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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일요일 11시 결혼식. 비록 이른 시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많은 손님들이 오셔서 우리의 결혼을 축하해 주었고, 우리의 앞날을 축복해 주었다.

 

이미 앞선 기사에서 밝힌 바 있듯이 이렇게 어려운 시기, 누군가의 결혼을 축하해주는 일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알고 있었기에 하객들에 대한 고마움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신랑 입장. 그리고 이어지는 결혼식. 그러나 워낙 정신이 없었기에 사진이나 동영상을 봐야만 겨우 떠오르는 그때의 기억들.

 

어쨌든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준비과정에 비해 우리의 결혼식은 무사히 끝났다. 돌이켜보면 결코 쉽지 않았던 지난 시간이었지만, 신부의 손을 잡고 결혼식장을 걸어 나오면서 느꼈던 감동은 그 모든 걸 상쇄해주고 남음이 있었다. 이제부터 펼쳐지는 동반자와 함께 하는 나의 새로운 일상.

 

그러나 녹록치 않은 현실은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당장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신혼여행 대신 회사로 출근을 하게 된 것이다. 몇 차례의 구조조정 끝에 인원이 태부족하게 된 회사의 월말 마감을 두고 담당자인 내가 그냥 나몰라라 신혼여행을 떠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루 더 일하고 신혼여행, 왜?

 

나를 대신해서 마감할 수 있는 여유 인력을 두지 않는 회사. 그것은 곧 휴가와 연차 사용이 어렵다는 것을 의미했고 나는 그만큼 주위 동료와 회사의 눈치를 봐야만 했다. 어쩌겠는가. 신혼여행을 다녀와 거리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는 신혼여행을 조금 미룰 수밖에.

 

결국 결혼식 이후 우리의 웨딩카가 향한 곳은 공항도, 호텔도 아닌 신혼집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나의 다음 날 출근 채비를 한 뒤, 결혼식장에서 무료로 제공해주는 서울 시내 호텔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비록 웨딩카 대신 지하철을 이용해야 했지만, 집에서 첫날밤을 지내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려니.

 

다음 날, 나의 상황을 이해해준 신부 덕에 나는 별 탈 없이 출근을 했고 오전부터 열심히 회사 일을 마무리 짓기 시작했다. 이것만 끝내면 신혼여행을 갈 수 있다는 애절한 바람과 함께.

 

오후 3시, 드디어 나는 마감을 끝냈고 나를 데리러 온 새신부와 함께 동료들의 질시어린 눈총을 받으며 인천 공항으로 향했다. 일생에 하나 밖에 없는 신혼여행도 여행이었지만, 사람이 부족하여 휴가며 연차도 마음대로 쓸 수 없는 이 시기에 그래도 많은 이들의 축하를 받으며 적지 않은 기간 동안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난 뿌듯했다.

 

자! 이제 본격적인 7박 8일의 신혼여행의 시작이다.

 

1달러 당 1611원...은행 직원이 울컥한 까닭

 

오랜만에 건너는 영종대교. 가장 최근에 해외에 나갔던 것이 3년 전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였던가. 부모님을 모시고 동생과 함께 했던 그때와 달리 이번에는 내 옆에 나의 신부가 앉아 있었다. 조금은 낯설었지만 그만큼 설레는 마음.

 

우리의 여행 유형은 베트남에서 묵을 숙소와 왕복 비행기 티켓 그리고 현지에서의 비행기를 예약해 놓은 에어텔이었다. 어설프지만 나의 영어와 그녀의 중국어 실력이라면 그래도 현지에서 돌아다니는데 불편은 없을 거라는 생각에 가이드 여행을 지양한 것이다. 게다가 인터넷으로 찾아본 바, 베트남은 배낭족들을 위한 여행사 시스템이 워낙에 잘 발달되어 있어서 현지에서 가이드 여행을 구하는데 불편함이 없다지 않은가. 가격도 훨씬 저렴하고.

