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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식은 아침부터 시름에 잠겨 있었다. 마침 그 날은 아버지의 생신이었다. 그는 시골에 있는 아버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생신에 대어가지 못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밥상을 앞에 놓고 흰 수염에 눈물을 적시고 있을 아버지의 모습이 자꾸 어른거렸다. 그는 서울과 경상도가 이제는 다른 나라라는 사실을 새삼 생각했다. 인민군이 영동을 점령했다는 소문이 들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버지가 있는 곳과도 그리 멀지 않았다.

가뜩이나 건강도 안 좋은 아버지였다. 그는 정확한 전황을 알고 싶었다. 정말 북한 측의 말대로 영동을 점령하고 추풍령을 넘어 이제는 낙동강을 압박하고 있는 것일까? 국군이 서울을 그렇게 빨리 내주고 도망친 것을 보면 능히 그럴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성식의 짐작은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7월이 지나가면서 벼는 예년처럼 짙푸르게 성장하고 있었지만, 국토의 대부분은 붉은 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남한군은 이미 호남지방 전역을 아무 저항 없이 인민군에게 내 준 상태였다.

들에는 여름 철새인 백로가 전쟁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느 해 마냥 한가로이 노닐고 있었다. 곳곳 마을길마다 꽃이 지기 시작한 감나무들에서는 푸릇한 감이 굵어지고 있는 것도,  꿀벌들이 나름대로 분주한 것도, 암소가 새끼소를 핥아주고 있는 것도, 언제나 그 여름 그 농촌의 정경이었다. 산천은 총성과 포성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제 모습 그대로 있는 듯했다.

김성식은 전화(戰禍)의 슬픔을 토로한 두보(杜甫)의 시 구절이 떠올랐다.

나라가 망했는데도 산하는 그대로이고
봄의 성 안에 풀과 나무만이 깊도다.

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
<춘망, 春望>

노근리, 학살의 징조가 감돌기 시작하다

농민들에게는 전쟁의 먹구름이 짙다 한들 우선 농사가 더 큰 관심이었다. 농부들에게 7월은 바쁜 계절이었다. 그들은 너 나 없이 김매기에 열중했다. 농군들의 잔등에 뜨거운 햇살이 퍼부어지고 있었다. 잡풀을 솎아내는 그들의 손놀림은 마냥 익숙하고도 분주했다. 그들은, '벼는 농부의 발소리를 들으며 자란다'는 속담을 잘 알고 있었다. 더욱이 비가 넉넉히 내려준 그 해 여름, 농자(農者)들은 풍성한 가을걷이를 회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계속되면서 수백만의 한국인은 집을 잃고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다. 7월 중순이 넘어가면서, 미 전폭기들은 한국의 도시들에 물량을 계산하지 않고 폭탄을 떨어뜨렸다. 한국 백성들은 소음이 큰 이 비행기를 '쌕쌕이'라고 불렀다. 개중에는 '호주기'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것은 어느 면에서 슬프고도 우스꽝스러운 추리였다.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의 국적이 '오스트리아'인데, 그것을 '오스트레일리아'와 구별하지 못한 사람들은 대통령의 처갓집이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즉 호주에서 비행기를 보낸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미군이 제공권을 장악해가고 있었지만 육지의 전황은 달랐다. 7월 셋째 주말이 되면서 미 육군의 후퇴는 오히려 빨라졌다. 미군 패잔병들은 거칠고 맹목적이었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곳에는 비행기의 폭격을 요청했고, 비행기의 폭격이 끝난 후에는 무차별로 기총을 난사했다.

김성식의 아버지는 충격으로 몸져누워 있었다. 사촌 조카의 참변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부모 없는 형제를 제대로 돌봐 주지도 못해 늘 마음에 걸렸었는데, 두 조카 중의 동생이 얼굴이 반쯤 떨어져나가는 부상을 입었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소식을 김성식이 알 리는 없었다. 김성식은 나중에야 아버지를 만나 구헌· 구학 형제의 비극을 전해들은 것이었다. 

김성식의 아버지가 사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영동 인근에 주곡리라는 마을이 있었다. 아버지의 조카들은 그 주곡리에 살고 있었다. 논일을 하던 주곡리 사람들은 미군들이 북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안도했다고 했다. 어마어마하게 큰 대포를 매단 장비 차량들이 대전 방향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래서 주민들은 난리를 겪지 않고도 농사일을 마무리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여름 방학을 시작하는 1학기 종업식에서 학교 선생님은 미군이 공산주의자들을 북으로 몰아내어 곧 전쟁을 끝낼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집에 와 부모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주민들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연도에 나와 싸우러 가는 미군들에게 성조기와 태극기를 흔들어 주었다.

