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 기업으로 한계를 절감하고 있어요. 얼마 전 북한이 로켓을 발사했지만, 1단계 추진로켓으로 올라올 수 있는 만큼 온 것 같아요. 이제 100인 기업으로 새롭게 태어나려 합니다."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깜빡이'이라는 이름의 제품으로 영어학습기 시장을 석권한 <원샷보카>의 임형택 사장(39). 최근 1년새 혼자서 매출 200억원을 올리면서 '1인 기업'의 성공 모델로 떠오른 그였다.
'혼자서 꾸려오기 힘들지 않았나'라는 질문에, 임 사장은 "힘들지 않았다"고 고개를 저었다. 대신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시장과 소비자들의 반응과 다양한 요구를 적극적으로 반영하기 위해선 더이상 '1인 기업'으로 남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1년새 140배가 넘는 판매량을 올린 '깜빡이'. 극심한 경기침체 속에서도 손바닥만한 모양의 영어학습기는 하루에도 300개씩 팔려나가고 있다. 한마디로 폭발적인 반응이다. 일부에선 '깜빡이 신화'라고도 한다.
무엇이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을까. 정말 효과는 있는 걸까. 임형택 사장을 7일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에서 만났다. 조그마한 손가방을 든 채 혼자서 사무실을 찾은 그와 2시간여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2초 동안 깜빡거리면서 영어단어 불러주는 '깜빡이'... 효과는?우선, 그에게 '깜빡이'라는 제품의 원리를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그가 손가방에서 손바닥만한 크기의 휴대용멀티미디어플레이어(PMP)를 꺼냈다. 마치 조그만 게임기를 보는 듯했다. 임 사장이 조그만 버튼을 올리자, 각종 영어단어 목록이 화면에 떠올랐다.
터치스크린 방식으로 조작은 간단했다. 자신이 원하는 영어 단어를 비롯해 속도와 구간 등을 직접 지정할 수 있었다. 간단한 영어회화 단어 100개를 정해서 시작 버튼을 눌렀다. 이어 자동으로 영어 단어가 보였고, 원어민의 발음이 뒤따랐다. 2초 동안 영어단어를 보고, 발음을 듣는다. 이어 1초 동안 한글로 단어의 뜻이 나온다. 이런 방법으로 계속해서 새로운 단어가 이어졌다.
기자가 영어단어에 집중하는 사이, 그 역시 화면을 보고 있었다. 이어 그의 입가엔 "하나,둘...셋"을 흥얼거리고 있었다. 임 사장의 설명이 이어졌다.
"단어를 외운다는 '해브(have, 가지다)'가 아니에요. 머리에 집어넣는다고 외워지는 것이 아니죠. '퍼밀리어라이즈(familiarize, 친숙해지다)' 라는 거죠. 자꾸 반복해서 보게 되면, 어느 순간 친숙해지고, 익숙해지고, 머리 속에 남게 되는 겁니다."5분 동안 100단어가 기자의 눈앞을 지나갔다. 기억에 남는 것도, 희미해진 단어도 있었다. 임 사장은 "5분만에 100단어를 한 번 봤지만, 만약 반복해서 보면 1시간 동안 12번을 보게된다"면서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수백단어가 머리 속에 남게 돼 있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우리가 매일 보는 사람은 외우기 싫어도 잘 알게 되는 것과 같은 원리인 셈이다. 그는 이를 영어학습에 접목시켰고, 직접 프로그램을 짰다.
대학 졸업반 때 취업 영어공부하다 좌절...
대학에서 신문방송을 전공했지만, 이보다 부전공 과목인 전산학에 더 관심이 컸다. 3년 넘게 각종 컴퓨터 프로그램을 끼고 살았다. 다시 그의 말이다.
"3학년 2학기때, 졸업 후 무엇을 할지 막막하더군요. 한 선배가 갑자기 두꺼운 영어책을 주면서 공부를 하라고 했는데, 하루 3시간 동안 50개 외웠는데도, 다음날 되니까 기억이 안나더라구요."
- 그런 경험은 누구나 한번쯤은 있죠."그래요. 공부가 잘 안되니까 마음이 급해지고, 불안해지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일단 무조건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다시 보고... 그렇게 하자고 했죠."
- 그것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만들게 된 것이 언제죠? "대학 3학년 말, 92년 겨울일 거예요. '인지과학'이라는 분야에 관심이 많았는데, 계속 보다 보면, 친숙해지고, 어느 순간 알게 되는 원리였는데, 이것을 적용시켜보자고 했죠. '클리핑'이라는 프로그래밍 언어로, 화면에 영어 단어와 뜻이 반복해서 보여주도록 프로그램을 만들었죠."
- '깜빡이'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군요."(고개를 끄덕이며)그렇죠. 처음에 500단어로 시작했는데, 3초 동안 이 단어를 보는데, 25분밖에 안 걸리는 거예요. (웃으면서) 3시간 동안 50개 외우려고, 노트에 수십번 써가며 공부한 것에 비하면..."
