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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박연차 리스트'가 물귀신같이 떠오르고 있다. 작년만 해도 풍문으로만 떠돌았을 뿐 긴가민가했던 것의 정체가 조금씩 드러나면서 정치권을 아연 긴장시키고 국민을 놀라게 하고 있다. 어떤 이는 이 사건이 김영삼 정부 시절 한보그룹 정태수 스캔들과 맞먹는 규모라고도 하고 다른 어떤 이는 단군 이래 최대의 뇌물 스캔들이 될 것이라고도 진단하고 있다.

 

박연차 리스트란 물론 태광실업 박연차 회장에게 뇌물이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사람들의 명단을 일컫는 말이다. 이에 연루되어 이미 구속된 중요 인사만 해도 상당수다.

 

전혀 깨끗하지 않은 '참여정부'

 

작년 11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형 건평씨와 노무현 대통령의 부산상고 동기 정화삼씨가 구속되었다. 정대근 전 농협회장과 이정욱 한국해양수산개발원장도 구속되었다. 3월 13일에는 이강철 전 청와대 정무특보가 구속되고 21일에는 박정규 전 청와대 민정수석과 장인태 전 행정자치2차관도 구속되었다.

 

여기에다 이광재 민주당 의원이 소환되고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에 대해서도 내사가 진행 중이다. 김혁규 전 경남지사는 박연차 회장에게 정치인을 소개하는 일을 도맡았다고 한다.

 

이런 소식은 우선 노무현 지지자들을 심란하게 만들 것이다. 구속자들이 친노인사 일색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대부분은 억대 이상의 뇌물 또는 정치자금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작년만 해도 전 정권에 대한 표적 사정이니 정치 보복이니 하는 말을 하던 사람들도 이제 더 이상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수 없게 됐다.

 

일단 이 사건은 이른바 친노 또는 386을 자처하던 정치인들이 우리 생각 이상으로 곪아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악취가 진동하는 친노그룹'이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는 수준이다. 그들 역시 오염된 기성 정치인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이래 놓고도 그들은 여태 마치 자기들이 정치개혁의 선도자인 양 행세해 왔다. 실망스러운 일이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스캔들의 정점에 노 전 대통령이 있다. 본인은 부인하고 있지만 노 전 대통령은 박연차 회장에게 50억이나 되는 돈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봉하마을 사저 부지의 일부도 박 회장에게서 구입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박연차 회장을 자기 후견인으로 보지 말아 달라는 말을 해왔다.

 

박연차 회장은 1990년 마약 흡입과 환각 매춘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전력이 있는 인사다. 그는 김대중 정부 시절 한나라당 재정위원으로서 당비 10억 원을 한나라당에 자진납부하기도 했다. 이런 사람을 노 대통령이 우대하고 20여 명의 열린우리당 의원이 떼거지로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하니 대관절 열린우리당이라는 집단은 그 정체성이 무엇이었는지 의구심만 더할 따름이다.

 

노무현 정부는 박연차 회장이 휴켐스와 세종증권을 부정한 방법으로 헐값 매입한 사실을 알고서도 수사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박연차 회장의 발호를 조장한 주체는 명백히 노무현 정부라고 할 수 있다.

 

이명박 정권으로 향한 박연차의 로비

 

박연차 사건이 던지는 문제점은 친노세력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명박정부에서 홍보기획비서관을 지낸 추부길 아우어미디어그룹 대표이사도 2억의 뇌물을 받아 구속되었다. 이것은 박연차 회장의 돈 로비가 전 정권에 이어 현 정권에까지 미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추 전 비서관은 이 대통령의 형 이상득 의원의 선거캠프(15대~17대)에 몸담았던 사람이다.

 

그가 뇌물을 받은 시점은 청와대를 떠난 후였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이 이유를 들어 그의 비리를 개인적인 것으로 치부한다. 하지만 국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퇴직 인사에게 2억대의 뇌물이 갈 정도라면, 현직 인사에게 가지 않았으리라는 법이 없지 않은가.