그런데 웬 일이었을까? 북으로 갔던 미군들이 이내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올라갈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후퇴하고 있었다. 주곡리의 어른들은 모여서 흉흉한 시국담을 주고받으며 앞일을 의논했다. 그러나 작은 땅뙈기밖에는 없는 그들에게 마땅한 방안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들은 도저히 한창 물이 올라 있는 논벼를 버리고 피난갈 수가 없었다.

주곡리는 초가와 소나무가 있고 양지 바른 산허리에 조상의 무덤이 모셔져 있는 전형적인 한국의 농촌이었다. 포성이 하루가 다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종종 언덕 너머 기찻길에서 피난 열차가 숨 가쁘게 남하하는 것이 보였다. 화물차는 물론 지붕 위까지 위태롭게 올라 앉아 있는 피난민들을 주곡리 사람들은 예사롭지 않게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그들은 단정히 정리된 전답들에 눈을 돌리고는 마음을 다잡았다.

건어물 장사를 하던 김성식의 육촌 구헌은 그래도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다. 아직 소년  티를 벗지 못한 그는 전답이 없었으므로 마음만 먹으면 걸어서라도 피난갈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남기로 했다. 피난하자니 생계가 막막했던 것이다. 게다가 9살 동생 구학이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 물론 그들은 공산당에게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좌익분자들이 인민재판으로 사람을 때려죽인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이른 아침 미군이 주곡리 마을 근처에 나타났다. 그들은 마을 동쪽 도로변에 지휘본부를 설치했다. 성조기와 함께 펄럭이는 부대 깃발에는 '제5기병연대'라고 쓰여 있었다. 오후가 되자 다른 대대가 합류했다. 그들 2개 대대는 1000명 정도의 병력에 트럭과 중화기를 갖추고 있었다.

미군은 주곡리로 이어지는 도로와 하천 자갈밭에 진지를 구축했다. 그들은 장비들을 시운전해 보고 있었다. 디젤 매연이 마을 인가까지 흘러 들어왔다. 진지 구축을 끝낸 병사들은 천막 안에서 카드놀이를 하거나 아니면 논가를 어슬렁거리며 농부들을 무심히 쳐다보고는 했다. 개구쟁이들은 껌이나 초콜릿을 얻는답시고 미군에게 다가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주민들은 코와 키가 크고 가슴에 털이 부숭부숭 나 있다는 이방인들을 멀리 했다. 마을사람들은 미군들이 여자들을 해코지한다는 소문을 벌써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마을에는 이팔만이라는 이름의 품팔이꾼이 있었다. 평소 행실이 좋지 않아 마을 사람들이 꺼리던 청년이었다. 그가 미군에게 다가가 온갖 손짓을 다하며 대화하는 일이 자주 눈에 띄었다. 미군은 그에게 담배를 보이며 손가락을 꼬여 들었다. 그것은 담배와 여자를 바꿀 수 있느냐는 제스처였다. 도쿄 유흥가에서 흥청거렸던 그들은 한국의 산골에서도 비슷한 짓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팔만이 미군 두 명을 인도하여 여자가 사는 집으로 데려갔다. 이팔만은 담장 아래서 사방을 감시했고 미군 두 명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여자의 집에서 나왔다. 물론 여자를 위협하여 성욕을 채운 뒤였다. 주곡리의 이 젊은 여자는 며칠 후 세상이 바뀌었을 때 맹렬한 반미여성동맹 위원이 된다. 그녀는 이팔만을 미제의 앞잡이라 하여 찾아 나섰지만 이미 그는 도망쳤는지 더 이상 마을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 후 미군 병사들이 어슬렁거리기 시작하면 동네 여자들은 사립과 방문을 죄다 걸어 잠갔다. 할머니들은 딸이나 손녀들에게 일부러 더러운 옷을 입히고 얼굴에 검댕을 발라 주었다. 16세 마을 소녀 박희숙은 미군이 마을길에 나타나자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어머니는 그녀를 장독에 들어가게 하고 뚜껑을 급히 덮었다.

"미군은 젊었거나 늙었거나 여자만 보면 잡으려 했어요."

급기야 미군이 마당에 들어서면 할머니들이 낫을 들고 달려드는 상황으로까지 치달았다. 미군은 저녁 무렵 한 상가(喪家)에 무단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두 병사가 상가의 여기저기를 마구 헤집고 다니다가 상여를 흔들며 장난을 쳤다. 그들은 장례용 요령을 집어 흔들어 대기도 했다. 그러다가 싫증이 났는지 요령을 상여에 던져 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멀쩡한 눈을 뜨고도 이런 행동을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다.

덧붙이는 글 | 한국전쟁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역사팩션입니다. 이 소설은 주 2~회 게재됩니다.



#노근리#호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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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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