 

그러나 문제는 정작 낯선 베트남에서가 아니라 대한민국 인천공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은행에서 환전을 하려고 보니 하루가 다르게 뛰어버린 그 환율 앞에 그만 넋이 나가고 만 것이다. 

 

3월 2일 현재 1달러 당 1611원. 물론 은행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어쨌든 요 근래, 아니 10년 동안 내가 본 최고의 환율인 듯 했다. 한 달 전 신혼여행 계약 때만 해도 1200원대였건만 어찌 신혼여행 당일에 이렇게 많이 오를 수 있단 말인가. 2일 하루 분단위로 1원씩 올랐던 환율. 3월 위기설이라더니, 당장 그 위기가 바로 내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도대체 정부는 뭐하고 있단 말인가. 현실은 이런데도 마냥 걱정하지 말라며 삽질이나 하는 그들.

 

한심한 표정으로 달러를 지켜보고 있자니 앞에서 돈을 세고 있던 은행 창고 직원이 한 마디 건넨다. 일본 사람들이 와서 환전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더 가관이라고. 그네들의 지폐 몇 장에 원화 돈다발을 내어주다 보면 울컥한다는 것이 그녀의 이야기였다. 상황이 이러하니 일본이 엔으로 제주도를 사겠다는 막말을 서슴없이 뱉을 수밖에.

 

베트남서 한국돈 찾는 일은 없겠군

 

직원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결혼을 준비하면서 돌아다녔던 남대문과 명동의 거리가 떠올랐다. 백화점에서부터 노점상까지 모두들 짧은 일어를 구사하며 일본인들을 붙잡기에 혈안이 되어 있던 사람들. 실제 요즘 서울 중심의 상업가는 모두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펼치고 있다. 엔고현상으로 인해 워낙에 많은 일본인들이 한국으로 관광을 오고 있기 때문이다. 비행기를 타고 와 한국에서 일제 제품을 사는 것이 일본 내에서 사는 것보다 훨씬 싸다고 하니 현재 원화의 가치가 얼마나 형편없는가.

 

물론 국수적이고 민족 지상주의적인 생각으로 최근의 엔고 현상과 일본인들의 관광을 폄훼할 의도는 없다. 그러나 어쨌든 이 땅의 노동자들이 피땀 흘려 만든 제품들이 일본인들에게 아주 싼 값어치로 팔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썩 유쾌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이는 실물경제의 문제도 문제지만, 우리의 아둔한 정책자들이 시장의 신뢰를 잃어버림으로써 자초한 결과 중의 하나가 아니었던가.

 

어쨌든 손을 덜덜 떨며 건넨 묵직한 원화 뭉치를 대신해서 돌아온 가벼운 달러뭉치를 보고 있자니 착잡함을 떨칠 수 없었다. 3년 전만 하더라도 1달러와 맞먹었던 1천원 권이 캄보디아에서 인기더니 이제는 한국 돈을 찾는 사람은 전혀 없겠구먼. 제발 베트남의 물가가 여전히 싸기만을 기도할 뿐이었다.

 

도대체 소위 개발도상국의 하나인 베트남을 가는 우리도 이렇게 심각한데 이 시기 서구 유럽이나 미국에 간 관광객들이나 유학생들은 과연 어찌 살고 있을까. 부디 지금같이 불안한 환율시장이 어서 빨리 진정되길 바랄 뿐이었다.

 

불황에도 면세점은 사람들로 '바글바글'

 

 

환전을 끝내고 수속을 마친 뒤 공항 게이트 쪽으로 서서히 움직였다. 그 길에 늘어서 있는 각 면세점들이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이렇게 경제가 어렵고 실업이 양산되고 있지만 그래도 어쨌든 하늘을 찌르는 면세점의 인기. 하긴 이런 시대에 해외여행을 나선 사람들이 하루 세끼를 걱정할 사람들은 아닐 터. 결국 그것은 점점 극심해져가는 이 사회의 양극화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덕분에 씁쓸한 웃음을 짓는 나. 그렇다면 신혼여행을 국내 제주도 대신 베트남으로 가겠다고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나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환전을 하면서 벌벌 떠는 것을 보니 양극화 사회에 있어서 상층부는 아닌 것 같고, 과거 소비의 기억을 더듬으며 아직도 중산층인양 착각을 하고 있는 '서민'이라 할 수 있을까?  