 

이종찬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연루된 점은 청와대로서도 달리 변명할 수 없게 만드는 요소다. 그는 이명박 정부의 초대 민정수석이었다. 민정수석은 부정부패를 감시하는 핵심 직책이다. 그런 그가 박연차 회장과 긴밀한 사이를 유지하면서 그의 돈을 7억이나 받아서 그 중 5억4천만 원을 변호사 사무실 개업비용으로 사용했다. 이종찬 전 수석 측에서는 이 돈을 빌린 것이라고 하고 몇 달 뒤 상환했다고 해명했지만 이를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그는 박연차 회장의 변호를 맡으려 하다가 청와대의 만류로 그만두기도 했다.

 

여기다 천신일 새중나모여행사 대표까지 개입돼 있다. 천신일씨는 이 대통령과 아주 가까운 인물이다. 그는 고려대학교 교우회장이기도 하다. 이 대통령은 당선 후 바쁜 일정 중에도 고려대 신년하례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는 이상득 의원, 최시중 방통위원장과 함께 이 대통령의 친위 원로그룹 멤버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이런 그가 태광실업의 세무조사 무마와 박연차 회장의 검찰 고발 방지를 위해 이종찬 전 수석, 김정복 전 중부국세청장과 함께 수시로 대책회의를 열었다고 한다. 21일자 MBC <뉴스데스크>는 박연차 회장의 돈 10억 원이 한 기업인에게 전달된 정황이 포착되었다고 보도했는데 여기서 한 기업인이란 천신일 대표를 말하는 것이다.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천 대표는 10억 원의 뇌물을 받고 박연차 회장을 구하려고 시도했다고 봐야 한다. <한국일보>는 또한 지난 대선을 앞두고 거액의 정치자금이 천 대표에게 제공되었다고 보도했다. 이런 일련의 일들은 박연차 회장의 돈 로비가 이미 현 정권의 권력 핵심에까지 미쳤다는 것을 말해준다.

 

박연차 돈 로비에 국회의원들도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박연차 회장 스스로 30여 명의 정치인에게 돈을 건넸다고 했고, 박연차 리스트에 70명 정도가 오르내린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한상률 전 국세청장과 세무조사 무마 로비 미스터리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경위가 어떻든 태광실업에 대한 세무조사가 이루어졌고 박연차 회장은 구속되었으니 그것은 '실패한 로비'였다고 규정한다. 그런데 과연 그런 것일까? 태광실업의 세무조사와 관련된 문제는 오히려 더 깊은 의혹을 불러일으킨다.

 

태광실업에 대한 세무조사가 이루어진 시점은 지난해 7월이다. 박연차 회장과 여비서의 수첩이 압수된 것은 이 세무조사에서였다. 여기에는 박연차 회장이 만난 인사들의 이름과 만남의 정황이 상세히 메모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한상률 국세청장은 세무조사 결과를 지휘계통을 거치지 않고 이명박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다.

 

의혹은 여기서 생긴다. 국세청장이 민정수석을 배제하고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한 데에는 심상치 않은 연유가 있을 터이다. 1차적으로 사안이 매우 중차대하기 때문이었을 테고, 다음으로 전 민정수석이 관련된 일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현 정부와 가까운 인사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한상률 국세청장은 그런데  갑자기 석연치 않은 그림 로비 의혹에 휘말려들었다. 전군표 전 국세청장의 부인이 "한상률 국세청장이 차장 재직 시 '학동마을'이라는 그림을 뇌물로 바쳤다"고 폭로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말은 자기 남편이 뇌물을 받았다는 범죄 사실을 스스로 실토하는 것이다. 청와대에서는 이것을 검찰에 고발하겠다고 하더니, 소리 없이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한상률 청장은 포항에 가서 이상득 의원과 친분이 있는 지역인사, 대통령의 동서 등과 골프를 쳤다는 구설에 휘말리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현직 유지를 위한 비겁한 접대골프로 치부됐다. 

