것으로 보인다.

과감한 와이어 액션신을 통해 풍성한 볼거리를 갖췄다는 점도 다르다. 기존 사극에서의 호쾌한 볼거리란 대체로 웅장한 전투신이 대부분이었다. 제작진 역시 군사들의 공성전이나 백병전같은 전투신에 공을 들였지, 개인과 개인 간의 격투신에는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자명고>는 마치 무협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 느껴질 정도로 일대일 격투신에 집중했다. 이명우 감독은 "평지에서 펼치는 단순한 액션신을 보여주는 것이 싫었다"고 말할 만큼 액션신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자명고>는 '무협사극'을 표방한다. 제작진은 마치 영화 <와호장룡>의 한 장면 같은 우아하고 아름다우면서도 호쾌하고 진중한 멋이 있는 액션신을 그려내려 했다. 극 중에서 낙랑과 자명이 자명고를 사이에 두고 사투를 벌이는 장면은 3일에 걸쳐 촬영되었다고 한다. 여성사극과 무협사극이라는 두 새로운 코드가 어울려 탄생한 '여성무협사극', <자명고>가 여타의 사극과 확실하게 구분되는 점이다.

과감한 와이어 액션신을 통해 풍성한 볼거리 제공

기존의 사극과는 달리 현대적인 어투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도 차이를 보이고 있다. <자명고>에서는 진중하고 고풍스러운, 기존의 정형화된 사극 톤을 배제하고 현대적 감각의 대사가 등장한다. 어투만이 현대적인 게 아니다. 어휘 역시 기존의 사극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이 사용된다. '감동의 도가니탕', '존심 상하게'와 같은 요즘식의 말이 자연스럽게 쓰인다. 이는 낡은 느낌을 지양하고 새로운 <자명고>만의 스타일을 만들자는 기획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기존의 사극과는 차별화된 점이 <자명고>의 장점이라 할 수 있겠지만, 반대로 우려되는 부분도 있으니, 바로 역사왜곡의 가능성이다.

<자명고>는 요즘 사극의 트렌드인 '팩션형(faction) 사극'을 표방한다. 팩션형 사극이란 최소한의 역사적 사실에 작가가 만들어낸 허구가 덧씌워진 형태의 사극을 말한다. <자명고>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이야기의 근간을 이루는 호동과 낙랑에 대한 남아있는 사료가 <삼국사기>에 기록된 몇 줄에 불과하고, 따라서 골격에 살을 덧붙이는 과정은 철저하게 작가의 상상력에 기댈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스스로 울리는 북이라는 뜻의 '자명고'가 실은 사람이었다는 해석은 선뜻 믿기 어려운 비현실적인 사료의 기록을 나름대로 풀어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드라마에서 차용되고 있는 여러 '가설' 중에는 역사적으로 사실이 아닌 것도 있다. 일례로 <자명고>에서는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이 멸망하고 그 자리에 낙랑국이 세워졌다는, 이른바 '교체설'을 받아들였는데, 역사적으로 이는 사실이라 보기 어렵다.

고구려 대무신왕이 서기 32년에 최리의 낙랑국을 복속시킨 것은 확실하나,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은 그 뒤로도 오랫동안 존속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가 미천왕 14년(서기 313년)에 낙랑군을 쳐 남녀 2천명을 포로로 삼았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낙랑군은 서기 313년까지 존속했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낙랑군이 멸망하고 그 자리에 낙랑국이 세워졌다는 <자명고>의 '교체설'은 맞지 않는 말이 된다.

역사왜곡의 가능성과 더불어 주연배우들의 미숙한 연기력은 극의 완성도에 흠집을 낼 위험이 있다. <자명고>는 문성근, 홍요섭, 이미숙, 성현아, 김가연, 이한위 등 탄탄한 연기력의 배우들을 조연으로 캐스팅해 극에 안정감을 더했다. 그렇지만 실질적으로 극을 이끌어가는 주연 3인방에는 사극 경험이 전무한 정경호, 정려원, 박민영을 캐스팅했다. 대군을 지휘하는 용맹한 장수의 목소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정경호의 대사 톤이나, 박민영과 정려원의 어색한 연기는 극의 몰입을 방해할 요소가 될 수 있다.

이명우 감독과 정성희 작가는 <자명고>를 '정통 사극의 틀에서 벗어난 멜로성이 짙은 드라마'라고 했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이야기를 역사에서 가져와 재구성하여 멜로사극으로 재탄생된 <자명고>는 확실히 기존의 사극과는 여러 면에서 차별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런 차별화된 개성이 시청자에게 부담과 어색함으로 작용할지, 재미와 신선함으로 다가갈지, 그것은 전적으로 제작진의 역량과 출연진의 연기력에 달려 있다. 과연 <자명고>는 <꽃보다 남자>의 독주를 견제할 수 있을까?


#자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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