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가 없었던 오랜 옛날, 그때 살았던 사람들은 시간을 어떻게 알았을까. 아마도 낮에는 해가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며 시간을 가늠했을 것이고, 밤에는 달이나 별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시간을 헤아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름이 잔뜩 끼거나 비가 오는 날에는 시간을 어떻게 저울질해야 했을까.
사람은 환경을 다스릴 줄 아는 지혜롭고도 영리한 동물이다. 옛 사람들이 여름철 장마 때에도 시간을 가늠할 수 있는 물시계를 만든 것도 주어진 환경에 잘 맞출 줄 알았기 때문이다. 삼국시대 때부터 국가 표준시계로 삼았다는 물시계. 지금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물시계는 덕수궁 광명문 아래 보관되어 있는 보루각 자격루이다.
보루각 자격루란 시간을 알려주는 건물인 보루각(報漏閣)에 설치된 스스로 치는 물시계란 뜻이다. 즉, 물과 지렛대, 쇠알을 이용해 때가 되면 스스로 종이나, 징, 북을 건드려 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란 그 말이다. 국보 229호인 물시계는 고구려 시대 천문도 '천상열차분야지도'(국보 228호)와 조선 현종 때 제작된 '혼천시계'(국보 230호)와 더불어 우리나라 과학기술 문화유산 삼형제로 손꼽힌다.
근데, 새 만원짜리 지폐가 나오면서 은근슬쩍 자격루가 퇴출당했다. 용포무늬와 함께 자격루가 있었던 그 자리에는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와 천문시계인 혼천의(渾天儀), 국내에서 가장 큰 망원경인 지름 1.8m짜리 보현산 천문대 망원경이 새롭게 세종대왕을 떠받들고 있다.
왜 새 만원짜리 지폐에서 자격루가 퇴출당했을까. 그 까닭은 크게 두 가지인 듯하다. 하나는 고구려 현종 10년 송이영이란 사람이 제작했다고 알려지고 있는 천상열차분야지도에 새겨진 별자리가 1세기께 위도 39~40도에서 관측된 것으로 확인됐고, 가장 오래된 고대 하늘이 그려진 천문도이자 그 원본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좀 엉뚱한 소문에 불과하긴 하지만 중국이 동북아 공정으로 고구려 역사를 죄다 중국 역사로 깡그리 편입시키는 데 따른 일종의 반발이라는 것이다. 만원짜리 지폐에 고구려 때 만든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새겨 넣음으로써 고구려가 우리 역사라는 것을 아예 못박아두자는 그런 뜻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덕수궁 광명문 아래 서 있는 물시계 자격루
"물시계는 물의 증가량 또는 감소량으로 시간을 측정하는 장치로서 삼국시대부터 나라의 표준시계로 사용했다. 자격루는 세종 때 장영실(蔣英實)이 처음으로 만들었다. 현재 중국 광동에 남아 있는 명나라의 물시계보다 조금 늦게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 규모가 크고 만듦새가 훌륭하여 매우 귀중한 유물로 평가되고 있다."-문화재청 자료 몇 토막
매화가 마악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는 지난 3월 28일(토) 오후 2시. 보루각 자격루를 가까이서 자세하게 살펴보기 위해 덕수궁으로 간다. 서울에 살면서 여러 가지 일 때문에 덕수궁 돌담길은 여러 번 걸어보았으나 덕수궁 안으로 입장료 천원을 내고 들어가기는 처음이다. 덕수궁은 임진왜란 때 궁궐이 모두 불에 타버리자 1593년 선조가 행궁으로 사용한 곳이다.
대한문을 지나 덕수궁 안으로 들어서자 제일 먼저 눈에 띠는 것이 금천교다. 금천교는 이 궁궐을 드나드는 모든 이가 맑고 바른 마음으로 나랏일을 살피라는 뜻으로 건너게 한 무지개 다릿발 2개가 드리워진 돌다리다. 금천교를 지나 조금 더 걸어가자 저만치 중화문이 보이고, 그 맞은편에 광명문이 있다.
보루각 자격루는 이 광명문 아래 화살을 쏘는 화차, 보물 1460호 흥천사 종과 함께 나란히 서 있다. 가까이 다가가자 연인 한 쌍이 보물인 흥천사 종과 국보인 보루각 자격루보다 화차가 더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쭈욱 내밀고 자세하게 살펴보고 있다. 나그네 또한 그 연인 한 쌍이 신기하게 보여 자꾸만 눈길이 간다.
저만치 중화루 앞에서도 연인 한 쌍이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마악 벌어지는 목련꽃처럼 하얗게 웃는다. 주말이어서 그럴까. 봄빛을 잔뜩 머금은 덕수궁 곳곳에는 연인들과 가족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이 제법 있다. 갑자기 찬바람이 불어 날씨가 추운 데도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이리저리 쪼르르 달려가는 꼬마가 앙징스럽다.
