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스키만큼 나에게 생소한 것도 드물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술을 잘 못 마실뿐더러, 위스키라는 술은 매우 비싸기 때문에 마실 기회도 적기 때문이다. 대개는 얼떨결에 따라간 비싼 술집에서 상표나 종류도 모른 채 몇 잔 들이키고, 이내 취해버려 독하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한다.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은 마시는 중에도, 마시고 나서도 '맛'보다는 '본전'을 생각하게 만든다.
더구나 언제나 비싼 술과 여자들이 동원되는 우리의 접대행태도 위스키에 대한 좋지 않은 선입관을 갖게 한다. 접대 리스트를 둘러싼 뉴스로 세상은 시끄럽고 경찰은 잔머리를 굴리느라 정신이 없는 요즘, 그리고 사람들의 관심이 다른 곳에 쏠려있는 동안 나 모르는 어떤 수작이 가열차게 진행되고 있을 것만 같은 요즘, '위스키'에 대한 책을 권하는 것이 다소 생뚱맞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행기를 소개하는 이유는 저 먼 나라에서 바다를 건너 금띠를 두르고 우리 앞에 도착한, 맛도 모를 물건인 '위스키'에 대한 성찰이 비싼 술을 개처럼 마시는 인간들로 하여금 다소간의 분별을 찾을 수 있게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술에 있는 것이 아니고 술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있으므로.
좋은 술은 여행하지 않는 법이다
"좋은 술은 여행을 하지 않는 법이다… 수송이나 기후의 변화에 따라, 혹은 그 술이 지닌 일상적인 실감으로 조성되어 음용되는 환경을 상실하게 됨으로써, 거기에 들어있는 향이 미묘하게, 어쩌면 심리적으로 변질되어 버리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술은 산지에서 마셔야만 제 맛을 음미할 수 있다."
좋은 술을 먹기 위해서는 술을 부르지 말고 사람이 술이 있는 곳으로 여행을 가야 한다는 '술 중심 여행관'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모든 술을 산지에 가서 마실 수는 없는 일이지만 음식을 대하는 이러한 경건한 태도에는 무언가가 있다. 음식의 본고장을 찾아가 맛은 물론이고 그 음식이 어떤 식의 포장이나 의미의 굴절을 거치기 전, 그 본래의 모습을 만나보는 것이야말로 여행이 우리에게 주는 소중한 경험이다.
또한 이 말은 '왜 좋은 우리 술 다 놔두고 위스키인가?'라는 누군가가 던질 만한 반박에 대한 좋은 대답이기도 하다. 우리에겐 오랜 여행을 하지 않은 우리의 술이 있다. 하지만 위스키 또한 알고 보면 좋은 술이므로 이왕 맛을 들였다면 그 속에 깃든 문화와 멋을 알아보는 것이 상식이라면 상식이고, 교양이라면 교양일 것이다.
왜 아일레이 위스키인가?
스코틀랜드의 '아일레이'라는 섬은 '싱글 몰트 위스키'로 유명하다. 우선 이 용어에서 먼저 알아야 하는 단어는 몰트(malt)이다. 몰트는 우리말로는 엿기름. 술을 발효시킬 때 쓰는 엿기름은 대개 보리나 쌀, 옥수수 등의 곡물을 건조시켜 (이 건조시키는 과정을 '몰팅' 이라고 한다) 만드는데, 싱글 몰트라 하면 오직 한 가지 엿기름으로만 제조한 술을 말한다.
아일레이의 위스키 공장은 엿기름을 직접 만든다. 물에 불린 보리를 자연 방식으로 건조하여 발아시킨다. 여기에 물을 붓고 그대로 발효시키고 나서, 위스키 특유의 향을 만들어내는 '이탄'이라는 향료를 넣어 증류한다. 그리고 직접 만든 술통에 넣어 해풍이 부는 창고 안에서 숙성시킨다. 이렇게 만들어진 위스키가 바로 싱글 몰트 위스키이다.
싱글 몰트 위스키는 모두 그 개성이 뚜렷하여 아일레이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술을 입에 넣는 순간 어느 공장에서 만든 술인지 금방 알게 된다고 한다. 이에 반해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고, 먹는 위스키는 블랜디드 위스키이다. 여러 가지 몰트로 만든 술을 섞었다는 (블랜딩) 뜻이다.
아일레이는 싱글몰트 위스키로 가장 유명한 곳이긴 하지만 위스키를 대량 생산하지는 않는 관계로 우리가 아일레이 위스키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고 한다. 위스키를 대량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위스키의 재료인 보리가 많이 있어야 하는데, 아일레이는 본래 곡물이 많이 나지는 않는 곳이기 때문에 오직 소량의 보리로, 제대로 된 싱글몰트만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만든 위스키는 세계적인 위스키 회사에서 가져가, 블랜딩 스카치 위스키에 소량을 섞어 넣어 그들만의 특별한 맛을 내는데 쓰인다.
