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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사안에 박정희 전 대통령만한 인물도 없을 것이다. 민주주의 발전을 가로막은 독재자와 산업발전에 기여한 대통령이라는 시각이 여전히 엇갈리고 있다. 대표적인 서민금융기관인 새마을금고는 그의 집권과 동시에 등장했던 재건국민운동 속에서 탄생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집권에 성공한 박 전 대통령은 안호상 박사를 본부장으로 각 시·도에 지부를 두는 재건국민운동본부를 구성해 박정희식 근대화사업을 추진했다. 당시 부평구(경기도 인천시 북구)지부장은 전 대인병원(현재 중앙병원으로 바뀜) 전현수 원장의 부친인 전병집씨가 맡았다.

 

인천 최초의 새마을금고인 산곡2·4동 새마을금고의 역사는 여기서 출발한다. 당시 재건국민운동 부평구지부 산곡2동 회원이었던 산곡2·4동새마을금고 김종봉(75) 이사장을 비롯한 열사람이 6만원을 모아 '관동주'(현 산곡1 주택재개발정비사업구역)에 새마을금고를 창립했다.

 

 

부평을 얘기할 때 꼭 빠지지 않은 것이 바로 부평미군기지다. 지금도 부평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는 미군기지가 당시에는 더 넓었다. 부평1동과 산곡동, 청천동 일대 대부분이 미군기지였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쓰던 조병창(병기를 만들던 곳)이 45년 해방과 더불어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미군기지로 전환돼 지금에 이른 것이다.

 

'관동주'는 '관동조'에서 나온 말로 한국전쟁 후 피난민들이 정착해 미군과 한국인을 상대로 한 '집장촌'을 형성했던 곳이라, 이곳 주민들은 이를 폄하시켜 '관동주'라 불렀다. 원래 '관동조'는 일제의 관동군을 지원하기 위한 시설이 들어섰던 곳이다.

 

산곡2·4동 새마을금고가 이 곳에 자리를 잡았던 것은 당시 이 일대가 서민들의 주거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아파트단지와 GM대우 부평공장으로 변한 곳이 미군기지와 논밭이었기 때문에 먹고 살기 힘들었던 이들은 미군기지에 의지하고 살았으며, 그렇게 한푼 두푼 모은 돈이 새마을금고의 밑거름이 됐다.

 

김종봉 이사장은 "이젠 다들 꿀꿀이죽하면 뭔 줄 알잖아. 미군기지에서 나온 음식물 외에도 다른 것들도 많았는데 그때 일주일에 한 번씩 미군이 자신들의 폐품을 대상으로 입찰을 실시했거든. 나도 거기에 응찰해 물건을 떼와 내다 팔곤 했지"라며 "여기가 일제 조병창에서 근무했던 사람, 미군기지에서 근무했던 사람, 나처럼 물건 떼와 팔았던 사람, 농사짓던 사람들로 구성된 마을이었는데, 한 600가구 정도 됐던 것 같다"고 당시를 전했다.

 

100% 신용대출이 가능했던 60년대 '신용'

 

이유야 어떻든 그 와중에 재건국민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 열사람이 모여 6만원을 모아 설립했다. 당시 재전국민운동 산곡2동 모임은 월 회비가 500원이었다. 김 이사장을 비롯한 회원 10명은 회비 500원 중 200원으로는 자장면을 먹고, 남은 300원은 적립해 1963년 10월 자산 6만원으로 산곡2동 새마을금고를 설립했다.

 

초대 이사장은 이용휘씨가 맡았으며 10명의 발기인들이 운영위원·여신위원·교도위원·감사위원·회계위원 등을 각각 맡았다. 이는 지금의 이사·여신담당직원·홍보담당직원·감사·총무 등에 해당한다.

 

김종봉 이사장은 당시 회계위원을 맡았다. 김 이사장은 "월급 같은 것은 당연히 없었고 다들 우리 마을을 위해 일한다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사무실도 없어서 그때 우리 집이 담배 가게 할 때라 가게 앞에 책상 하나 펼쳐놓고 돈 빌려주고 그랬다"고 말했다.

