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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밭에 나간다!"

어제(6일)는 하루종일 실속없이 움직이는 바람에 몸도 마음도 편치 않았습니다. 꼭 이런 날이 있습니다. 아침 일찍 깨었지만 잠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않다가 낮 12시 부평역 앞에서 천막농성을 벌인다 하여, 자전거에 몸을 실은 뒤 아스팔트 위에서 온종일을 보냈습니다.

지난 주말에는 그간 여기저기 쏘다니며 만난 변덕스런 봄바람에게 얻어터진듯, 입술 안팎이 군데군데 터진 것이 쉽게 아물지 않아 두문불출했습니다. 비타민이 전혀 들어있지 않은 비타민 음료로는 전혀 나아지지 않는 피로에 찌든 몸을 추슬렀습니다.

사막처럼 건조한 날씨에 흙먼지가 날리는 계단 청소도 하고, 숙제처럼 쌓여있는 책과 도서실에서 빌린 책들도 간만에 느긋이 펼쳐볼 수 있었습니다. 작년 가을 밭에서 수확해 겨울내내 먹고도 남은 고구마를 낡은 프라이팬에 구운 것을 집어먹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에 만족했습니다.

김치와 어울리는 와인을 찾아나선 만화속의 주인공처럼 흥미진진하진 않지만….

지난 주말 읽은 책들
 지난 주말 읽은 책들
ⓒ 이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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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봄바람에 휘날리는 벚꽃같은 그 짧은 여유도 잠시, 제대로 된 밥벌이조차 못하는 백수 신세라는 괜한 불안감에 노트북을 열고 불공을 드렸습니다. 기분좋은 봄날같지 않게 답답한 세상 소식을 접하고 괜한 소리도 지루하게 늘어놓았습니다.

그것도 잠시 오랜만에 집에 있다보니 놀러온 어린조카가 쌍콧물을 흘리며 설닫힌 방문을 눈치껏 열고는 들어와 노트북을 점령해 버렸습니다. 감기가 쉽게 떨어지지 않아 "에엣취" 요란하게 기침을 해대는 조카를 위해 동요를 틀어주고 마우스도 내어주고, 심이 빠진 색연필과 공기알에 심취한 아이와 놀았습니다.

"회양목에 꽃 핀 거 봤니?"

그렇게 방과 거실을 잇는 방문을 문지기처럼 열고 닫기를 즐기는 조카를 보며 책도 읽었습니다. 이웃들의 실제 이야기를 11년 동안 쓴 베스트셀러 <연탄길>의 작가 이철환님의 작고 짧지만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줄줄이 사탕처럼 엮인 책 <곰보빵>이었습니다.

가장 평범한 하루가 가장 행복한 하루...
 가장 평범한 하루가 가장 행복한 하루...
ⓒ 이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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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외수님의 추천사처럼 "감동을 이끌어 내는 이 시대 최고의 작가"다운 이야기 속에는 "망가진 세상, 망가진 인생을 고치는 데" 대단한 효능을 가진 영약을 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림자처럼 늘 곁에 있는 사랑을 말입니다.

때론 너무 흔하고 쉽지만 때론 너무 어렵고 찾기 힘든 사랑으로 아기자기한 이야기들은, 슬픔과 아픔, 소외와 어둠의 우물에 빠진 이들을 두레박에 모두 담아 밝은 우물 밖으로 건져내주었습니다. 주위를 돌아보지 못하는 욕심 많은 사람들이 만든 청계천의 조명처럼 휘황찬란하지는 않지만, 꽁꽁 얼어붙은 좁은 방안을 덥혀주는 화롯불처럼 메마르고 무덤덤한 가슴 한 구석을 따스하게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밭일 나가시는 어머니가 새삼 "엄마 밭에 나간다!"고 건넨 말에 담긴 사랑의 메시지도 눈치채게 해주었습니다. 보잘것없는 자신이 살아가는 하루하루와 단순한 삶이 알고 보면 "가장 행복한 하루"라는 것도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책 속에 움튼 사랑의 향기를 맡고 있을 때, 몇 해 전 밭에 심은 회양목에서 꽃이 피었다는 어머니의 전화가 있었습니다.

"사진 하나 찍으라고 전화했다! 회양목에 꽃 핀거 봤니?"

얼른 밭에 가봐야겠습니다.

책 <곰보빵>
 책 <곰보빵>
ⓒ 이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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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U포터뉴스와 블로거뉴스에도 송고합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곰보빵

이철환 지음, 꽃삽(2006)


태그:#곰보빵, #엄마, #사랑,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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