아일레이 섬의 위스키는 위스키의 연금술사인 것이다. 이렇게만 듣고 나면 아일레이에는 위스키의 맛을 내는 특별한 비법이 있는 듯 느껴지는데 이에 대한 장인들의 대답은 이러하다.
"이런저런 설명은 필요 없다. 사람들은 대개 술이 오래 될수록 맛있다고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시간이 지나면서 얻는 것도 있지만 잃는 것도 있게 마련이다. 증류를 해서 더해지는 것도 있는가 하면 덜해지는 것도 있다. 그건 다만 개성의 차이이다."
또 다른 장인은 이렇게 말한다.
" 모두들 아일레이 위스키에 대해서 이런저런 분석을 한다. 보리, 물, 이탄…. 물론 아일레이는 질 좋은 보리가 나고, 좋은 물이 있고, 이탄도 풍부하고 향이 좋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아일레이의 맛을 설명할 수는 없다. 가장 나중에 오는 것은 사람이다. 여기 살고 있는 우리가 아일레이 위스키의 맛을 만든다. 섬사람들의 퍼스낼리티와 생활양식이 맛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위스키 앤 워터"
하루끼는 위스키를 만드는 과정과 종류에 대한 소개를 한 후, 아일레이에서 아일레이 위스키를 마신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는 '입을 열기까지는 다소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일단 말문이 트이면 온화한 어조로 몹시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과도 같은 곳'이라고 한다. 그런 그들에게 위스키는 어떤 의미일까?
그곳 사람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위스키로 축배를 들고, 그리고 누군가 죽으면 아무 말 없이 위스키 잔을 비운다. 그들의 삶은 위스키를 만드는 일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그들의 삶의 중심에 언제나 위스키가 끼어든다.
아일랜드인의 성격이 가장 잘 드러나는 말 "위스키 앤 워터". 펍에 가서 위스키를 시키면 바텐더가 "얼음을 드릴까요?" 하고 묻는다. 이때 "아뇨, 물만 좀 주시면 되요"라고 대답하면 바텐더는 '뭘 좀 아시는데?'하는 표정으로 위스키를 듬뿍 따라주고는 물을 한잔 준다고 한다. 진정한 위스키의 맛을 음미하기 위해서 물만 섞어 마시는 것이 그들이 위스키를 즐기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위스키, 흑맥주, 과묵하고 담백한 사람들, 바닷바람, 물 한잔…. 뭔가 진하고 단순한 것을 좋아하는 아일랜드인의 취향이 느껴진다. 한잔의 위스키을 즐기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좋은 안주나 더 비싼 위스키가 아니라 그 맛을 느끼며 잠시 일상을 내려놓는 마음이 아닐까? 마치 군대에서 "10분간 휴식!"하고 외칠 때처럼.
위스키, 여행, 그리고 언어…
위스키에 흠뻑 취해 여행에서 돌아 온 하루키는 위스키를 마시며 여행의 의미를 생각한다.
"위스키 잔을 들고 그곳에 깃들어 있던 친밀한 공기와 사람들을 떠올리면 나의 손 안에 쥐어진 술잔 속에서 위스키가 조용히 미소 짓기 시작한다. 여행은 우리의 마음속에만 남는 것, 그렇기에 더욱 귀중한 무언가를 남긴다. 이것이 여행이 멋진 이유이다." 라고.
그리고 작가는 글을 쓰며 언어에 대해 생각한다.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고 한다면, 나는 잠자코 술잔을 내밀고 당신은 그것을 받아서 조용히 목안으로 흘려 넣기만 하면 된다. 너무도 심플하고, 너무도 친밀하고, 너무도 정확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언어는 그저 언어일 뿐이고, 우리는 그 한정된 틀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아주 드물게 주어지는 행복한 순간에 우리의 언어는 진짜로 위스키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 적어도 나는 - 늘 그러한 순간을 꿈꾸며 살아간다. 만약 우리의 언어가 위스키라면, 하고."
하루키의 언어가 빛난다. 술맛을 모르는 나같은 사람까지도 위스키를 떠올리며 입안에 군침을 돌게 만든다. 같은 술을 마시면서도 어떤 사람은 깊은 성찰을 전해주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개처럼 마시고 어느 구석에서 개 떨듯 떨고 있는 것이다. 하여 이번 주말에는 심란한 뉴스들을 뒤로 하고, 오래 된 양조장을 찾아 가 술 한 잔 맛보며 봄볕 아래서 잠시 마음을 내려놓고 싶어진다. 머릿속의 모든 것이 선명해지는 예외적인 순간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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