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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4일 사촌형님 한 분이 별세하셨다. 고향(충남 태안)에서 함께 살아오신 큰댁 세 분의 사촌형님들 중에서 막내이신 분이 향년 72세를 일기로 삼형제분 중에서 제일 먼저 세상을 뜨셨다.

요즘 세상에 나이 72세라면 '한창 시절'이라는 말도 듣는다. 경로당에 가기도 쑥스러운 나이이고, 경로당에 가면 도리 없이 '따까리(심부름꾼)' 노릇을 해야 하는 시절이다. 그런 분이 세상을 뜨셨다. 그것도 두 분 형님을 앞질러서….

60대 중반까지만 해도 강단 좋고 기력이 좋으셨던 분이었다. 당연히 가장 오래 사실 줄로 알았던 분이 겨우 일흔 넘긴 연세로 세상을 하직하시니, 올 때는 순서가 있어도 갈 때는 순서가 없다는 말이 또다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형님은 당뇨를 가지셨다. 우리 집안에 당뇨환자는 형님과 나, 두 사람뿐이었다. 유전적 요인은 찾아볼 수 없는 사항이었다. 나는 베트남 전쟁 고엽제 후유증 판정을 받았다. 형님은 수십 년 동안 낚시가게를 운영했다. 젊은 시절부터 허구헌날 맨손으로 납봉을 만지셨다. 그 납봉 접촉이 원인이 되어 형님이 당뇨에 걸리셨을 것으로 생각된다.

형님은 혈당 관리에 애를 먹었지만, 그렇다고 뚜렷한 합병증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노쇠가 빨랐다. 급속도로 쇠약해지신 모습으로 이태 전쯤부터는 바깥출입도 거의 못하시고 줄곧 자리보전을 하셨다. 원인은 상심과 우울증일 터였다.

딸 하나에 아들 둘을 두신 형님은 2002년 큰아들을 잃었다. 당시 36세이던 큰아들이 간경화로 세상을 떴다. 아버지가 젊은 시절 초대 회장을 했던 지역의 유수한 사회단체의 회장도 하며 매사에 활발하고 적극적이었던 큰아들이 젊은 나이에 간을 다친 것은 폭음 탓이었다. 또 그 폭음은 주변 친구들에게 빚 보증을 많이 서 주고 고스란히 거액의 빚 감당을 하게 된 탓이었다.

그렇게 어이없이 젊은 아들을 잃은 형님은 깊은 상심을 안게 되었다. 그런 중에도, 아들을 잃은 것이 계기가 되어 형님은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나는 당질이 대전 성모병원 병상에서 숨을 거두기 직전 원목실의 수녀님을 오시게 하고 그에게 대세(代洗)를 베풀게 하여 영혼을 구했다. 숨이 얼마 남지 않은 당질에게 세례 받을 뜻을 물을 때의 불안과 긴장감, 당질이 겨우 고개를 끄덕여 뜻을 표하던 순간의 감격을 평생 동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당질이 병상에서 운명하기 직전 대세를 받고 스테파노라는 세례명을 얻은 것을 계기로 그해 당질댁과 두 아들도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형님 내외도 2004년 세례를 받고, 2005년에는 견진성사도 받았다.

견진성사 내 사촌형제들 중에서 가장 먼저 천주교 신자가 되신 '작은형님' 내외분은 2004년 8월 15일 세례를 받고, 2005년 9월 4일 유흥식 라자로 대전교구장 주교님으로부터 견진성사를 받았다. 그때만 해도 형님은 비교적 건강하신 모습이었다.
견진성사내 사촌형제들 중에서 가장 먼저 천주교 신자가 되신 '작은형님' 내외분은 2004년 8월 15일 세례를 받고, 2005년 9월 4일 유흥식 라자로 대전교구장 주교님으로부터 견진성사를 받았다. 그때만 해도 형님은 비교적 건강하신 모습이었다. ⓒ 지요하

이렇게 '성가정'을 이룬 형님은 주일미사에 열심히 참례했고, 60대 이상 노년층 남성 신자들 모임인 '요셉회'와 일부 요셉회원들로 이루어진 레지오 마리애 단체에도 참여하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열심한 신앙생활로 큰아들을 잃은 슬픔과 상심을 무난히 극복해 가시는 것 같았다.