 

어쨌든 면세점에서 관세가 부가되지 않은 상품을 사기위해 두리번거리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니 해외여행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관세로부터 자유로운 지금 이 지역은 19세기부터 체계화 된 국민국가체제하에서 국가와 국가 간의 경계요, 그만큼 국가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공간 아니던가. 난 그곳에서 딱 그만큼의 자유를 느끼고 있었다.

 

게이트를 통과하여 비행기 착석. 곧 이어 엔진의 굉음이 들리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비행기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동체는 이내 하늘을 날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점멸하는 수많은 불빛. 어렸을 때부터 보고 또 봐도 전혀 지겹지 않은 그 풍경이었다. 하늘을 나는, 어디론가 미지의 공간으로 떠나는 설렘.

 

비행하기 시작하여 얼마 되지 않자 역시나 예쁜 스튜어디스들이 기내식을 나눠 주었다. 계속되는 맥주 리필과 함께 즐기는 즐거운 저녁식사. 나의 계속되는 맥주 리필을 아주 친절한 목소리로 매번 받아주는 스튜어디스들을 보고 있자니 문뜩 7년 전 탔었던 외국 항공기의 스튜어디스들이 떠올랐다.

 

펑퍼짐한 아줌마와 나이 지긋한  여성들이 스튜어디스의 주축이 되었던 그 항공기. 당시 그것은 충격이었다. 그들은 스튜어디스 하면 무조건 젊고 예쁜 미혼의 여성들이어야 한다는 우리네 편견이 얼마나 한심한가를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반면 국내 항공사의 아리따운 스튜어디스들. 학부 사회학 시간에 배우기를, 아시아의 개발 도상 국가들이 외국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노동의 유연성을 강조하는 방법으로 노동 전면에 나긋나긋한 어린 여성을 배치했다고 하더니 아직도 우리는 그 못된 관습을 깨기는커녕 아주 자연스럽고 자랑스럽게 유지하고 있는 바였다. 오히려 가부장적 사회에서 외모지상주의가 더욱 강화되어 스튜어디스라는 직업이 어느새 하나의 특수한 계층으로 자리 잡은 천박한 우리 사회.

 

 

얼마쯤 갔을까? 기내 안내 모니터에 호치민이라는 단어가 뜨기 시작하자 들뜨기 들었다. 그것은 단순히 신혼여행에 대한 설렘이 아니라, 호치민이라는 지명이 주는 어떤 묘한 감정이었다.

 

4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한국 국적을 가진 이들이 얼마나 많이 이곳을 찾아 왔던가. 과연 그 후예의 나는 이곳을 찾아 어떤 마음가짐을 갖고 베트남 사람들을 대해야 하는 것일까? 과거 미국을 도와 소위 더러운 전쟁에 참여한 침략국의 국민으로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결국 내가 형언할 수 없던 그 묘한 감정은 죄의식에 가까운 듯 했다. 현대사를 공부한 사학도로서 외면할 수 없는 수치심이 바로 그곳에 묻혀 있었다.

 

전 세계가 침략전쟁으로 정의한 베트남전에서 오로지 반공만을 읊조리며 달러를 벌기 위해 용병을 파병한, 그리고 그 자본으로 경제를 일으켜 세운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느끼는 그 낯 뜨거움. 따라서 이곳 베트남은 소위 진보와 보수를 구분할 수 있는 가장 명확한 공간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베트남전 참전을 두고서는 명확한 두 의견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금 나는 바로 그 베트남의 호치민, 과거 우리의 우방이었던 월남의 수도 사이공 위를 날고 있었고, 이제 곧 그 땅을 밟게 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신혼여행 첫 날은 시작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환율, #신혼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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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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