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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3월 18일.

춘분이 얼마 남지 않은 날 아침입니다. 황사로 목도 마음도 칼칼한데 아이들이 노란 산수유 꽃잎을 들고 학교에 들어섭니다.

 

 "선생님, 산수유가 피었어요."

 

녀석들, 어제 산책길에 산수유가 필랑말랑한다고 감탄하며 얘기해 줄 때는 흘려 듣는 것 같더니, 아이들 눈이 보배입니다. 먼저 보고 발견한 것에 더 애정과 신비를 느낀다는 간단한 진리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아이들의 관심은 어떤 때는 참 섬세합니다. 산수유꽃만 보고 지나치고 마는 어른들과는 달리 산수유 나무 밑에 떨어져 있는 산수유 열매를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선생님 산수유 열매요" 하고 내미는 손바닥에 바짝 말라 버린 산수유가 있습니다. 겨우내 텃새들의 식량이 되거나, 땅에 떨어져서 움틀 준비를 해야 할 산수유 열매가 이렇게 그냥 시멘트 길바닥에서 '쓰레기'취급을 만든 시대입니다.

 

 

비단 산수유만 하겠습니다. 가을 낙엽들도 마찬가지지요.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야하는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는 문명은 도심 곳곳에서 낙엽 쓰레기 치우기 전쟁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오염된 빗물과 공기로 모아 놓아 봐야 거름도 만들지 못하는 쓰레기 신세가 된 것이지요.

 

봄의 전령사는 산수유 이야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누군가 오늘 아침에 집에서 거미를 봤다고 하자 너도 나도 봤다고 합니다. 날씨가 갑자기 따뜻해지면서 곤충들도 기지개를 펴고 슬슬 세상으로 나오는 시기였던 거지요. 산 아래 마을이라 봄소식이 더딘 곳이지만 어김없이 봄은 찾아왔습니다. 지난 주 봄비가 내린 이후로 꽃샘 추위라 할 만한 것이 찾아와 "음력 이월 바람이 눈보라보다 차다"는 속담을 실감했는데 어제부터 갑자기 기온이 올라 두껍게 꺼내 입은 옷이 무색해지는 날입니다.

 

아이들과 함께 기상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어제 오늘 기온을 알아보았습니다. 서울 지역의 어제와 오늘 최고 기온은 18.8도로 지난 30년간의 평년값 9.9도보다 무려 두 배나 높았습니다. 갑자기 추웠다가 갑자기 더웠다가 종잡을 수 없는 날씨, 기후 변화 시대를 사는 우리 아이들이 어떻게 살게 될지 조금 두려운 생각도 들었습니다.

 

내일 모레면 봄의 가운데로 드는 춘분입니다. 춘분에는 밭 갈고 논 갈고 씨 뿌리고 본격적인 일년 농사를 시작하는 시기기 때문에 농사와 관련된 속담이 많습니다.

 

이월이 되면 머슴은 호미 쥐고 울고 여자는 부엌문 잡고 운다.

이월 이십일날 비가 오면 대풍이 든다.

이월밤은 추워야 보리 풍년이 든다.

춘분에 서풍이 불면 보리흉년이 든다.

이월 이십일날 비가 오면 대풍이 들고 구름이 끼면 중풍이 들고 날씨가 맑으면 흉년이 든다.

 

봄 가뭄이 무섭다고 겨우내 말랐던 땅을 갈고 새 농사를 시작하는 농부에게 그야말로 봄비는 반가운 손님이었나봅니다. 우수나 경칩에도 비는 반가운 손님으로 풍년의 밑거름처럼 이야기되고 있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생활과 관련된 속담은 주로 늦추위에 대한 것이 많았습니다.

 

이월 늦추위에 중발 터진다.

꽃샘추위 때문에 설늙은이 얼어 죽는다.

이월에서 삼월로 바뀌는 때의 추위는 겨울같이 춥다.

이월바람이 눈보라보다 차다.

 

지난 주에 늦추위를 톡톡히 겪은 터라 그런지 아이들 입에서 공감하는 말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 여세를 몰아 그럼 너희들 말로 속담을 만들어 보자 했습니다.

 

삼월 늦추위에 겨울옷 다시 꺼낸다.

꽃샘 추위에 내복 벗은 거 후회한다.

삼월 늦추위보다 황사 바람이 더 무섭다.

춘분이 되니 곤충들이 대박이다.

춘분이 되니 산수유와 매화꽃이 피었다.

춘분이 되니 수수꽃다리 꽃순이 피어오른다.

 

옛 사람들은 음력을 써서 2월이라 했지만 우리는 주로 양력을 써니 3월이라 하자 했습니다. 에버랜드 나들이 갔다가 꽃샘추위와 황사 때문에 좋다가 말았다는 말도 아이들에게 공감을 얻은 이야기였습니다.

 

춘분은 낮의 길이가 점점 길어져서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날입니다. 천지 운행의 법칙을 간파한 조상들의 '누적된 지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즈음 초저녁 동쪽 하늘에는 봄철 별자리, 동방청룡 7수가 떠오릅니다. 오리온 자리, 처녀자리, 천칭자리는 익숙한데 우리 별자리 이름은 익숙하지 않지요. 그래서 동방 7수 별자리를 보며 왜 봄을 청룡에 비유했는지 이야기를 나누어봅니다.

 

청룡의 뿔 각수, 목 부분 항수, 가슴 부분 저수, 배 부분 방수, 심장 부분 심수, 꼬리 부분 미수, 항문이라는 기수 7개 별을 늘어 놓으면서 청룡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서양 별자리로 하면 처녀자리, 천칭자리, 전갈자리지요.

 

 

 7개 별을 늘어 놓아 만든 용의 모습입니다.

 

 

아이들이 배열해 놓은 모습이 재미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천상열차분야지도에서 동방청룡 7수를 볼 때 이게 용 맞나 싶기도 하고, 가슴 부분이라는 저수와 심장 부분이라는 심수는 왜 떨어져 있나 싶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이 상상한 용의 모습과 하늘의 별자리는 다를지라도 '청룡'보다는 '드래곤'이, '귀신'보다는 '몬스터'가 더 일상화되어 있는 현실에서 이렇게 우리 문화적 감수성을 키워가는 것이 소중하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이미 사신도 그림을 도록에서 본 아이들은 언제 주작, 현무, 백호를 할 거냐 아우성입니다. 동방청룡을 밤 하늘에서 찾아본 다음에 하겠다 했습니다. 4월, 태백산으로 드는 봄을 갈무리하는 들살이를 떠나면 깊은 산속에서 각수의 빛나는 뿔을 볼 수 있겠지요.

 

봄의 전령사 산수유꽃은 어김없이 도시에도 꽃을 피우지만, 산수유 열매는 시멘트 바닥에서 쓰레기가 되고 있습니다. 여기 저기 출몰한 곤충들 역시, 반갑지 않은 손님처럼 도시에서는 천덕꾸러기입니다. 춘분날 저녁 동쪽 하늘에서 떠오르던 청룡의 힘찬 기상은 온갖 전기 불빛에 가려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해는 뜨고, 별도 뜨고, 봄도 찾아옵니다.

덧붙이는 글 | 아름다운마을학교 춤추는방과후배움터는 북한산 자락 인수동에 자리잡은 대안학교입니다. 매주 수요일 절기 공부를 하며 우주에 대한 생명에 대한 감수성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이 절기 공부는 교보생명교육문화재단의 환경교육현장지원 프로젝트에 선정되어 지원을 받고 있는 프로그램입니다.


#춘분#동방청룡#아름다운마을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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