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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우리 할아버지께선

뛰어난 옛날 이야기꾼이었다

밤이 이슥하도록 어린 손자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시곤 했다

그러나  당신께서 어떻게 삶을 꾸려오셨는지

아버지인 내 증조부께선 어떤 분이셨는지

내게 들려주신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께선 당신의 삶을 단 한 번도 추억하지 않으셨다

 

농한기가 돌아와

시간이 헐렁하게 돌아가는 겨울날에도 

절대 손을 놀리시는 법이 없으셨다

가마니를 짜거나 대나무 소쿠리를 엮거나

물에 축인 짚으로 덕석을 짜실 뿐이었다

 

일제 강점기와 6·25 등

일찍이 한반도가 겪었던 어느 시기보다

신산한 삶을 사셨던 할아버지께선

사는 게 바빠서 당신의 생애를 추억할 할 틈이 없었을까

혹은 자신의 일그러진 삶을 추억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셨던가

어쩌면 지나칠 적마다 역한 냄새가 코를 찌르던 두엄자리가

할아버지께서 버려둔 추억이 발효하는 장소였는지도 모른다 

 

할아버지께선 그렇게 끝내

당신의 삶을 추억하지 않으신 채 눈을 감으셨다

공식적으로는 물론 비공식적으로도 그랬다

그러나 일흔여섯, 바쁘고 고단한 생애였다는 걸 난 안다 

당신의 추억을 추억하지 못하신 채 세상을 뜨신 할아버지를 위하여

난 시간이 날 적마다 할아버지의 추억을 대신 추억해드리고 있다

 

장둥이감 몇 접 지게에 지고

금단동 고개 넘어 각화재 넘어

광주 서방시장으로 팔러 가던 일

일흔 살 넘어서까지도

나락 두 가마니 지게에 지고 뜀박질하던 모습

길고 징그런 구렁이 잡아

감나무 아래 약탕기 걸고 고아 드시던 일

오랜 가뭄에 옆 논 주인과 물꼬 싸움하시던 일

 

할아버지께선 세상 뜨시기 전

자신의 추억을 대신 추억해 줄

충직한 추억대행사 하나 남기시고 가셨다 

난 벌써 37년째 이 일을 계속하고 있다.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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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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