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문화원에서 통영전통연을 정립한 지 10년이 지났지만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견이 끊이지 않고 있다. 명칭에서부터 개수에 대해서도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형국이다. 과연 '통영전통연의 진실'은 무엇인지 2회에 걸쳐 알아보고자 한다.
통영전통연으로 확정된 연의 문양 및 명칭에 관해 몇몇 연 장인 및 연구가가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독특한 문양과 강렬한 색상이 조화를 이루어 특별한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통영전통연, 그 아름다움은 세계의 어느 연과 견줘도 손색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예술성과 함께 과학적인 우수성까지 갖춰 예로부터 전국적으로 명성이 높았다.
이처럼 통영전통연은 꼭 지켜내서 계승·발전시켜야 할 통영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지만 제대로 된 역사문헌 및 고증도 없었고 소수 장인에 의해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한 상황을 안타깝게 여겨 지난 1999년 통영문화원이 통영연 애호가 20여 명을 모아 수 차례의 회의를 개최, 26종의 통영전통연을 확정·발표했다. 그러나 확정된 통영전통연을 둘러싼 의견은 아직도 분분하다.
일제시대 및 해방기에 가장 유명한 통영연 제작자였던 고 김현삼 선생의 아들인 김문학씨(66)는 "통영전통연은 총 43종이며 발표한 것 중 몇 개는 명칭 또한 사실과 다르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30여년 간 통영연 교육 받아=김문학씨는 어려서부터 수십년 간 아버지에게 통영전통연에 관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고 한다.
아버지는 내심 아들을 통영전통연 무형문화재로 키우고 싶어 혹독하게 훈련시켰는데 김문학씨는 35세 되던 해 연을 포기했다. 먹고 살기가 막막한 연 장인의 길을 택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식당을 차려 생업에 종사하던 김문학씨가 통영문화원에서 매년 연초에 발간하는 통영연날리기 책자를 본 건 지난 2005년, 그는 "개수가 축소된 것도 문제지만 잘못된 연의 이름 및 문양이 후손에 전해지는 건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며 "통영연 43종은 각자 고유의 이름이 있고 우리 선조들이 물려주신 이름이 그대로 이어져야지 중간에 변질되어서는 안된다"고 강경한 목소리로 말했다.
◆'갈치당가리연'이 아니라 '까치당가리연'=김문학씨는 세세한 차이는 이해할 수 있지만 '까치'를 '갈치'로 표기한 점과 '돌쪽바지기연'의 모양이 잘못 그려진 점은 꼭 시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윗까치당가리연'과 '아래까치당가리연'의 날개들이 합쳐져 '수리당가리연'이 된다"며 "새 이름으로 명명된 연"이라고 말했다.
또한 현재 통영연의 최고 권위자로 40여 년을 연 제작에 몰두해 온 김휘범 한국전통비연 국가지정 기능전승자(72)와 통영연에 관해 손꼽히는 애호가로 알려진 김이남 통영전통비연보존회 발기인(69)도 '까치'와 '돌쪽바지기'의 시정에 대해 김문학씨의 의견에 동의했다.
특히 통영의 한 지역신문에는 지난 2002년에 이미 위 내용을 뒷받침하는 기고가 게재돼 이들의 주장에 힘을 싣고 있다.
평생을 바쳐 통영의 향토사를 연구하고 있는 김일룡 통영시향토역사관장(63)의 기고에 따르면 「통영연 26종의 선정은 차치하고라도, 그 명칭 가운데 '이당가리'의 <이>는 하나만의 <외>, '덴방구쟁이'의 <덴>은 때우다의 <땐>, '기바리'의 <기>는 <귀>(耳), '갈치당가리'의 <갈치>는 <까치>, '돌쪽바지기'의 <바지기>는 발채를 얹는 지게의 <바지게>, '고리연'의 <고리>는 <꼬리>를 닮은 (또는 의미하는) 문양에서 각각 유래된 연 이름으로 사료되어 이의 개칭을 제언하는 바이다」라고 전하고 있다.
민속놀이로 전래된 만큼 전해 내려오는 어떠한 문헌도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마땅히 이름이 붙여진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 이유를 유추해 연구하면 각 동네마다 다르게 불리던 연 이름의 근원을 파악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김휘범 기능전수자의 고증 아래 28개의 통영연들이 모형으로 만들어진 '88올림픽 공식지정 민속 기념공예품 통영비연 전시액자'에도 김일룡 향토역사관장의 설명과 상당히 유사한 부분이 많다.<계속>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한려투데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