하지만 형님에게 큰아들의 '빈자리'는 유난히 컸다. 몸이 불편하신 데다가 사회활동 폭이 적으신 장형(長兄)을 대신하여 젊은 시절부터 집안의 대소사를 관장해오신 형님은 이런저런 일에서 큰아들의 빈자리를 많이 느끼며 아쉬워하시는 것 같았다. 그런 연유로 세상에 없는 아들에 대한 그리움이 점점 커지고, 그에 따라 상심도 깊어지시는 눈치였다.

형님은 장손 집안의 3남 위치에 있으면서도 타고난 적극성으로 일찍부터 선산 관리를 맡아 하셨고, 씨족의 대동보 편찬 사업이 진행될 때는 나로 하여금 우리 일문의 기록 존치를 놓치지 않도록 했고, 8대조부모님의 효열정문(孝烈旌門) 중건 사업도 주도적으로 시행했다. 1999년 정문 중건 낙성식 이후부터는 매년 한식날마다 정문 앞에서 시제를 지내는 것도 형님이 주도하신 일이었다.

270여 년의 뿌리가 내려져 있는 태안군 근흥면 두야리에서 출생하신 형님은 태안초등학교와 태안중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으로 유학을 가서 인천공고를 졸업했다. 육상으로보다는 서산시 팔봉면의 구도항에서 배를 타고 인천을 많이 다니던 시절이었다. 군복무 후에는 줄곧 고향에서 자수성가로 경제적 기반을 닦으면서, 젊은 시절부터 봉사단체에 참여했다.

서산군 태안면 시절이던 1960년대 태안의용소방대에 참여하여 오랫동안 대장 직무를 수행했다. 오늘의 태안소방대의 기초를 닦은 것은 물론이다. 또 태안이 서산군에 속해 있던 시절에는 서산군 읍·면 소방대 연합대의 대장도 오래 했다.

1975년에는 로터리클럽이나 라이온스, JC(청년회의소) 등과는 달리 지역의 순수 자생적 봉사단체인 '태안반도청년회'의 초대 회장으로 기초를 닦았고, 장년 시절에는 '태안반도장년회'의 초대 회장으로 사회봉사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 지역에서 봉사와 선행으로 모범을 보여오신 형님은 그에 따라 많은 '패(牌)'를 지니게 되었다. 두 개의 국무총리상과 태안군민대상(봉사효행부문)을 비롯하여 상패, 감사패, 공로패, 기념패 등으로 구분되는 패들이 도합 70여 개에 이른다. 그 중에서도 마을 주민들에게서 '주민일동' 이름으로 받은 감사패를 가장 값진 것으로 여기셨다.

형님은 그 패들을 만들어 주신 이들의 정성을 생각해서 모두 잘 보존하셨지만, 그것들을 자랑거리로는 여기지 않았다. 언젠가 한 번은 내게 이런 말씀도 하셨다. "덧없고 허무한 세상에서 저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라나. 다 필요 없는 거여." 하지만 그 모든 패들은 봉사와 선행 속에서 살아오신 형님의 의로운 삶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증표가 되어주고 있다.

그런 형님도 한때는 나와 대립각을 세운 모습으로 사시기도 했다. 박정희 시절에는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쪽에 적을 두기도 했고, 전두환 시절에는 민주정의당의 지역 관리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가톨릭농민회 쪽에서 활동하는 나와는 자연 대립각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1987년 대선 때는 '서산·태안 공정감시단'의 태안 대표로, 1992년 대선 때는 '태안 공정선거감시단' 상임의장으로 활동했는데, 형님은 나와 경찰서 정보과 형사들 사이에서 어떤 완충 역할을 하시기도 했다.