이듬해인 93년에 그는 토플용 영어단어 7000개가 수록된 '깜빡이' 학습기의 원조 모델을 완성하게 된다. 물론 이 모델이 사업으로 접목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전국을 20바퀴나 돌면서 서러운 장돌뱅이 생활 미국 유학의 꿈을 접고, 97년 임 사장은 갤럽코리아에 들어갔다. 회사에 다니면서도, 깜빡이 사업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해 7월 그는 깜빡이 소프트웨어를 들고, 문자 삐삐를 만드는 회사를 찾아갔다. 혼수비용으로 모아둔 2000만원이 영단어 학습기 개발에 들어갔다.
"그때 휴대용 학습기를 만든다는 것은 어림도 없었고, 당시 삐삐가 유행이던 시절이어서 거기에 접목했죠. 하지만 오래 가지 못했죠. 200대 정도 팔았는데... 참, 힘들었죠."그는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이 기계를 이해시키는 것이 어려웠다고 말했다. 임 사장은 "사람들이 이 기계를 보면서, '이 물건이 뭐냐', '그냥 보여준다고 외워지냐'는 반응이 처음이었다"면서 "당장 효과를 눈으로 보길 원했지만, 쉽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본격적인 사업은 2001년 하반기에 두번째 깜빡이가 나왔을 때부터다. 회사 동료와 함께 다시 돈을 모아 이번엔 1000대를 만들었다. 그는 전국의 학원가를 돌기 시작했다. 임 사장의 회고다.
"차를 직접 몰면서 전국 대도시 학원가는 다 돌았죠. 매주 1만킬로미터씩 다녔으니... 얼추 (전국을) 20바퀴 돌았나요. 학교, 학원에 들어가서 물건을 내놓기 무섭게, 선생님들의 반응은 "됐어요", "이건 또 뭐야"라는 식이었죠. '깜빡이'라는 이름도 너무 촌스럽다고 하고..."그는 스스로 장돌뱅이 같은 생활을 7년 동안 해왔다고 말했다. 그 사이 임 사장의 깜빡이는 특허 등록도 마쳤다.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지난 2006년 10월께 세번째 깜빡이가 나왔다. 게임기를 만드는 회사와 손을 잡았다. 원어민이 단어를 직접 읽어주는 기능도 보강됐다. 2007년엔 한국지식정보화센터로부터 중소기업청장상까지 받았다. 전보다 판매량은 늘었지만, 적자는 계속됐다.
폭발적인 성장 속에 "1인기업 한계 절감... 올해 안 새 회사 모습"
본격적으로 사업이 본 궤도에 오른 것은 작년부터. 임 사장은 제품을 수시로 업그레이드했고, 판매와 유통망을 전문적인 조직에 맡겼다. 작년 2월께 200개 팔리던 것이, 6월엔 5000개로 늘더니, 12월엔 1만개를 돌파했다. 올해 들어선 한 달에 2만개가 넘게 팔려 나가고 있다. 한마디로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임 사장은 "솔직히 나도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면서 "작년에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하고, 판매-유통망을 정비하면서 소비자들에게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작년 한 해 매출은 180억원, 순이익은 18억원을 기록했다. 현재 추세대로라면, 올해 15만대 내외를 팔고, 매출은 400억원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순익도 40억원 안팎이 예상된다. 폭발적인 성장이다.
이같은 성공 비결의 배경엔 이미 널리 알려진 대로 임 사장의 '원샷보카'라는 회사가 1인 기업이라는 점도 작용했다. 그에겐 별도 사무실조차 없다. 서울 강남 등지에 흩어져 있는 협력회사 사무실을 빌려 쓰기도 했다. 다시 그의 말이다.
"깜빡이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제품 생산부터, 마케팅 등을 전담해온 협력회사들의 덕분이에요. 이곳 5명의 사장들은 깜빡이가 이렇게 뜨기 전부터 서로 사업을 해왔던 분들이어서, 서로 신뢰감이 크죠. 이제는 이 분들 스스로 깜빡이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임 사장은 이제 더 이상 1인기업으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예전엔 각자 회사들이 주어진 일만 하면 됐지만, 이젠 영역이 허물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급변하는 시장과 소비자들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선 1인기업의 한계도 분명하다는 생각도 내비쳤다.
임 사장은 "소프트웨어 기획부터, 제품 생산까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위해선 1인 기업 형태가 아닌 다른 모습으로 변화해야 한다"면서 "올해 안으로 1인 기업에서 100인 기업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빠르면 올 7~8월이면 좀더 진화된 깜빡이의 모습도 볼 수 있을 것"이라며 "앞으로도 고객들이 필요로 하고, 원하는 내용을 적극적으로 반영해나갈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요즘 부쩍 중국시장에 관심을 갖고 있는 임 사장은 "혼자 사업을 시작하며 '깜빡이'라는 꿈으로 먹고 살아왔던 것 같다"면서 "경제가 어렵지만, 다른 사회 모든 분야에서 꿈을 잊지 않고 살았으면 한다"고 당부하기도 했다. '깜빡이' 임형택 사장의 꿈과 도전이 얼마나 이어질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