덕수궁 자격루, 중종 31년 서기 1536년에 만든 물시계
"보루각 자격루에서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은 청동제 큰 물통 1개, 옹기로 만든 작은 물통 2개, 청동제 물받이통 2개이다. 물이 흘러내리는 파이프는 지금 없으나 큰 물통에 뚫린 직경이 2.7cm이므로 대략 그 정도가 아닌가 추측된다. 청동으로 된 큰 물그릇은 지름 93.5㎝, 높이 70.0㎝이며, 작은 물그릇은 지름 46.0㎝, 높이 40.5㎝이다."-문화재청 자료 '몇 토막'
자격루 앞에 선다. 하지만 이 자격루는 삼국시대 때부터 사용한 그 물시계가 아니다. 덕수궁 광명문 아래 있는 자격루는 정해진 시간에 종이나 징, 북을 저절로 치도록 만든 자동 물시계로 중종 29년, 서기 1534년에 만들기 시작해 중종 31년, 서기 1536년에 완성된 그 물시계이다.
그렇다면 조선 들머리 세종 16년, 서기 1434년에 장영실(蔣英實)이 만들었다는 그 물시계는 어디로 간 것일까. 문화재청 자료에 따르면 세종 때 자격루는 경회루 남쪽에 보루각(報漏閣)이라는 건물을 새롭게 지어 그 안에 설치했다. 조선 왕조 표준시계였던 이 물시계는 한밤중 3경에 시각을 알리는 북소리가 세 번 저절로 울렸다.
이때 북소리를 들은 경복궁 정문 문지기들이 다시 문루 위에 있는 북을 세 번 쳤다. 이어 그 소리가 종각에 있는 북 치는 사람이 듣고 다시 종각에 있는 북을 세 번 침으로써 도성 곳곳에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북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그때부터 일어나 세수를 하고 밥을 지어먹고 하루 일에 나서기 시작했단다.
세종 때 만들어진 자격루는 그 뒤 21년 만인 단종 3년, 서기 1455년에 자동으로 시계를 알려주는 장치가 멈추고 말았다.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뒤 예종 1년, 서기 1469년에 다시 물시계가 설치되었고, 이어 연산군 11년, 서기 1505년에 창덕궁으로 옮겨져 새로 지은 보루각에 설치되었다 한다.
물통 타고 하늘로 마악 날아오를 것만 같은 용 두 마리
"보루각 자격루는 몇 차례의 수리 개조를 거쳐 효종 4년, 서기 1653년부터 1일 96각의 시제로 되면서 자격장치가 100각제 때에 맞는 것이어서 소용이 없게 되자 누각을 맡은 사신이 잣대로 측정한 시각을 손으로 쳐서 알리는 수동 물시계가 되었다"-서울 문화재 자료 몇 토막
커다란 용 두 마리가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모습이 눈에 확 들어오는 이 자격루는 <세종실록>에 그 구조와 작동 원리가 잘 기록되어 있다. <세종실록>에는 "자격루는 제일 위에 있는 큰 그릇에 물을 가득 부어 주면 그 물이 아래 있는 작은 물 보내는 그릇을 거쳐 같은 시간에 같은 양의 물이 제일 아래 길고 높은 물받이 통에 흘러든다"고 적혀 있다.
<세종실록>은 또 "물받이 통에 물이 고이면 그 위에 떠 있는 잣대가 점점 올라가 정해진 눈금에 닿으며, 그곳에 있는 지렛대 장치를 건드려 그 끝에 있는 쇠알을 구멍 속에 굴려 넣어 준다"며 "이 쇠구슬은 다른 쇠알을 굴려주고 그것들이 차례로 미리 꾸며놓은 여러 공이를 건드려 종, 징, 북을 울린다"고 적어놓고 있다.
자격루 큰 물통에는 음각으로 '가정병신유월일조'(嘉靖丙申六月日造, 제작시기)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물받이통에는 솟아오르는 용 모양을 양각으로 새겨놓았으며, 중종 때 이 물시계를 만든 우찬성(右贊成) 유부(柳溥)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 이름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하지만 작은 물통을 놓았던 돌받침대는 여기 없다. 그 돌받침대는 지금 창덕궁 명정전 뒤에 2개 남아 있다.
서울문화재 자료에는 "자격루의 발견은 인위적으로 시간을 알려야 하는 수고를 없앴을 뿐만 아니라 조선전기 과학기술의 수준을 웅변해 준 대표적인 작품"이라며 "그 규모가 크고 모양이 훌륭하여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우리나라의 과학문화재"라고 적어놓고 있다. 하긴, 이 물시계가 오죽 자랑스러웠으면 옛 만원짜리 지폐에 새겨지기까지 했을까.
누가 처음 물로 시계를 만들 생각을 했을까. 새삼 시간을 다스릴 줄 알았던 우리 조상들의 예리한 눈썰미와 지혜로움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올 봄, 새 학기를 맞은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다그치는 것도 좋지만 가까운 덕수궁에 함께 나가 우리 조상들이 남긴 위대한 과학 문화유산인 물시계를 찬찬히 살펴보는 것도 참 공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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