 

그는 또 "요즘은 담보 없으면 대출 안 해 주잖아. 그때는 최대 대출 금액이 20만원 정도였다. 보통 10만원 내외가 제일 많았는데 인감도 필요 없었다"며 "그저 종이 한 장에 '나 얼마 빌려가서 언제 갚겠노라'고 쓴 뒤 도장 한번 찍고 나면 그걸로 끝인, 말 그대로 100% 신용대출이었다. 그게 가능했던 것은 이웃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까지 헤아릴 정도로 이웃 사정에 모르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게 곧 신용이고 사회적 담보였다"고 당시를 전했다.

 

인천 최초로 비인가 상태에서 출발한 산곡2동 새마을금고는 1970년에 정식 금고로 등록한다. 당시에 새마을금고법이 없는 상태라 모든 정관을 신용협동조합정관을 이용했다. 새마을금고의 모태가 신용협동조합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산곡2동 새마을금고는 당시 현 산곡신용협동조합에서 정관을 가져와 정식금고로 거듭났다.

 

6만원 금고가 30년 흘러 900억 금고로 성장

 

부평미군기지터에도 변화가 생겨 한국베어링(현 한화아파트 자리)·전남방직(현 금호아파트 자리)·신한제분(현 현대5차아파트 자리) 등의 공장이 들어섰고, 또한 수출4공단이 들어서며 부평에 인구가 대거 유입되기 시작했다.

 

더불어 산곡2동 새마을금고도 성장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시중은행은 없고 산곡2동 새마을금고와 산곡신용협동조합이 전부였다. 우리은행의 전신인 상업은행과 농협, 국민은행 등이 들어선 것은 나중의 일이다.

 

때문에 당시 '관동주'와 산곡동의 노동자와 서민들이 저축과 대출을 위해 주되게 이용했던 곳이 새마을금고와 신협이었고, 이들은 지금도 산곡동과 청천동에서 지역금융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20~30년 된 새마음금고 조합원들의 특징은 은행에서 아무리 높은 이자로 유혹을 해도 은행이용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유인 즉 그들의 30년 애환이 이곳에 배여있기 때문이다.  

 

김종봉 이사장과 더불어 산곡2·4동 새마을금고의 산증인은 김현기(49) 전무다. 86년 새마을금고에 첫발은 내딛었던 스물일곱 청년이 어느덧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의 나이를 앞두고 있다. 그의 청춘이 고스란히 이곳 새마을금고에 담겨 있는 것이다.

 

김현기 전무는 "11만원 받고 일할 때인데, 입사했을 때 자산이 4억8000만원 정도였다. 먼저 있던 직원이 나가고 난 뒤 87년부터 실무책임자 일을 해왔는데 지금은 별거 아닐 수도 있지만 우리 자산이 10억 넘었을 때 하늘을 날듯이 기뻤다"고 말했다.

 

박정희 대통령 당시 재건국민운동 일환으로 출발한 새마을금고는 신협과 더불어 대표적인 금융협동조합이다. 조합원이 되기 위해서는 출자금을 내야하고, 금고는 기본적인 여수신업무 외에도 설립 목적 자체가 상부상조와 자립에 있다 보니 조합원 복지사업·지역 환원사업을 전개해야한다. 밥알이 한 톨 한 톨 모이듯 모아진 금액이 어느덧 900억원이 됐다.

 

또한 새마을금고는 시중은행과 달리 외국자본이 들어와 있지 않아 이익금이 고스란히 지역에 환원되는 구조다. 대부분의 새마을금고는 장학사업과 경로잔치 등의 복지사업을 펼치기도 하고, 매년 명절 '사랑의 좀도리 운동'을 전개해 어려운 가정에 쌀을 나눠주고 있다. 산곡2·4동 새마을금고는 이밖에도 금고 사옥에 무상 독서실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인천시새마을금고실무자협의회(53개 금고 전무·상무들의 모임) 회장을 맡고 있기도 한 김 전무는 "우리뿐만 아니라 부평구 22개 동에 11개 새마을금고가 들어서있다"며 "하나같이 이웃들과 울고 웃으며 성장했다. 2009년 유래 없는 경제 위기를 예고하고 있지만, 가난했던 60~70년대를 버텨온 자산을 토대로 서민금융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부평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새마을금고, #산곡2ㆍ4동새마을금고, #재건국민운동, #산곡동, #관동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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