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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학원 강의를 듣고 나오는 학생들.
 영어 학원 강의를 듣고 나오는 학생들.
ⓒ 김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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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8일 토요일 신촌의 한 영어학원. 약 82㎡(25평) 남짓한 강의실에 100명의 수강생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토요일이라 다른 강의실이 텅 비었음에도 이곳에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몰린 이유는 3월 토익시험(29일 실시)을 하루 앞두고 학원 측에서 수강생들을 위한 특강을 마련했기 때문.

학원에서 가장 큰 강의실에서 특강을 진행했지만 늦게 온 몇 명의 수강생은 더이상 의자를 넣을 자리가 없어 돌아가야만 했다. 발걸음을 돌리는 사람 중엔 취업준비생 김범준(28·가명)씨도 있었다.

스펙 좀 되나? 그 정도로 이력서 낼 수 있겠나

영어 학원에서 강의를 듣고 있는 학생들. 빽빽하게 자리가 찼다.
 영어 학원에서 강의를 듣고 있는 학생들. 빽빽하게 자리가 찼다.
ⓒ 김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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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소재 4년제 대학에 재학 중인 김범준씨는 요즘 들어 부쩍 따뜻해진 날씨가 반갑지만은 않다. 이미 졸업할 나이를 넘긴 김씨는 부족한 자신의 '스펙(명세서란 뜻의 영어 단어 'specification'의 줄임말로, 직장을 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학력․학점․토익 점수 따위를 합한 것을 이르는 말)'을 보충하고 안정적으로 취업하기 위해 졸업을 한 학기 연장하는 '졸업 유예'를 신청했지만 토익점수가 생각만큼 쑥쑥 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원래 그렇게 부족한 점수가 아닌데 너도나도 취업 인증용으로 영어공부를 하는 바람에 커트라인 자체가 많이 올랐다."

1년 만에 다시 영어학원에 다니고 있다는 정민기(27·가명)씨도 김씨와 비슷한 처지. 정씨는 1년 전에 토익점수 830점을 확보했지만 요즘 들어 불안해져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자신과 비슷한 점수대에 있는 취업준비생들이 많아졌다는 것이 정씨의 판단이다.

"사실 (제가 가려고 하는 직장은) 거의 영어를 쓸 일이 없거든요. 직장에서도 토익 몇 점 이상이라고 명시적으로 요구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영어점수가 낮으면 불리하다는 것은 취직 준비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죠."

사정이 이렇다보니 요즘의 취업준비생들은 영어 공부에 과거보다 더 많은 공을 들여야 하는 형편이다. 실제로 일부 대기업들은 이미 입사 전형에 '영어회화등급'을 필수로 포함시킨 상태다. 독해력과 청취력만을 평가하는 기존의 영어능력 점수만으로는 변별력이 떨어지므로 회화 능력까지 다각도로 평가하겠다는 얘기다.

기업의 새로운 기준을 반영하듯, 학원 주변의 커피숍엔 삼삼오오 모여앉아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는 20대들이 부쩍 많아졌다. 스피킹 테스트를 위한 스터디 그룹이다.

김씨가 가입한 취업 관련 카페의 구직자들이 얘기하는 대기업용 취업 커트라인은 대략 '토익 850'에 '스피킹레벨 6'. 이 정도 점수는 있어야 해당 항목에서 감점이 없다는 계산이다.

김씨는 아직 입사원서를 넣기엔 턱없이 부족한 스펙 때문에 적극적인 구직활동을 하고 있지는 않다. 김씨는 "내가 원하는 직종은 영어가 그리 중요하지 않은데, 높은 기본 점수를 원하니 답답할 따름"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도서관에 모여드는 '백수' 친구들, "제발 그만 좀 보자"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는 취업준비생.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는 취업준비생.
ⓒ 김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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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에서 발걸음을 옮겨 김씨가 향하는 곳은 학교 도서관. 공부하는 데는 학교만한 곳이 없는 데다 식사도 학교식당에서 저렴하게 해결할 수 있고, 이따금씩 취업 정보도 귀동냥할 수 있어 "일석삼조"라는 것이 김씨의 말이다. 그는 오후 3시에 학원 수업이 끝나면 보통 밤 11시까지 도서관에서 영어 공부나 취업 관련 준비를 한다. 거의 매일 이런 생활을 하고 있다.

"이게 어떤 선만 넘기면 자동으로 채용되는 그런 것도 아니잖아요. 근데 불안하니까 그냥 남들 하는 대로 하는 거예요. 다들 불안하니까 학교에 더 있으려고 한 학기에 72만 원 더 내면서 전공이랑 상관도 없는 수업 듣고. 올해는 경제가 어려워서 신규채용도 많이 줄었는데 걱정이죠."

저녁식사 시간. 이미 학교를 졸업했지만 취업을 못한 김씨의 친구들도 하나둘 학교 도서관으로 모여든다. "스터디하고 오느라 늦었다"며 웃는 유철진(28·가명)씨는 작년 여름에 학교를 졸업하고 아직 취업을 준비 중인 '백수'다. 학교에 나타나는 처지가 비슷한 친구들끼리 스터디 그룹을 짜서 함께 공부 중이이다. 그는 현재 2개 스터디 그룹 활동에 일주일에 18시간 정도를 활용하고 있다.

"저는 문과라서 영어 점수를 훨씬 잘 받아야 합니다. 학교 다닐 때도 이렇게 스터디 그룹 활동을 열심히 해본 적이 없어요.(웃음) 문과는 뾰족하게 뭐 하나 없으면 취업시장에서 정말 살아남기 어려운 것 같아요. 졸업생이라 도서관 이용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평소 땐 그냥 들여보내 주는데, 학교 시험기간에는 재학생만 도서관 입장을 허용하거든요."  

유씨에 이어 언론사 기자를 준비 중이라는 배동훈(28·가명)씨가 도착했다. 배씨의 지각 이유는 지금 하고 있는 과외 아르바이트가 조금 늦게 끝났기 때문이다. 배씨는 취업준비와 더불어 일주일에 15시간가량의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마련한다고 한다. "언론사 입사는 운이 따르지 않으면 한 번에 들어가기 어려워서 차근차근 다지고 있다"는 것이 배씨의 설명. 서울에서도 과외 수요가 많이 줄어서 요즘은 경기도까지 '출장'다니고 있다고 한다.

"요즘 경기가 어렵잖아요. 부모님은 직장 잃으신지 오래이고 원래는 제가 졸업하자마자 취직해서 돈 벌어야 하는데 그게 안 되니까, 또 먹고는 살아야 해서 아르바이트 하면서 준비하고 있는 거죠."

29일 발표된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김범준씨나 김씨의 친구들처럼 현재 취업을 준비하고 있지만 아직 적극적으로 구직시도를 하지 않은 취업준비자는 전국적으로 56만8천 명이라고 한다.

"원래 친한 친구들이라 자주 보니 좋지만 이제 도서관에서는 좀 그만 볼 수 있게 되면 좋겠다"고 웃으며 말하는 김범준씨. 그러나 현실은 그리 밝지만은 않아 보인다.


태그:#취업준비생, #영어공부, #청년실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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