그런데 형님은 1990년대로 들어오면서 태도가 확연히 달라졌다. 내 발언들에 귀를 열고 경청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집안은 일년에 대략 여섯 번의 제사를 지내왔는데, 제례 후 음복을 할 때는 여러 가지 정치 관련 얘기도 나오기 마련이었다. 나는 그 기회를 잘 활용했는데, 종래는 내 얘기를 경청하고 공감을 표하기도 하는 형님의 변한 모습과 가치관에 큰 감사와 함께 어떤 희망을 가지기도 했다.

어떤 고정관념에 철저히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시각이나 가치관을 수용할 수 있는 신축성을 지니셨기에 형님이 노년 세월에 접어들면서 천주교 신앙 쪽으로도 눈을 뜨셨을 것으로 생각된다. 생각하면 여간 감사하고 다행한 일이 아니다.

형님이 큰아들을 잃은 데서 연유하는 상심과 우울증을 극복하지 못하신 것도 세상의 허무를 깊이 수용하신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세상의 덧없음과 허무를 깊이 수용하신 것은, 스스로 아집과 집착을 버릴 줄 아는 그 유연함에 원인이 있을 듯싶다.

어쨌든 형님은 일흔둘(1938년 생) 아까운 연세로 세상을 하직하셨다. 어떤 이는 형님에 대해 "봉사(奉仕)의 표상(表象)으로 많은 이들과 질박한 정을 나누며, 오랫동안 지역사회에 큰 귀감을 안겨주었던 분"이라는 헌사를 하기도 했다.

지난달 26일 오전 10시 태안성당에서 장례미사를 지낼 때 '고별식' 직전에 가족대표로 신자들과 조문객들에게 인사말을 하면서 나는 이런 말을 했다.

"고인께서는 신앙생활을 오래 하시지 않았지만, 청년 시절부터 지역사회와 이웃을 위한 남다른 봉사와 선행으로 하느님의 점수를 많이 따셨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느님 앞에 점수를 많이 가지고 가셨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그런 형님이 오늘 장례미사의 은총도 누리시니, 저로서는 여간 다행이 아니다 싶습니다. 슬픔 속에 기쁨이 존재하는 이치, 신앙의 신비를 다시 한번 헤아려보게 됩니다."

형님은 운명하기 며칠 전 병상에서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관련 보도를 텔레비전으로 보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오랫동안 말문을 열지 않았던 분이 신앙과 관련하는 감동을 표하기도 해서 가족들이 고마움을 느끼며 회생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가지기도 했다고 한다.

형님도 천주교 신앙 안에서 선종(善終)을 하셨다. 선생복종(善生福終)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셨다. 서산의료원에서 눈을 감으신 형님은 태안에서는 서산의료원보다도 더 먼 서산중앙병원장례식장으로 가셔야 했다. 서산의료원상례원과 태안의 두 곳 장례식장 모두 마침 자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서산 중앙병원장례식장에서 조문을 받는 이틀 동안 실로 많은 이들이 먼 거리를 불문하고 찾아주셨다. 연도도 거의 끊이지 않았다. 150명이 함께 식사할 수 있는 특실을 이용했는데도 넘치는 조문객들을 모시기 위해 비어 있는 옆방을 두 개나 사용해야 했다. 그 사실에서도 형님이 봉사와 선행 속에서 얼마나 바르게 사셨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장례미사에 함께 하면서, 태안소방대에서 노제를 지낸 후 태안군 근흥면 두야리 선영에 안장할 때 하관예절을 행하면서, 형님이 천주교 신앙 안에서 선종하신 것을 생각하며 '슬픔 속에 기쁨이 있는 이치'를 다시 한번 헤아릴 수 있었다. 형님께 더없이 감사한 마음이었다.

이제 집안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일은 고스란히 내 몫이 되었다. 이런저런 집안 일을 처리하면서, 지난 세월 집안 대소사를 놓고 형님과 함께 의논하고, 함께 움직이고, 형님이 큰아들을 여읜 이후로는 제삿날 저녁마다 내 차로 형님을 큰댁에 모셔가고 오셔오고 했던 일들을 많이 그리워하게 될 것 같다. 그러다 보면 나에게도 세상 떠나는 날이 오겠지….


#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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