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2차 입법전쟁'이 마무리되고 다가오는 다음 국회에서는 '3차 입법전쟁'이 예고된 상황이다. 도대체 입법이라는 것이 전쟁을 치르면서까지 이루어져야 하는 것일까? 국회가 국민의 대표기관이므로 분열된 국민을 대리하여 싸워야 하기 때문일까?
1952년 한국전쟁 중 야당의원을 연행 감금하고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위해 개헌안을 통과시켰던 부산정치파동에서부터 박정희정권의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제정, 그리고 국보위의 초헌법적 지배에 이르기까지 특수집단이 국가권력을 배타적으로 사유화하던 권위주의시대를 보면, 지배집단은 자신과 다른 사상·이념을 가진 대상을 적으로 만든 뒤 그들의 위협을 명분으로 자신의 정치적 지배권을 공고히 해왔다. 우리는 이러한 주권분열 조작의 경험을 통해 무엇보다도 보편적이고 공용적인 국민주권의 중요성을 절실히 느껴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경계해야 할 주권의 분열현상이 작년의 촛불시위를 기점으로 하여 최근에는 대의정치의 장인 국회에서까지 입법전쟁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마디로 법치주의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국민적 합의에 기초한 국민주권의 통치질서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으로 볼 수 있다.
주권의 분열현상과 위협받는 국민주권
이같은 상황의 상당부분은 현정부가 법치주의를 일방적으로 호도한 데서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법치주의란, 그것이 발전해온 역사적 배경상 영국의 '법의 지배'(Rule of Law)가 되었든 독일의 '법치주의 국가'(Rechtsstaat)가 되었든 간에, 국민의 기본권을 최우선 가치로 하여 이를 침범하지 않기 위해 국가권력의 행사는 반드시 법에 의해 규율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 요체이다.
그런데 현정부는 촛불시위와 용산참사에서 보듯이 국가권력, 즉 공권력에 대항하는 것은 불법이며, 그러한 집단에 준법을 강제함으로써 국가질서를 이른바 '떼법 상태'에서 회복하는 것이 마치 법의 지배인 양 강조한다. 이는 과거 권위주의시대에서 국가권력에 대한 도전이 있으면 이를 주적으로 규정해 주권을 가진 국민집단에서 제외하고 무자비한 공권력을 발휘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
법치주의에서 준법을 해야 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국민이 아닌 국가권력이다. 국민에게 준법을 외치는 형식적 법치국가가 아닌 국가권력이 법에 의해 제한되는 실질적 법치국가의 실현은 결국 현재의 쟁점법안에 대한 논의와도 궤를 같이한다.
루소는 국민이 법을 제정하고 그렇게 제정된 법률에 의해 지배되는 과정을 국민주권과 법치주의를 결합해서 설명했다. 그는 불평등을 지향하는 '특수의지'가 아니라 평등을 지향하고 공통의 이익을 추구하는 '일반의지'를 국민주권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보았다. 이같은 일반의지의 표현이 바로 법인데, 이러한 법은 사회구성원의 사회계약인 헌법에 따라 제정되었으므로 법을 따르는 것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신을 규율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에 결국 법치주의란 국민주권의 또다른 모습이라는 것이다. 현대에도 법치주의 원리는 국민주권에 의해 비로소 민주국가의 근본원리가 된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남는 문제는 과연 어떤 법을 어떻게 제정하는 것이 국민주권에 합당한 것이가이다. 만약 이러한 문제가 해결되면 입법전쟁이라는 국민주권의 분열상태는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재검토해야 할 쟁점법안의 문제점
우선 법치주의의 근본가치인 국민의 기본권 관점에서 입법의 정당성을 살펴보아야 한다. 집회에서 복면을 쓰고 퍼포먼스하는 것을 금지하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개정안, 집회에 대한 집단 손해배상을 인정하는 불법집단행위에 관한 집단소송법이 국민의 기본권인 집회의 자유를 필요 이상으로 제한할 소지는 없는지, 비영리민간단체 지원법개정안이 시민단체의 결사의 자유를 본질적으로 제한할 소지는 없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또한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안이 사이버 모욕죄를 통해 의사표현의 자유를 심하게 제한할 소지는 없는지, 휴대폰 감청을 허용하는 통신비밀보호법개정안과 정치사찰을 강화하고 정보기관에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하는 국정원법개정안, 국가대테러활동에 관한 기본법이 국민의 사생활 자유를 침해할 소지는 없는지, 미디어 관련법안들이 국민의 알권리를 침해할 소지는 없는지 등, 국민의 기본권과 밀접히 연관된 쟁점법안들을 기본권 보장의 측면에서 철저히 재검토해야 한다. 단지 필요성과 효율성 측면에서 그 법안들의 정당성을 판단해서는 안된다.
다음으로 국민적 합의에 기반한 국민주권의 근본원리에 충실한 입법인가를 따져보아야 한다. 국민적 합의란 단지 다수의 의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즉 일반의지를 만드는 것은 투표자의 수가 아니라 사회계약을 가능하게 한 공동의 이익인 것이다. 특수의지는 본질적으로 불평등을 지향하기에 이러한 것들은 다수가 된다 하더라도 일반의지와는 구별될 수밖에 없다.
소수 산업자본이 은행을 실질적으로 지배할 수 있게 하는 은행법개정안, 보험·증권회사 등을 소유한 비은행지주회사가 산업자본을 지배할 수 있도록 하는 금융지주회사법개정안, 의료서비스의 양극화를 가져올 수 있는 의료법개정안, 공교육 기능 정상화에 최소한의 재원이 될 교육세법 폐지법률안, 농어촌 육성을 위한 농어촌특별세법 폐지법률안 등에 대해서는 국회 통과를 강행할 것이 아니라 현상황에서 이 법안들의 구체적 내용과 그로 인해 초래될 결과 등에 관해 충분한 논의를 거쳐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졌는지를 재검토해야 하는 것이다.
또다시 입법전쟁을 치를 것인가
입법과정이란 결국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이해관계의 경쟁과 타협, 조화인 것이지 싸워서 이기는 전쟁이 될 수 없다. 국민적 합의와 무관하게 싸워서 이기는 것은 국회에 의한 입법 쿠데타나 마찬가지이다. 입법은 정부나 어느 한 당파에 의한 정치적 결단이 될 수 없다. 입법은 정부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 하는 것으로, 정부가 입법기관인 국회를 통제 또는 조정하려는 것은 권한 유월(逾越)이며 한편으로 책임 전가이기도 하다.
입법전쟁을 치르지 않기 위해서는 미디어 관련법안에 100일의 논의기간을 갖기로 한 것처럼 다른 쟁점법안에 대해서도 국민과 전문가들에게 법안의 정당성 및 필요성을 충분히 숙의할 기회를 주어야 하고, 국회는 그 논의결과에 승복해야 한다.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가 정의에 맞고 합리적이며 올바른 길을 찾아내어 그에 따른 입법을 해야 하는 것은 마치 판사가 구체적 사건이 정의에 맞고 합리적으로 판단되도록 신중히 법을 적용하여 재판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은 결국 국민의 의사와 합의에 기반을 둔 것일 수밖에 없다. 막히면 강제로 돌파하는 것이 아니라 원칙으로 되돌아가서 해결하는 것이 순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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