 

아무튼 물러나지 않겠다고 버티던 한 청장은 힘을 잃고 말았다.  그는 사퇴 후 칩거에 들어갔고 지금도 국세청장 자리는 두 달째 공석으로 있다. 당시 한 청장 제거를 TK 인사 등용을 위한 사전정지작업으로 보는 관점도 있었다. 가장 수상한 것은 한 전 청장이 지난 15일 돌연 미국으로 출국해 버렸다는 점이다. 물론 그의 출국 사유는 분명치 않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검찰은 태광실업 세무조사 무마 로비의혹을 대관절 어떻게 수사한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더 큰 의혹 제공한 검찰

 

추부길 전 비서관이 구속되었다고 해서 어떤 신문은 '여야 넘나드는 전방위 수사'라고도 하고 어떤 정치평론가는 "사정의 칼끝이 어디로 향할지 모른다"고도 한다. 그렇지만 이런 진단은 순진하거나 둔감한 발상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물론 정치라고 해서 모두 음모에 의해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진단을 내리려면 의혹이 해소되어야 하는 법인데 의혹은 오히려 더 부풀려지고 있는 실정이다.

 

"대한민국 대검찰청 수사기획관이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지, 손끝이 희니 검으니 하지 말아 달라. 특단의 구체적 혐의가 드러나지 않는 한 집중 수사할 만한 가능성은 현재까지 낮다."

 

이것은 대검 중수부 최재경 수사기획관이 박연차 회장이 구속된 지 6일 후인 지난해 12월 18일에 한 말이다. 참고로 그는 BBK 사건 특별수사팀장을 맡았던 사람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한상률 국세청장이 박연차 수첩을 근거로 이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한 때는 작년 11월이다. 당시 대통령은 엄정 수사를 지시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수많은 여야 인사의 이름이 적힌 박연차 수첩은 이미 이 대통령은 물론 검찰도 알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도 수사기획관은 달을 가리키면 달을 봐야 한다며 수사할 만한 건더기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검찰은 수첩에 근거해서 노무현 정부 사람들을 시나브로 잡아다 구속시켰다. 이것은 대통령이 지시한 엄정한 수사가 전 정권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어 왔음을 의미한다.

 

박연차 리스트는 소문에 소문을 타고 번졌다. 박관용 한나라당 출신 전 국회의장도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거액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박연차 리스트에는 대다수의 PK 의원(PK 의원은 거의 한나라당)과 현 정권 실세가 포함되어 있다는 의혹까지 제기되었다. 한편 야당은 야당대로 표적수사라고 반발했다.

 

이런 정황에 추부길 전 비서관이 구속되었다고 해서 '전방위수사'라느니 '사정의 칼끝이 거침없다'느니 말할 수 없다고 본다. 그런 발언들은, "4월은 잔인한 달이다. 차라리 겨울이 따뜻했다"라고 돌변한 검찰(3월 20일 이인규 대검중앙수사부장의 말)의 주장과 비슷한 맥락이다.

 

지난해 말 검찰 관계자는 천신일 대표가 박연차 회장 구명 로비를 했다는 보도에 대해 "구명로비를 했더라도 돈이 오가지 않는다면 수사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검찰은 뜬금없이 엘리어트의 '황무지' 시구를 인용하면서 '4월은 잔인한 달' 운운하게 되었으니 이는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숱한 의혹들이 먼저 해소되지 않는 한 박연차 리스트가 모두 드러났다고 하기 힘들다. 벌써부터 전현직 검찰 간부들이 박연차 회장에게 접대를 받았다는 의혹까지 제기된 상황이다. 검찰은 "박연차 수첩에서 곶감 빼듯이 골라 수사하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 참 적절한 비유인 것 같다. 다만 마지막 서술어 '아니다'라는 말만 믿기지 않을 따름이다.

덧붙이는 글 | 필자 김갑수는 소설가로서 오마이뉴스에 역사팩션 <전쟁과 사람>을 연재 중입니다.


태그:#박연차리스트, #친노, #추부길, #천신일, #이상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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